764화
헤이 모라에 연무장은 없었다. 하지만 공터는 있었는데, 광장으로 쓰이던 것인지 아니면 다른 용도로 쓰이던 것인지는 몰라도 아무튼 두 사람이 어울리기에는 충분한 크기였다.
"그대가 전하의 인정을 받을 만한 자인지 시험해보겠소."
카니악은 군인으로서도, 무인으로서도 자부심이 강한 사내였다. 그는 단 두 사람만 인정했다. 그의 주인인 줄카와, 상관인 아라얀.
줄카는 논외로 치고, 아라얀은 그의 목표였다. 언젠가 그를 꺾고, 용아의 대장이 되는 것이 오랫동안 품어온 야심이었다.
'듣도 보도 못한 녀석이…….'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뚝 떨어진 애송이가 줄카와 동등한 존재라도 되는 양 거드름을 피우고 있으니, 카니악의 입장에서는 아니꼽고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이자가 그렇게 대단한 자인가?
'곧 알게 되겠지.'
사람의 자격을 무식하게 싸움을 걸면서 시험하냐 할 수도 있지만, 카니악은 다른 방법은 알지 못했다. 그는 군인이기 전에 무인이었고, 백 년이 넘는 세월을 이렇게 살아왔다.
쾅!
커다란 철퇴와 가느다란 창이 부딪치며 난 소리라고는 믿기지 않는 굉음. 거기에 밀려난 것은 상대가 아니라 카니악 본인이었다.
'과연.'
철퇴를 쥔 손이 저릿했다. 아주 잠깐이지만, 몸이덜컥 멎는 것 같은 느낌까지 들었다. 키는 커도 호리호리한 체형이라 조금 우습게 봤는데, 이런 괴력을 지녔을 줄이야.
'힘으로는 안 되겠군.'
정면에서 힘으로 상대를 찍어누르는 것은 카니악이 가장 즐기는 방식이었으나, 가끔 상대에 따라 그게 통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지금도 그런 경우인 듯하니, 카니악은 당황하지 않고 철퇴를 쥔 손에서 살짝 힘을 뺐다.
강하게 후려치는 대신, 빠르게 움직이며 틈을 찾는다. 무거운 갑옷을 입고, 커다란 철퇴를 쥔 채 날렵하게 움직이는 카니악의 모습은 마치 노련한 사냥꾼 같았다.
첫 충돌 직후, 카니악이 곧바로 태세를 전환하자 군터도 그 변화를 알아차렸다.
'경험이 풍부한 녀석이군.'
저돌적인 무인의 인상이 강했는데, 지금은 잔꾀를 부리고 있다. 쓸데없는 자존심에 목을 매는 바보는 아니라는 뜻이다.
철퇴가 도끼처럼 떨어져 내렸다. 군터는 창대 중간 부분으로 그것을 튕겨내고 크게 한 걸음 내디뎌 거리를 좁혔다. 창을 쓰는 자가 스스로 거리를 좁히는 것은 일반적이지 않은 일이나,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상대의 의표를 찌를 수 있었다.
카니악이 순간 움찔하며 뒤로 물러났으나, 미처 예상치 못한 탓에 물러나는 것이 조금 늦었다.
쿵!
군터의 팔꿈치가 카니악의 가슴을 찔렀다. 철과 철이 부딪쳤고, 카니악이 비틀거리며 다시 한번 물러났다. 그에 군터는 회수한 창을 즉시 찔렀고, 카니악은 부리나케 철퇴로 그것을 막았으나 충격을 제대로 흘리지 못하고 나가떨어졌다. 군터는 그를 놓치지 않고 재차 달려들었다.
'빠르군.'
얼핏 보면 군터가 이득을 취한 것 같은 모양새였지만, 군터는 창을 찌른 순간에 카니악이 일부러 몸을 뒤로 던졌음을 알아차렸다.
아니나 다를까, 땅을 굴렀던 카니악은 즉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이쪽이 달려들기를 기다렸다는 듯 철퇴를 휘둘렀다. 이전에 가볍게 휘두르던 것과는 달리, 엄청난 힘이 실려 있음을 바람이 찢기는 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역공이자, 빈틈을 노린 회심의 일격.
만약 아무 생각 없이, 물러난 상대를 쫓겠다는 일념으로 무작정 달려들었다면 이 공격에 크게 낭패를 봤을 것이다.
하지만, 군터는 카니악이 일부러 몸을 뒤로 뺄 때부터 이런 그림이 이어질 것이라 대강 예상했었다.
군터가 몸을 살짝 뒤로 젖혔다. 그러면서 아래에서 위로, 창을 크게 올려 쳤다. 창끝은 정확히, 화살보다 빠르게 날아오던 철퇴를 후려쳤다.
"큭!"
처음으로 카니악의 입에서 신음이 튀어나왔다. 철퇴를 쥔 카니악의 팔이 뽑힐 듯 위로 튕겼다. 카니악은 이번에도 몸에 힘을 뺐다. 철퇴를 놓으려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었 텐데도, 철퇴를 놓느니 차라리 몸이 허공에 붕 뜨는 것을 택한 것이다. 손해를 보더라도 싸움을 끝내지 않겠다는 의지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쾅!
창끝이 철퇴를 후려치고 반쯤 회전했을 때, 군터는 힘을 죽이지 않은 채 창대 끝으로 카니악의 옆구리를 때렸다. 카니악은 미처 막을 겨를도 없이 또 한 번 신음을 토하며 나가떨어졌다. 이번엔 일부러 물러난 것이 아니었고, 군터는 한 번 잡은 승기를 놓치지 않고 달려들었다.
"흐읍!"
카니악이 재빨리 몸을 일으켰으나, 그가 제대로 자세를 잡기도 전에 군터의 맹공이 쏟아졌다. 카니악은 쏟아지는 공격을 막기에 급급했다.
'이 녀석…!'
카니악은 분노했으며, 동시에 감탄했다.
쏟아지는 공세에 숨을 쉬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일반적으로 창을 쓰는 자는 거리를 벌리기 마련인데, 이 녀석은 오히려 스스로 거리를 좁혔다. 창날만이 아니라 창대 중간, 끝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며 검사라도 되는 것처럼 정신없이 몰아붙였다.
쿵!
그게 끝이 아니다. 창을 다루는 솜씨도 솜씨지만, 이 박투술 역시 예사롭지 않았다. 팔꿈치, 무릎, 심지어 주먹까지 휘둘러대는데 그 한방 한방이 망치나 철퇴로 후려치는 것 같은 위력이었다. 두꺼운 전신 갑옷을 입은 그가 무시할 수 없을 정도의 충격을 주니, 언제 움직일지 모르는 팔과 다리도 계속 신경을 써야 했다.
"크악!"
베어 오는 창을 막는 데 정신이 팔렸다가 아래에서 날아오는 발차기를 놓쳤다. 무릎을 걷어차이고 순간 몸이 기우뚱했고, 그 순간 어깨가 밀고 들어왔다. 세상에! 몸통박치기라니, 이런 식의 싸움은 길바닥의 왈패 놈들이나 할 법한 것이지 않나.
그러나 그런 저열한 방식에 카니악은 호되게 당하고 말았다. 정확하게 가슴 한가운데에 묵직한 충격이 전해지자, 그는 순간적으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발작적으로 철퇴를 휘두르지 않았다면 곧바로 이어진 일격에 승부가 결정났을 것이다.
"허억…허억…!"
대결을 시작한 지 얼마나 됐을까. 한 백합 정도까지는 기억했었던 것 같은데, 그 이후로는 셈을 할 여유가 없었다. 의미도 없었고, 어느 정도 치열함이 감돌았던 것은 처음 한두 번 정도였다. 그 이후로는 일방적인 양상이었고, 버티는 게 고작이었다. 카니악 자신도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완전히 붉게 물든 눈에서 분노가 활활 타올랐다.
'이런 빌어먹을!'
기세 좋게 시험해보겠다고 나서지 않았나. 하지만 이게 대체 뭐란 말인가. 승리는커녕, 어떻게든 더 버티기 위해 전전긍긍하는 꼴이라니!
"더 할 텐가?"
한참 전부터 숨을 헐떡이고 있는 자신과 달리, 상대는 여전히 여유로웠다. 호흡이 조금 거칠어지기는 했지만, 그런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전하."
이를 부득 갈던 카니악이 멀찍이 떨어져 있던 줄카를 바라보았다. 여유롭게 팔짱을 낀 채 둘의 승부를 구경하던 줄카는 수하의 시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바로 알아차렸다.
전력을 다하게 해달라는, 허락을 구하는 눈빛.
[의미 없다. 저 녀석도 숨기고 있는 것이 있으니, 서로 전력을 다하더라도 결과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투구 속 카니악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하!"
분하지만, 승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카니악은 자부심이 강하고, 한편으로는 오마한 자였지만 주인에 대한 충성심과 믿음만은 그 누구보다 확고했다. 줄카가 그리 말했다면 그런 것이다.
'아직 숨겨놓은 패가 있다고?'
카니악의 이글거리는 시선이 군터에게 향했다. 여유가 있어 보인다고는 생각했는데, 정말로 숨겨놓은 힘이 있었단 말인가.
"이거…꼴이 우습게 됐구만. 내가 졌소."
긴 한숨을 내쉬고, 카니악은 그의 철퇴를 아래로 내렸다.
***
카니악과 군터의 대결은 당사자들에게도 그랬지만, 줄카에게도 꽤나 큰 즐거움이었다.
줄카는 카니악을 압도하는 군터를 보며, 그가 자신과 같은 부류라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신이라는 게 뭐라고 생각하지? 정확히 말하면, 세인들이 신이라고 부르는 것들 말이야.]
군터는 생각해본 적이 없다고 답했다. 그에 줄카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계속 말을 이었다.
[그것은 세상의 일부이며, 축이다. 정령과 비슷하지만, 그보다 더 거대한 존재지. 세상의 기운이 일정 수준 이상으로 차오르면 존재를 잉태하고, 그 존재가 있음으로 인해 세상은 생기를 얻는다.]
거기까지 말한 줄카는 가볍게 웃었다.
[짐작했겠지만, 내가 한 말은 아니 쿠엘단 녀석이 한때 이 부분에 대해 깊게 파고들었고, 그 결과를 내게 약간 들려준 것을 그대로 읊은 것뿐이야.]
쿠엘단은 세상의 모든 신비를 파헤쳤다. 그는 전지를 목표로 했고, 신의 존재와 그 비밀은 그에게 있어 당연히 연구해야 할 대상이었다.
[신이라 불리는 것들은 대개 짐승과 같지. 다만 살아남기 위해 무언가를 먹어야 하는 짐승들과 달리, 그것들은 존재를 유지하기 위해 해야 하는 행위가 없다. 그것들은 그저 존재할 뿐이야. 존재하는 것이 존재 이유인, 희한한 것들이지.]
신이 신으로 불리기 시작한 것은 그것을 목격한 인간들이 생긴 이후부터다. 처음에 인간은 그것을 두려워했다. 그들이 사냥할 수도, 가까이 다가갈 수도 없는 존재를 목도한다면 당연히 가질 수밖에 없는 감정이다.
두려움 다음에는 경외였다. 그때부터 인간은 그것들을 섬기며, 신이라 불렀다.
[오랜 세월 동안 그랬다더군.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꼭 청개구리 같은 놈이 하나둘씩 튀어나오기 마련이지. 현재에 순응하기보다는 더 큰 무언가를 이루려 하는 녀석들. 그런 놈들은 신이라는 존재를 마냥 경외하기보다, 그것들을 좀 더 알길 원했다.]
그리고 안 후에는, 뛰어넘기를 욕망했다.
그런 이들 중, 가장 특출난 자가 바로 황제였다.
[그 녀석은 욕망의 화신과도 같았지. 인간으로 태어났지만, 인간으로 죽기를 원하지 않았어. 녀석은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손에 넣고, 정복하고자 했다. 신이라고 불리는 존재들 역시 예외는 아니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