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2화
처음 본 순간 알았다. 아니, 사실 도시에 들어서기 전부터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낯설면서도 익숙한, 거대한 존재감. 그것은 말하자면 일종의 동질감이었다. 생판 처음 보는 자에게 동질감을 느낀다고 하면 우스운 얘기로 들릴 수 있지만, 정말 그랬다. 우습게도, 군터는 줄카임에 분명한, 호리호리한 사내를 보며 동질감과…혐오감을 느꼈다.
'왜지?'
동질감도 혐오감도, 영문을 알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군터는 불쾌함을 억누르며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가 말하기 전에 머릿속에서 소리가 울렸다.
[화가 나나? 하지만 왜 화가 나는지 알지 못해서 답답하지. 안 그런가?]
묻고 있으나 답을 구하는 물음이 아니다. 내려다보는 듯한 말투에서는 이미 답을 알고 있는 자의 여유가 묻어난다.
그런데 그 여유로움이 왠지 또 불쾌했다. 그런 그의 속내를 눈치채기라도 했는지, 줄카가 피식 웃었다.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군. 얼굴 가죽은 물기 없이 말라비틀어진 것 같지만, 마음이 기세에 고스란히 드러나니 가면을 쓴 보람이 없지.]
처음 본 사이임에도 다 알고 있다는 듯 지껄여대는 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군터는 이제 기세를 절제하지 않았다. 어차피 소용없다는 것을 안 이상, 괜한 노력을 할 필요도 없지 않은가.
사나운 기세가 우리에서 풀려난 야생마처럼 휘몰아쳤다. 줄카는 별 반응이 없었으나, 그의 옆에 있던 중무장한 무관은 살짝 몸을 떨었다. 군터는 그의 도전적인 붉은 눈에서 시선을 떼고 줄카를 바라보았다.
"내 수하를 데려가도 되겠소?"
[궁금하지 않나? 보아하니 지금쯤이면 슬슬 이질감을 느끼고 있을 것 같은데.]
머릿속에서 울리는 소리에, 분명 그러리라는 확신이 느껴졌다. 더불어 진한 흥미도.
[너 같은 녀석이 어떻게 그 꼬마 놈의 밑에 있는 것인지 궁금하군. 입으로는 인간의 세상이니 뭐니 떠들어대도 결국 제 형제들을 이기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하다는 건가.]
내용은 조롱하는 것 같지만 진의는 그게 아니었다. 군터는 그 조롱 아닌 조롱에서 아무런 감정도 느낄 수 없었다. 그것은 그저 속이 텅 빈 말장난에 불과했다.
마치 인형을 앞에 두고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 같은 느낌. 군터는 이전에 이와 비슷한 느낌을 받은 적이 있었다. 군주 쿠엘단에게서였다.
같은 군주라서일까? 하지만 쿠엘단은 지금 눈앞의 이자에 비하면 훨씬 인간적이었다. 당시의 쿠엘단은 무언가에 단단히 꽂혀 있었고, 당시 그의 표현에 따르면 '증인' 으로서 그를 마주했던 군터는 그의 기이한 열망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때는 쿠엘단이 광인 같다고 생각했지만, 어쨌거나 광인도 사람이 아닌가. 하지만 이 줄카라는 자는 사람이 아니라 인형 같았다. 사람 흉내를 내는 인형.
[물과 기름이라고 할 수 있지. 아무리 섞여들려고 해도 섞일 수 없다. 결국, 무의미한 노력 끝에 남는 것은 고독과 분노뿐.]
씁쓸함. 군터는 그제야 줄카가 인형이 아님을 알았다.
'나와 같다.'
처음 보는 자가 어째서 익숙하게 느껴지는가. 그 이유를 알았다. 그건 이 줄카라는 자가 자신과 닮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 묶여있는 존재다. 한 방울 빗물로 태어났으나 호수와 강이 되어버렸지. 때문에 마른 바람은 우리를 없앨 수 없으며, 쉽게 흔들리지도 않는다. 원했든, 원하지 않는 큰 존재가 되어버렸기에 사라질 자유와 움직일 자유조차 잃어버리고 말았지. 알지 않나? 아니면 이제 슬슬 느끼고 있는 건가?]
군터는 상대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잠깐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익숙해졌기 때문인지, 불쾌하게 뒷덜미를 긁는 것 같은 혐오감은 처음보다 덜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중요치 않지. 네 쪽에서 내게 듣고 싶은 이야기가 있을 텐데. 그렇지 않나?]
***
줄카는 군터는 어두컴컴한 지하 미궁에서 나와 적당한 크기의, 집인지 창고인지 분간되지 않는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작은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탁자 위에는 뚜껑만 열었는데도 알싸한 향이 그윽하게 퍼지는 술 한 병이 전부였다.
[이런 몸이 되어 마음에 안 드는 것이 많지만, 이건 그중에서도 손꼽히지.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 않는다는 것 말이야.]
"취하지도 않는 술을 왜 마시지?"
[기억을 더듬는 거지. 나름의 노력이다. 네 녀석도 명심하는 게 좋아. 떠미는 물살에 그대로 몸을 맡겼다가는 어디로 흘러가는지도, 네 자신이 누구인지도 점점 잊어가게 될 테니까.]
줄카의 의도를 알 수도, 짐작할 수도 없었다. 다만 군터는 그가 자신과 동류이며, 앞선 경험을 가진 선배라는 것을 인정했다. 그것이 여기까지 순순히 따라온 이유였고, 헛소리처럼 들리는 이런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는 이유였다.
[말했듯, 우리는 이 세상에 묶인 존재다.]
"죄수처럼 말인가?"
[아니, 그것과는 달라. 묶였다기보다는 이어졌다고 하는 게 낫겠군. 뭐 표현을 어찌하든, 어차피 다 이해했을 테지만.]
그 이해라는 것이 답답함과 분노를 뜻하는 것이라면 충분히 이해했다. 하지만 상대가 그것에 매우 부정적이라는 것을 제외하면, 여전히 설명이 부족했다. 머릿속에 울리는 소리는 말하는 자의 감정이나 진의를 고스란히 전달해주지만, 생각이나 기억을 공유해주지는 않는다.
[더 큰 존재가 되었다고 하더군. 틀린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그게 완전히 옳은 표현인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넌 이제 인간이라고 할 수 없다. 아직은 인간이었을 때의 기억과 흔적이 남아있기에 크게 흔들리지는 않고 있는 것 같지만, 그것도 이제 곧이다.]
"무슨 뜻이지?"
[짐작하고 있을 텐데.]
줄카가 병째로 들이켰다. 단 두 모금을 들이킨 그가 병을 내려놓았다. 텅 빈 병에서 작지만 맑은 소리가 났다.
[개미를 보며 무슨 생각을 하나? 같은 공기를 마신다고 해서 그것들에게 동질감을 느끼나? 아니. 아니지. 그것들의 삶은 너무나 짧고, 움직임은 하찮기 그지없어. 시간의괴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결코 그것들을 이해할 수 없음을 말하는 거지. 알 수는 있을지라도 이해할 수는 없다. 얼마간 개미 행세를 할 수는 있어도 개미가 될 수는 없어. 개미들의 세상에 네가 설 자리는 없다. 당장은 아니더라도, 결국 너도 그걸 알게 될 거야.]
"내게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후배에게 베푸는 후의라고 해두지. 네 녀석을 보고 있자니 과거의 내가 떠올라서 말이다. 그때의 내게도 지금의 나처럼 조언을 해주는 녀석이 있었다.]
"그게 전부는 아니지."
숨기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줄카는 그의 말 속에 그의 감정을 고스란히 담았다. 그가 품고 있는 흥미와 기대가 가감 없이 느껴지니, 군터는 그가 빨리 본론을 꺼내기를 바랐다.
[전혀 기대하지 않던 횡재를 한 기분이야. 이런 곳에 너 같은 녀석이 있을 줄은 몰랐다. 도움을 주지. 그 대신 네 녀석도 내게 도움이 됐으면 한다.]
"도움?"
[네게도 좋은 일일 거다. 나는 네 존재가 반갑지만, 나와 대립하는 녀석은 널 반기지 않을 거야. 없애려고 할지도 모른다. 그래. 아마 그럴 거야. 그러니 나를 돕는 것은 너 자신을 돕는 것이기도 하다.]
거짓은 없다. 사실인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상대는 정말로 그리 생각하고 있다.
군터는 미간을 좁혔다. 한순간에 이해할 수 없는, 너무도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그의 혼란을 짐작한다는 듯, 줄카가 말을 이었다.
[카라누르는 지저분하게 돌아가고 있다. 판을 짠 놈이 있지. 그놈은 이 나라가 철저하게 망가지기를 원한다. 그리고 나는 그걸 원하지 않지.]
"군주로서의 의무감인가?"
줄카가 재미있는 농담을 들었다는 듯 낮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역시 마른 웃음이었다.
[아니. 단지 판을 짠 그놈이 마음에 들지 않을 뿐이다.]
아마 제국의 다른 누구라도 여기까지 들었다면 기함했을 것이다. 제국 전역을 들끓게 하고 있는 전란이, 황좌를 향한 황자들의 야욕이 아니라 단 한 사람의 비뚤어진 마음 때문이었다는 것을 안다면 말이다. 부정할 테고, 터무니없는 이야기라며 웃겠지. 하지만 그 믿기 힘든 이야기를 전하는 이가 제국의 군주라면, 그때는 믿지 않을 도리가 없을 것이다.
"내게 무슨 도움을 줄 수 있지?"
[궁금한 것이 많지 않은가? 여러모로 혼란스럽기도 할 테고, 잠깐이지만, 선배로서 네 녀석의 조언자가 되어주지.]
"내 수하는?"
[아, 물론…돌려주겠다. 사소한 것에 연연하는군. 거듭난 지 얼마 안 된 모양이지?]
***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에, 대답하는 것이 조금 늦었다.
'그 녀석이 나를 처음 봤을 때도 이랬을까?'
줄카는 옛 기억을 더듬으며, 마주 앉은 상대를 다시 한번 살폈다.
흥미로웠다. 풍기는 기운만 놓고 보면 이미 거의 다 벗어던진 것 같은데, 하는 말이나 행동을 보면 아직 인간다운 점이 심심찮게 보였다.
그건 마치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을 가진 짐승이 얌전히 앉아 풀을 뜯어 먹는 모양과 같았다.
어떻게 봐도 어울리지 않는다. 하지만 줄카는 그것이 썩 나쁘게 보이지 않았다.
'나도 저랬을까.'
줄카는 과거의 자신을 돌아보았다. 계약을 맺고 거듭났을 때, 그는 적잖은 혼란을 겪었다. 룬차이의 조언이 아니었다면 아마도 꽤 고생을 했을 것이다. 그의 조언 덕분에 혼란을 잠재울 수 있었고, 거듭난 후의 삶을 무리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어쩌면, 이 녀석에게는 조언이 필요 없을지도 모른다.'
자콥 녀석이 도움을 준 것일까? 그럴 수도 있다. 제 아비부터 시작해, 인간을 뛰어넘은 것들을 극도로 혐오하는 녀석이니까. 쓰임새가 있어 쓴다고 해도, 자신이 혐오하는 괴물을 곁에 두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름대로 교육을 시켰겠지.
'하지만 그것도 한계는 있다.'
자콥 트라소프는 반쪽짜리다. 강한 피를 이었지만 완전하지 않고, 무엇보다 본인 스스로가 그 피를 거부하고 있기에 그는 완전히 거듭나지 못한다. 반쯤 인간에 걸쳐 있는 그는 결코 완전히 거듭난 자를 이해할 수 없다.
'게다가…….'
나름 짐작되는 점이 있다. 만약 이 군터라는 녀석이 거듭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면, 녀석에게는 여러 가지 끈이 있을 것이다. 인간이었을 적에 맺어진 끈. 가족이 됐든, 친구가 됐든, 이런저런 기억이 됐든.
결국은 시간문제다. 그것들은 모두 세월 앞에 사라지게 되어있으니.
모든 끈이 사라지게 된다면, 그때도 지금처럼 인간적인 면을 유지할 수 있을까?
'불가능하지.'
확신한다. 겪어보았으니까. 그 모든 것이 사라졌을 때, 상실감마저 들지 않을 정도로 무뎌졌을 때, 비로소 완전히 거듭나게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