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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763화 (763/1,064)

763화

군터는 줄카가 왜인지 몰라도 자신에게 호감을 보이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머릿속을 울리는 그의 진의(眞意)가 아니었더라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 힘. 어디서 얻었지?]

줄카는 한번 그렇게 물었다. 그리고 곧장 번복했다.

[아니.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지.]

그는 들떠있었다. 군터는 그가 느끼고 있는 기쁨이 조금씩 커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처음에는 불편함을 느끼지. 하지만 그 단계가 지나면 조금씩 친숙함을 느낀다. 이미 알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우리 같은 자들은 세상에 많지 않거든.]

많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거의 없지. 줄카는 그렇게 덧붙였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조금 해주었다. 군주라는 호칭으로 묶지만, 사실 그들은 서로 적이나 다름없는 관계였다고. 그나마 친분이 있는 이가 룬차이와 쿠엘단이었다고 말이다. 우연하게도 군터와 연이 있는 두 명이었다. 룬차이와는 비록 직접 얼굴을 보지는 않았다고 하나 그의 깃발을 든 군대와 싸웠었고, 쿠엘단은그의 증인으로서 승천(당사자의 표현을 빌리자면)의 현장에 증인으로서 참여했었다.

줄카의 이야기가 계속 이어지던 중, 군터는 짤막하게 그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러자 줄카는 크게 관심을 보였다. 특히 후자에.

[그 자리에 증인으로 있었다고? 그렇군. 그 녀석은 네 존재를 알고 있었던 거군. 뭐, 이상한 일도 아니지.]

줄카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쿠엘단은 그의 인형들을 이용해 이곳저곳을 살피기를 즐겼다. 분명한 목적의식을 갖고 하는 일이라지만, 줄카는 그것을 단순한 유희 행위로 여겼다. 혹시 이 세상에 아직 알지 못하는 것이 남아있지는 않을까, 하면서 눈에 불을 켜는…….

[그 녀석이 너를 증인으로 삼았던 이유를 알겠나?]

"몰랐었지. 하지만 이제는 알 것 같소."

왜 하필 일면식도 없는 자신이었을까, 조금 궁금했던 적도 있다. 하지만 이제는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오직 자신만이 증인이 될 자격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 거듭 말하지만, 세상에 우리 같은 존재는 몇 없다.]

뭣 모르는 자들은 그들을 신인이니 뭐니 하고 추켜세우지만, 말 그대로 뭘 모르기 때문에 하는 말에 불과하다.

태어나기를 인간으로 태어나, 인간으로 살아온 자들이 인간을 뛰어넘은 존재로 거듭났다. 세월을 피하고, 죽음을 피하기를 갈망하는 자들의 입장에서는 바라마지않는 축복이요 기적이겠으나…진실은 생각처럼 달콤하지 않다.

[인간으로서 살아온 날을 기억하는 한, 그 흔적이 남아있는 한, 괴리감에 사로잡히는 것은 필연이다. 하지만 괜찮아. 혼란스럽기는 해도, 결국 시간은 모든 것을 묻어버리니까. 문제는 그 이후지.]

기억은 흐릿해질 뿐 완전히 지워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흔적은 사라진다. 지인? 그들은 세월을 이기지 못한다. 가족 역시 마찬가지. 자식이 죽고, 그 자식이 죽고, 또 그 자식이 죽는다. 대를 이어가며 사라지는 그들을 지켜보며 처음에는 슬픔을 느끼지만, 나중에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 자신의 피를 이은 후손이라는 인식은 있지만, 가족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게 된다.

그렇다면, 남은 게 무엇인가.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그때가 되면 자신이 지독한 저주를 받았음을 이해하게 된다.

"저주?"

군터는 순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저주지. 그것도 아주 지독한.]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던 줄카가 갑자기 혀를 찼다.

[아, 넌 조금 다를지도 모르겠군. 하지만…아니야. 그래도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결국, 우리와 같은 것을 느끼게 되겠지.]

***

"그렇군."

7황자, 자콥 트라소프는 밀정의 보고를 들었다. 군터 크렘보르가 소수의 부하를 거느리고 헤이모라로 향했다는 소식이었다. 그렇다면 아마도, 지금쯤 줄카와 접촉했으리라.

"전하."

검은 피부의 호위 무관이 상념에 잠긴 그를 깨웠다. 자콥 트라소프는 자신도 모르게 그를 바라보았다. 처음 만났을 때는 흑요석처럼 빛이 난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그 빛이 거의 다 사라졌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아무리 단련한다 한들, 결국 세월의 흐름은 인간이 피할 수 있는것이 아니니까.

"카자쿠. 할 말이 있나?"

"어찌 그리 신경을 쓰십니까? 군주 줄카는 전하의 동맹이고, 군터 크렘보르는 전하의 신하입니다."

카자쿠는 어리석지는 않지만, 단순하다. 그 점이 마음에 들어서 오랜 세월 곁에 두었다. 물론 훌륭한 실력과, 굳건한 충성심이 선행되었기 때문이지만,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지. 인간이 아닌 자들은 인간의 예상을 심심찮게 벗어나곤 하니까."

"하지만…그들의 만남은 전하께서 의도하신 바가 아닙니까."

"그래."

줄카와 군터 크렘보르의 만남은 그가 의도한 바다. 헤이모라에 붙들려 있다는 술사? 그 정도 문제야 간단히 몇 마디로 해결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은 까닭은, 그가 그 둘이 만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만 해도 충분히 늦췄다. 더 숨길 수는 없지.'

억지로 숨겼다가는 후일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 어떻게 반응할지 모른다. 그런 위험부담을 감수하느니, 차라리 지금 자연스럽게 알게 하는 편이 낫다.

'자괴감이 드는군.'

그토록 닮고 싶지 않았던 황제의 면모를, 일부나마 닮아가는 것 같아 입맛이 썼다. 그러나 자콥 트라소프는 자괴감의 이유를 인정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부정했다.

'난 그와 다르다. 난 결코 그처럼 되지 않을 것이야.'

자꾸만 커지는 자괴감을 잊기 위해, 그는 대의를 생각했다. 어리석은 형제들을 물리치고, 나아가 리비암에 똬리를 튼 괴물을 없애기 위해. 그리고 이 나라를 혼란에서 구해내고, 인간의 국가로 다시 세우기 위해..

이 모든 일은 오직 그 하나만을 위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힘이 필요하다면 취할 것이고, 늪에 발을 디뎌야 한다면 디딜 것이다.

***

군터는 줄카가 자신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음을 알았지만, 그렇다고 그 호의가 무조건적인 것은 아님도 알았다.

줄카의 말들은 일부 흥미 없는 부분도 있었지만, 대부분 그에게 도움이 됐다. 특히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의문을 애써 묻어두고 있었던 군터에게 있어, 줄카의 조언은 머릿속의 안개를 걷어내는 한 줄기 빛과 같았다.

하지만 대가 없는 호의를 계속 바랄 수는 없는 법. 군터는 줄카의 이야기를 계속 듣기 위해서는, 이제 자신도 입을 열어야 함을 알았다.

"내가 변한 것은, 북방의 땅에서였소."

줄카는 군터라는 존재 자체에 대해 호기심을 갖고 있었다. 그렇기에 군터는 그가 궁금해할 법한 자신의 이야기를 처음부터 시작했다. 정확히는 '변화'를 느꼈던 시점부터.

그 이야기는 그리 길지 않았다. 군터는 이야기를 늘어놓는 데 재주가 없었고, 그저 기억하는 것을 툭툭 꺼내놓는 것에 불과했으니 청자의 입장에서는 친절하지 않다고 느낄 법했다.

그러나 줄카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는지, 군터의 짤막한 이야기가 이어지는 내내 흥미를 보였다. 초원인들과의 전쟁 부분에서는 감탄사를 뱉기도 했다. 그러나 반응의 절정을 찍은 것은 군터가 한 번 죽음을 겪었음을 고백한 부분에서였다.

[독특한 경험이군. 나조차도 겪은 바 없다. 혹시 쿠엘단 그 녀석이라면 또 모르겠지만……]

"내 말을 믿소?"

[믿지 않을 이유가 있나?]

보통 죽음을 경험했다 하면,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 하면 눈부터 동그랗게 뜨는 것이 정상일 것이다.

부활이라는 것은 인간에게 허락된 영역이 아니며, 신화나 전설 속에서도 부활이라는 소재가 등장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그만큼 쉽게 생각하기 힘든, 그런 것이 존재한다고 믿는 것조차 힘든 일이다.

그러나 줄카는 아무런 의심도 없이 믿었다. 군터는 그것이 신기했다.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상대가 자신을 이렇게 믿는다는 사실 자체가 말이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겠군. 하지만 안타깝게도 네가 지금 하는 생각이 착각이라는 것을 짚어줘야겠군.]

"착각?"

줄카가 피식 웃었다.

[부활이라는 것이 신기하기는 하다만, 세상에는 그 못지않게 신비롭고 믿기 힘든 일이 꽤 있다. 내가 직접 보고 겪었던 것들도 적지 않지. 그런 경험이 있으니, 네가 하는 말이 신기하게 들린다고 해서 믿지 못할 이유는 없다는 거다.]

그 순간. 군터는 줄카의 이명을 떠올렸다.

용살자 줄카.

용을 죽이고, 그 피로 자신의 수하들을 불멸의 존재로 만들었다고 했다. 용아(龍牙)라는 이름의 유래가 바로 그로 인한 것 아닌가.

제국 안에서는 찾아보기 힘들지만, 제국 밖에는 여전히 인간이 아닌 신비로운 존재가 많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용은 찾아보기 힘들다. 찾아볼 수 없다가 아니라 찾아보기 힘들다. 인 이유는 더 이상 용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한 이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존했던 용을 죽인 존재가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혹, 이자도…….'

군터가 줄카의 뒤편에 기둥처럼 서 있는 사내를 보며 물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도전적인 눈빛을 던져온 자였다.

[카니악이라고 한다. 짐작하는 것이 맞아. 내 피를 받았고, 꽤 오랫동안 날 따르고 있지.]

그 말에 카니악을 바라보는 군터의 눈빛이 달라졌다. 평범한 인간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확답을 듣고 나니 조금 흥미가 생겼다.

"그런데…왜 나를 그리 뚫어져라 보는 거지?"

저 도전적인 눈빛이 처음부터 신경이 쓰였다. 그렇기에 군터는 줄카가 카니악을 소개하며 했던 말 중에 조금 이상한 부분이 있었음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의아해서 말이지. 그대가 진정 전하와 동등한 존재인가, 의구심이 들어."

카니악의 시선은 군터에게 있어 익숙한 것이었다.

호승심.

[상대해보겠나?]

줄카는 만류하지 않았다.

[나도 네 실력이 조금 궁금하긴 하군. 칼솜씨가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보아하니 너도 그쪽으로 꽤 자부심이 있는 모양인데.]

그러기는커녕, 오히려 더 부추겼다.

"그러지."

군터는 피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별생각 없었지만, 상대가 먼저 이렇게 도발을 해오니 몸이 근질거렸다.

"하지만 충분할지는 모르겠군."

그 말에 이번엔 카니악의 눈빛이변했다. 안면 가리개 사이로 드러난 눈이 서서히 붉게 물들었다.

"충분할 거다. 장담하지."

그의 말투에서는 이제 존대마저 사라졌다. 사나운 기세가 풀풀 풍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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