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0화
그림자 검사들은 카니악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첩보, 암살 등의 임무를 주로 수행하는 그들이 용아의 부대장을 알아보지 못할 리 없었다.
'빌어먹을.'
어찌 된 영문인지는 대충 짐작이 갔다.
줄카가 그의 수하들과 함께 북쪽으로 움직였다는 정보를 들었다. 필시 자콥 트라소프와 접촉하기 위함이었을 테고, 테리브란에서 헤이모라까지는 그리 멀지 않다. 줄카와 쿠엘단이 친분이 있음은 알 만한 자들은 알고 있는 사실이고,
'왜 하필.'
줄카가, 용아가 헤이모라에 나타난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왜 하필 지금이란 말인가. 단 하루, 아니 한나절만 어긋났더라면……
"왜 그러지? 덤비지 않을 셈인가? 순순히 무릎 꿇겠다면 그것도 좋지."
"…오만하기 짝이 없군."
직접 대면하는 것은 처음이나, 용아에 대해서는 귀가 따갑도록 들어왔다. 줄카가 그의 피를 나누어 만들어낸, 어떤 면에서는 그의 분신이나 다름없는 자들. 그 위용은 일당백이라는 말로도 다 표현할 수 없다던가.
'소문은 과장되기 마련이지.'
설령 용아라는 놈들이 소문만큼 대단하다고 해도, 그림자 검사단 역시 만만치 않다. 제국을 움직이는 힘의 일원이라는 자부심이 있다.
"그 철퇴. 바몬의 궁전 기둥을 깎아 만들었다지?"
"궁전이 아니라 왕좌의 기둥이다."
중갑 거한의 손에 들린 커다란 철퇴. 저런 것을 제대로 휘두를 수 있을까 싶지만, 쓰지도 못하는 무기를 저렇게 한손으로 가볍게 들고 있을 리는 없지 않겠나.
"수십 년 넘게 이어온 명성도 오늘로 끝이다."
"꿈이 너무 크군."
잡담은 거기까지였다. 그들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동시에 움직였다. 차이가 있다면, 그림자 검사들은 모두 움직였으나 용아 중 움직인 이는 선두의 카니악뿐이었다는점.
콰앙!
측면으로 돌아가려던 그림자 검사가 크게 튕겨 나갔다.
육중한 철퇴는 바람처럼 빠르게 움직였다. 간신히 검을 들긴 했으나, 검은 철퇴와 부딪친 순간 산산이 터져버렸다.
쉬익!
마치 먹이를 노리고 달려드는 뱀처럼 빠르고 은밀한 검.
전형적인 암살자의 검이다. 물론 암살자의 검치고는 조금 강맹한 구석이 있기는 하나, 음습하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흥!"
카니악은 코웃음 치며 몸을 뒤로 뺐다. 전신 갑옷이라고 해도 모든 공격을 막아주지는 못한다. 특히 관절 같은 연약한 부위는 화살만 꽂혀도 꽤 깊게 상처가 날 수 있으니, 저런 독사의 이빨 같은 검에 찔렸다가는 조금 아픈 정도로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쥐새끼들이라도 이빨은 있다는 거지.'
카니악은 조금씩 뒤로 밀려났다. 하나하나의 힘은 대수롭지 않았으나, 상대는 협공에 능했다. 몸뚱이는 여럿이지만 머리는 하나인 것처럼 사방에서 틈을 주지 않고 몰아치니 카니악도 쉽게 그들을 찍어누를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해도 물론, 쉽지 않다는 것일 뿐이지 할 수 없다는 것은 아니었지만.
콰앙!
카니악은 상대의 눈에 희열이 감도는 것을 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용아를, 그 이름 높은 카니악을 잡을 수 있을 것 같다는 부질없는 희망?
'가소롭구만.'
이전에 따라붙은 쥐새끼들을 잡을 때는 너무 흥분해 있었던 탓에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번엔 머리가 시원한 상태라 이 쥐새끼들을 충분히 관찰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관찰은 끝났다. 이제 꿈을 꾸고 있는 같잖은 놈들에게 현실을 알려줄 시간이다.
챙!
철퇴와 검이 부딪치고, 검이 튕겨 나갔다. 그러기 무섭게 양쪽에서 동시에 또 다른 검이 찔러온다. 반격하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조금 전까지는 이쯤에서 한 발자국 물러섰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카니악은 물러서기는커녕, 철퇴를 쥔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피가 끓는다.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실제로 그의 몸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그의 몸을 채운 피는 신비 그 자체이니, 감정에 맞추어 그 울림을 달리한다. 예컨대 지금처럼 전의가 충만하다면, 그만큼 힘을 내준다는 뜻이다.
"크읍!"
좌측, 검을 쥔 손목을 낚아챘다. 힘 한번 주는 것만으로 우득! 소리가 들리고, 쭉 뻗은 검이 힘을 잃었다. 카니악은 흐트러진 적의 품으로 파고들며 어깨로 가슴을 찍었다.
묵직한 쇳덩이가 눈으로 따라가기 힘들 정도로 빠르게 와부딪치니, 적은 피를 토하며 나가떨어졌다.
"이…!"
너무나 갑작스러운 변화. 그제야 알아차린 걸까? 부릅뜬눈에 당혹과 분노가 스치는 것을 보며 카니악은 조소했다.
"애송이들. 내 목을 가져가려면 백 년은 이르다."
한층 진해진 붉은 눈이 살기를 토하고, 육중한 철퇴가 경쾌하게 춤을 췄다.
얼떨떨하다.
지금 모페이브와 나짐의 심정을 표현하는 데 그보다 적절한 말은 없었다. 정체 모를 적에게 쫓기고, 끝내 목숨이 위태로워질 위기에서 정체 모를 이들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졌다.
'용아? 카니악?'
모페이브는 지금은 고깃덩어리가 되어버린 적들이 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용아니 카니악이니, 당연히 들어본 적은 있었다. 하지만 그 이름이 여기서 왜 나온단 말인가?
"카니악 장군이십니까?"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며 물었다. 그러자 카니악은 철퇴에 묻은 피와 살점을 털어내며 대꾸했다.
"장군은 아니야. 나에 대해 들은 적이 없나?"
"풍문으로 들은 것뿐입니다. 아무튼…실례했습니다.
은혜를 입었군요."
카니악의 붉은 눈이 모페이브를 향했다. 그 눈길만으로도 속이 불편해지는 느낌이었으나, 모페이브는 불편함을 티내지 않고 담담히 그 시선을 마주했다. 그는 이런 압박감이 익숙했다. 어찌 안 그렇겠는가? 그가 군터와 함께한 세월이 얼마인데.
"괜찮군. 촌구석의 술사답지 않아."
"감사합니다. 헌데…용아의 부대장께서 어찌 이런 곳에 오셨는지."
"그게 아니겠지."
"예?"
"내가 왜 여기에 있는지보다는 저놈들이 누구인지가 더 궁금하겠지. 아닌가?"
"그 전에 묻지. 네가 모페이브인가?"
"그렇습니다."
"따라와라."
나짐이 조용히 눈을 굴렸다. 그들을 추적자로부터 구해준 것으로 보아 적인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불안한 마음은 가시지 않았다.
'용아라니.'
아무리 북쪽 벽지에서 평생 살아온 그라도 용아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있었다. 군주 줄카와 함께 오랜 세월 싸워온 불멸의 군대가 아닌가. 그런데 그런 용아의 부대장이 이곳에 왔다는 것은……
[흥미롭군.]
잠시 후, 설마 했던 짐작이 사실이었음을 확인했을 때.
나짐은 다리에 살짝 힘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그 녀석. 이런 것을 숨겨두고 있었나.]
안 그래도 텁텁하던 지하의 공기가 쇳덩이라도 매달아 놓은 것처럼 무거웠다. 그가 지하 미궁에 한 발자국 내디뎠을 뿐이건만, 이 공간 전체가 숨을 죽인 것처럼 서늘해졌다.
"…전하."
카니악의 앞에서는 비교적 담담했던 모페이브조차도 그의 앞에서는 감히 몸을 펼 수 없었다. 목소리를 떨지 않는 것만 해도 쉽지 않았다.
"대담하군."
옆에서 지켜보던 카니악이 나직이 감탄했다. 그는 이 촌구석의 술사 나부랭이가 그의 주인 앞에서 떨지 않는 것을 보며 놀라움을 숨기지 않았다.
[이곳에 대해 조사하고 있었나?]
"그렇습니다."
카니악과 달리, 줄카는 모페이브보다는 지하 미궁에 관심을 드러냈다. 그는 자신의 친우(혹은 동료)가 숨겨놓았던 비밀스러운 공간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횃불의 불빛 없이는 몇 발자국 앞도 보기 어려웠지만, 그런 어려움은 그에게는 해당 사항이 아니었다. 그 어떤 어둠도 그의 눈을 가리지는 못했으니.
[음흉한 놈 같으니.]
모페이브는 순간 몸을 떨었으나, 곧 자신을 말하는 것을 아님을 깨닫고 고개를 숙였다.
"전하."
카니악의 목소리가 아니었다면 줄카는 한동안 상념에 잠겨 있었을 것이다. 그는 모페이브나 나짐, 심지어 그림자 검사단에도 관심이 없었다. 지금 당장은 말이다.
그만큼 그는 어쩌면 괴짜 동료의 마지막 유산이라고 할 수도 있는 흔적에 깊이 빠져있었다.
[무엇을 알아냈지?]
"이 유적이 쿠엘단 전하께서 만드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시기는 짐작하기 어려우나, 옛적 이 땅에 살던 고대인들의 피난처로 짐작하고 있습니다.
줄카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는 동안에도 그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처음 이 지하 미궁에 발을 들인 뒤로, 그는 단 한 번도 발을 멈추지 않고 있었다. 그는 계속해서 움직였고, 카니악을 비롯한 용아는 물론이고 모페이브와 나짐 역시 조용히 그의 뒤를 따라야 했다.
[이건……]
그의 발걸음이 처음으로 멎은 것은 한 벽화를 앞에 두고서였다. 모페이브는 줄카가 벽화에 관심을 두는 것을 보며 눈을 빛냈다. 그가 보고 있는 것은 고대인들의 신화를 표현한 벽화였다. 나짐이 관심을 가졌었던.
아니나 다를까, 줄카가 그 앞에서 멈추자 나짐 역시 입술을 달싹이고 있었다. 오랜 세월을 살아온 군주라면 저 신비로운 벽화에서 뭔가 다른 것을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으리라.
[괜찮군.]
그러나 그런 기대가 무색하게도, 줄카의 감상평은 그 한 마디가 전부였다. 머릿속을 울리는 소리에서는 약간의 흥미, 즐거움 외에 다른 감정은 느껴지지 않았다.
[너는 누구의 수하지?]
"군터 크렘보르 장군을 따르고 있습니다."
[크렘보르?]
들어본 적 없다는 듯, 줄카가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생각이지?'
이 유적의 중요성은 차치하더라도, 헤이모라의 중요성은 크다. 비록 쿠엘단은 떠났지만, 그럼에도 상징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도시의 관리를 맡은 자가 이름도 들어본 적없는 귀족 나부랭이라니?
그를 의아하게 생각한 줄카가 몸을 돌렸다. 그의 시선을 똑바로 받은 모페이브가 더욱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비굴하거나, 움츠러든 모습은보이지 않았다.
억지로 참고 있는 것일 수도 있지만, 어쨌거나 겉으로는 꽤 괜찮아 보였다.
자식을 보면 부모를 알 수 있고, 수하를 보면 그 주인을 알수 있는 법, 줄카는 이 술사 녀석의 주인이 비록 명성은 높지 않을지라도 꽤 괜찮은 자일 것이라 짐작했다.
[그래. 네 주인은 어디에 있지?]
"키파에 계십니다."
[키파?]
그곳이 어디인지 떠올리기 위해, 줄카는 잠시 기억을 더듬어야 했다. 언젠가 한 번 정도, 그런 지명을 들어본적이 있었다. 분명…리바스트라와 아록을 잇는 관문 도시였던가?
[전장에 나가 있군. 군인인가?]
"황자 전하께 적포를 하사받으셨습니다."
"파하! 적포라? 벌써부터 한껏 기분을 내고 있구만."
카니악이 웃음을 터뜨렸다. 황제도 아닌 주제에 위장을 임명하는 꼴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 그의 입가에 걸린 미소는 비릿했다.
[소식은 주고받고 있겠지.]
"예."
[네 주인에게 전해라. 내가 한동안 이곳에 머물 테니, 그런 줄 알라고.]
모페이브는 조용히 고개를 조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