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1화
모페이브에게서 서신이 왔다. 봉인을 뜯을 때까지, 군터는 으레 오던 소식인 줄 알았다. 솔롬의 근황과 지하 미궁에 대해 새롭게 알아낸 것을 이야기하는.
"……."
담담히 서신을 읽어가던 군터가 어느 순간 미간을 좁혔다. 서신의 내용은 그가 전혀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다.
"토어릭, 시어문드를 불러라."
다 읽은 서신을 내려놓고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군터는 두 사람을 불렀다. 늦은 시각이었지만 두 사람은 부름을 받자마자 달려왔는데, 탁자 위에 놓인 서신을 보며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이 갑작스러운 호출이 저 서신 때문임을 바로 짐작했다.
"어인 일이십니까. 솔롬에 무슨 문제라도?"
토어릭이 물었다.
"문제라면 문제지. 읽어봐라."
두 사람이 서신을 읽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의 표정이 동시에 굳어졌다.
"줄카라니……."
"뜬금없군요."
토어릭은 탄식했고, 시어문드는 미간을 좁힌 채 턱을 긁었다.
"어찌해야 하겠나."
"으음."
토어릭도 시어문드도 쉽게 답하지 못했다.
"일단…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결국 먼저 입을 뗀 것은 토어릭이었다.
"느닷없이 나타나기는 했지만, 정체 모를 적에게서 구해주었으니 적의는 없다고 봐도 좋을 것입니다.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모페이브님이 헤이모라에 억류…가 되었다는 것인데……."
그 말대로다. 모페이브는 지금 헤이모라에 억류되어 있다. 억류라고는 해도 거칠게 하지는 않는 모양이지만, 어쨌거나 불쾌한 일이다.
그렇다. 불쾌하다.
자신의 수하가, 군주든 뭐든 다른 이에게 억류되어 있다는 것이 불쾌했다.
서신에 따르면 줄카가 원하는 것은 모페이브가 그간 지하 미궁에 대해 연구한 자료였다. 모페이브의 말에 의하면 줄카는 헤이모라의 주인이었던 쿠엘단과 친분이 있는 듯하며, 쿠엘단의 흔적에 대해 흥미를 갖고 있다고 했다. 더하여, 모페이브는 줄카가 원하는 것을 얻고 나면 자신들을 풀어줄 것이라고도 했다.
"모페이브 공은 장군께서 나서지 않으셨으면 하는 겁니다."
시어문드의 말대로다. 모페이브는 서신에 명확히 그의 뜻을 드러냈다. 일이 당황스럽게 되기는 했으나,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게 아무 문제 없이 해결될 것이라고. 그러니 나서지 않았으면 한다고.
모페이브가 자신의 뜻을 이렇게 직접 드러내는 것은 극히 드물었는데, 아무래도 상대가 상대인 만큼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토어릭과 시어문드도 모페이브와 같은 마음이었다. 어지간한 상대였다면 강하게 나간다고 한들 어쩔 수 없다고, 아니면 오히려 강하게 나가라고 조언했겠지만…상대가 상대이지 않은가.
하지만 그들은 조금의 변화도 없는 군터의 기색을 살피며, 그가 모페이브의 바람처럼 가만히 있지는 않으리라고 짐작했다.
"일단은, 조정에 알리시지요."
정확히는 조정이 아니라 황자다. 군터에게 헤이모라의 관리를 맡긴 것은 조정이 아니라 황자였다. 게다가 줄카가 갑작스레 헤이모라에 나타났다지만, 다른 이는 몰라도 황자는 그의 움직임을 알고 있었을 터. 그런데도 이쪽에 아무런 언질도 없었다는 것은 분명 따지고 들 수 있는 부분이다.
군터는 일단 황자에게 따지라는 조언을 받아들였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헤이모라로 가고 싶었지만,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
"토어릭."
"예."
"네가 가라."
"알겠습니다."
***
'테리브란은 오랜만이군.'
쉬지 않고 말을 달렸다. 바쁜 와중에도 꾸준히 몸을 단련했기에 고된 일정에도 퍼지지 않을 수 있었지만, 저 멀리 테리브란의 성곽이 보이기 시작하자 저절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래. 이제 나도 마냥 젊은 나이는 아니지.'
40을 갓 넘겼으니 그리 많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일선에서 뛰는 무관으로서는 적지 않은 나이다. 전령처럼 급하게 움직여도 될 나이도 아니고.
문득, 토어릭은 할렌의 심정이 아주 조금이지만 이해가 되는 것 같았다. 할렌은 자신의 삶이 전장에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었다. 그러니 쇠락해가는 몸뚱이로 인한 상실감 역시 컸을 터.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역시 너무 극단적이었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지금에서야 그는 할렌을 조금이나마 이해했지만, 어디까지나 조금이었다.
"바로 궁으로 가십니까?"
"그래야지. 지체할 시간이 없다."
입궁 요청은 금방 받아 들여졌다. 마치 오는 것을 기다렸다는 듯.
"헤이 모라의 일 때문인가?"
왕궁 대전에 홀로 들어선 토어릭은 적막한 공기에 적응할 틈도 없이, 나직이 울리는 목소리에 답해야 했다.
"그렇습니다."
"네 주인에게 전해라. 헤이모라의 관리에 대해서는 이제 손을 떼라고."
일방적인 통보에 토어릭의 입매가 꿈틀거렸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 표정이 보이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불경죄로 추궁을 당했을지도 모르니.
"그리 전하겠습니다. 허나 전하. 크렘보르 장군은 헤이모라에 대한 것보다, 그곳에 억류당한 수하를 찾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수하?"
토어릭은 모페이브와 나짐 등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지하 미궁을 연구하던 그들이 정체 모를 적들에게 습격받은 이야기도 숨기지 않았다.
"줄카는 그 술사를 해칠 마음이 없다. 볼일을 다 보고 나면 돌려보내겠지. 아니면 먼저 헤이라모라를 떠날 수도 있고."
"전하. 거듭 말씀드립니다만, 크렘보르 장군은 억류된 수하를 찾고자 합니다. 장군이 바라는 것은 단지 그뿐입니다."
"……."
황자의 표정도, 목소리도 듣고 볼 수 없었지만 토어릭은 그가 언짢아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왜 아니겠는가? 제국의 두 주인 중 하나라 해도 무방한 그가 자신의 수하에게 추궁을 당하고 있는 꼴이지 않나. 토어릭은 그가 노하여 자신의 목을 치지 않기만을 바랐다. 목숨에 연연하는 편은 아니지만, 이렇게 허무하게 죽을 생각은 없었으니까.
"좋아. 솔직히 말하지. 줄카에 대해서는 내가 손을 쓰기가 어렵다. 그의 신분 때문이 아니라, 그가 내게 큰 도움을 준 동맹이기 때문이다."
"… 동맹, 말씀입니까."
토어릭은 순간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들뻔했다. 정말 뜻밖의 이야기를 들었다. 군주 줄카가 황자의 동맹? 게다가 이미 큰 도움을 받았다고? 그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동맹. 동맹이라. 받았다는 큰 도움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필시 답답한 전황을 해결할 수 있는 열쇠겠지. 그렇다면 줄카가 헤이모라에 들른 것은 우연이 아니라는 뜻인가? 아니, 우연일 리가 없지. 황자와 줄카의 동맹은 필시 오래된 것이 아닐 거다. 그렇다면 그가 테리브란에 들러 황자와 동맹을 맺고, 그 후에 헤이모라 쪽으로 움직였다고 보는 것이 맞겠지.'
의문이었던 것들이 하나둘씩 이해되기 시작했다. 대충 일이 어떻게 흘러온 것인지에 대한 짐작이 끝나자, 토어릭은 난감해졌다.
'황자는 나서지 못해. 당분간은 극비로 해놓았어야 할 것까지 털어놓을 정도라면 그의 도움을 구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하! 어찌한단 말인가.'
처음 토어릭이 기대했던 것은 황자가 중재를 서주는 것이었다. 제아무리 제국 전역을 자기 집 안방처럼 돌아다니는 군주라고 해도 거대한 세력을 둔 황자의 중재라면 받아들이리라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황자의 중재는 바라기가 힘들다. 보아하니 그는 고작 술사 하나를 위해 그의 중요한 동맹에게 싫은 소리를 할 생각은 없어보였으니까.
토어릭은 속이 답답해졌다. 그러나 이렇게 된 상황에서도 할 말은 해야 했다. 그의 주인은 물러날 생각이 없다. 그가 바라는 것은 헤이모라에 있는 수하들을 모두 돌려받는 것이고, 그 어떤 이유로도 뜻을 굽히지 않을 것이다. 부딪쳐야 하는 상대가 황자든, 군주든 말이다.
"전하께서는 크렘보르 장군을 아실 겁니다. 장군은 물러설 생각이 없습니다."
"…말했듯, 나는 나설 수 없다."
"그렇다면…?"
"그렇지만 그가 나서는 것까지 만류할 이유는 없지. 기다릴 수 없다면 직접 나서라고 해라."
"괜찮겠습니까?"
"키파에 티브리악의 후계자가 있다고 들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이해했습니다."
토어릭은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그가 대전을 빠져나갈 때까지, 황자는 침묵을 지켰다.
***
[…….]
줄카는 눈을 떴다.
아무도 듣지 못했으나, 그의 귀에는 들렸다. 그것은 천둥 소리 같기도 했고, 전고의 울림 같기도 했다.
놀람. 다음은 의아함.
그는 아주 잠깐, 아라얀 쪽의 일이 잘 풀리지 않은 것인가 생각했다. 자신에게 원한을 가진 그놈이 자유를 되찾자마자 빚을 갚겠다고 찾아온 것인가 하고, 아주 잠깐 생각했었다.
그러나 곧 그것이 아님을 알았다. 다가오는 상대에게서는 적의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천둥이 치는 것 같은 이유는, 단지 상대의 기질이 사납기 때문이었다.
궁금했으나 먼저 나서지는 않았다. 어차피 상대는 자신에게 볼일이 있어 온 것일 테니, 잠시만 기다리면 어련히 알아서 얼굴을 비추리라 생각한 것이다.
[넌 누구지?]
잠시 후, 줄카는 자신의 앞에 선 상대를 보며 물었다.
"군터. 군터 크렘보르."
인간의 목소리였으나, 부자연스러웠다. 그는 그렇게 느꼈다. 마치 어울리지 않는 가면을 쓴 것 같았다.
그는 이런 비슷한 자를 알고 있었다. 얼마 전에 보았던 자콥 트라소프, 강력한 피를 이었지만 스스로 그 힘을 거부하는 웃긴 녀석.
세상에 그런 놈은 또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가까이에 하나가 더 있었을 줄이야.
그나저나 군터 크렘보르? 익숙한 이름이다. 이곳을 관리한다던 무장이었던가. 서쪽 전선에 나가 있다고 들었는데.
"내 수하를 가둬두었다고 들었는데."
수하를 아끼는 마음? 아니. 그럴 리가. 단순히 자신의 것을 남이 빼앗아간 데 대해 화가 났을 뿐이다.
[넌 뭐지? 너 같은 놈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적이 없는데.]
물론 그는 상대를 본 순간,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바로 눈치챘다. 음흉한 애송이 놈이 애써 이놈의 존재를 감춰두었던 것이겠지. 왜 그랬는지는 생각할 필요도 없다.
줄카는 몸을 일으켰다.
[흥미롭군. 네 존재 자체도 흥미롭고, 왠지 모르게 네게서 익숙한 느낌이 나는 것도 흥미롭다.]
익숙한 느낌. 줄카는 안개에 싸인 것 같은 느낌과 기억을 더듬었다.
오래지 않아, 그는 너른 초원을 떠올렸다. 얼마 전, 곤경에 처한 꼬맹이를 도와주면서 부딪쳤었던 재미있는 놈들을 떠올렸다.
왜일까. 그때 그곳에서 느꼈던 기운이 눈앞의 이놈에게서 은은하게 풍겼다. 완전히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비슷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는 기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