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8화
"음?"
"왜 그래?"
"아니. 방금 뭔가…"
캄캄한 지하. 횃불 하나에 의지하여 자리를 지키고 있던 사내가 고개를 돌렸다. 옆에 있던 동료가 무슨 일이냐고 물었지만, 그는 답하지 못했다. 순간적으로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고 말한들 겁쟁이 취급이나 안 받으면 다행일 테니.
'기분 탓이었나.'
착각이라고, 어두컴컴한 곳에 너무 오래 있어서 신경이 예민해진 모양이라고 생각하고 넘겼다.
하지만 곧 또 한 번 섬뜩한 느낌이, 희미한 소리와 함께 느껴졌을 때. 그는 눈을 부릅떴다.
'또?'
착각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그는 입을 여는 대신 젖은 가죽으로 횃불을 가렸다. 옆의 동료가 무슨 짓이냐는 듯 눈을 치떴지만, 몸을 낮추고 이를 드러낸 그를 보고는입을 다물었다.
"…적이냐?"
"적이 아니라면 이렇게 은밀히 움직일 이유가 없지."
"입구에서 경계를 서던 놈들은?"
"당했다고 봐야 하지 않겠나."
잔뜩 긴장한 채 속삭이듯 말을 주고받는 동안에도 그의 동료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듯 마른침만 삼켰다. 한심할 정도의 둔감함에 한숨이 나올 것 같았지만, 그래도 의심하지 않는 것만 해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모페이브님께 가라. 그분을 모시고 피해."
"뭐?"
"어차피 입구가 이렇게 조용히 뚫렸다면 우리가
상대하기는 힘든 놈들이야. 상대할 수 있다고 해도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지. 우리의 임무를 잊지 마라."
"그래서 어떻게 하자고?"
"난 조금이라도 놈들을 막아보겠다. 최선을 다해보겠지만, 오래 버티지는 못할 거야."
히룬가가 입을 달싹였다.
"카란 너…"
"한 명은 남아야 해. 너보다는 내가 낫겠지. 대장이 그렇게 강조했던 거잖아? 이성적인 판단이라는 것 말이다.
……"
"너도 알고 있지? 요즘 들어 발작이 심해졌어. 머지않아 피에 먹혀버릴지도 몰라."
카흐란과 히룬가는 니클라스 휘하의 수인병들이었다.
그들은 구 베이고르의 실험체들로서, 초원민족의 비밀스러운 힘을 주입받았다. 그 실험의 결과로 그들은 짐승과 같은 힘을 얻게 됐지만, 동시에 가늠하기 힘든 위험까지 얻고 말았다.
그 위험은 제각각이었다. 일정 주기로 악몽을 꾸는 정도의 가벼운 증상도 있는가 하면, 시도 때도 없이 몸을덜덜 떤다든가, 익힌 음식을 먹지 못하게 되기도 하는 등, 저마다.
다 달랐다.
그중에서도 카흐란은 그 증상이 심각한 편이었다. 시도 때도 없이 눈을 뒤집고 사납게 날뛰었는데, 그럴 때면 주변의 동료들이 힘을 합쳐 그를 제압하곤 했다. 그나마 전조 증상이 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독방 같은 곳에 수감되거나 진작 목이 달아났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카흐란의 발작 증상이 더 잦아지고, 심해졌다. 그와 거의 항상 짝을 이루어 움직이는 히룬가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카흐란이 필사적으로 억누르고는 있었지만, 그러면서도 그는 불안감을 숨기지 못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알고 있겠지? 도시를 빠져나가. 곧장 솔롬으로 향하는 거야. 놈들이 노리는 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어떤 일이 있어도 모페이브님을 지켜야 한다."
"말하지 않아도 안다."
히룬가는 마지막까지 이 모든 것이 카흐란의 착각이 아닐까, 희망적인 바람을 가졌다. 그러나 카흐란의 눈이 노랗게 변하고, 그의 이빨이 비수처럼 날카로워지자 더는 지체할 수 없었다.
"지금. 달려!"
히룬가가 땅을 박찼다. 그와 동시에 카흐란이 몸을 돌리며 칼을 휘둘렀다.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서 챙! 하는 소리가 들리고, 가벼운 무언가가 부드럽게 밀리는 느낌이 들었다.
"어떻게 알아차렸지?"
"눈을 봐라. 이종(異種)이다. 특수한 강체술일지도 모르고."
카흐란은 당장이라도 달려들고 싶은 욕구를 억제하면서 상대를 살폈다. 방금 그와 충돌한 자까지 포함해서 당장 눈에 보이는 건 넷이었다. 하지만 더 있을지도 모른다. 방금 확인했다시피, 적에게는 모습을 감출 수 있는 능력이 있으니.
"웬 놈들이냐."
시간을 끌어야 한다.
머릿속에는 오직 그 생각뿐이었다. 한번 부딪친 것뿐이나, 카흐란은 상대가 만만치 않음을 느낄 수 있었다. 조금 전, 상대는 그가 전력으로 휘두른 검을 가볍게 받아냈다. 1대1로 맞붙는다고 해도 확신이 서지 않는데, 하물며 적은 최소 넷.
"짐승의 눈이군."
넷 중 하나. 함께 서 있으면서도 눈에 띄는 자. 카흐란은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너희 둘은 도망친 놈을 쫓아라."
우두머리로 추정되는 자의 명령을 받고 움직이는 둘.
카흐란은 미끄러지듯 움직이는 그들을 재빨리 쫓았다. 아니, 쫓으려고 했다.
채앵!
"큭!"
언제 다가왔는지도 모를 검 한 자루가 그의 눈앞에서 멈췄다. 보고 반응한 것이 아니었다. 마지막에다리를 멈추고 검을 곧추세운 것은 본능적인 움직임이었다.
"감이 좋군."
바로 전까지 멀찍이서 지켜보고 있던 자가 어떻게 이리 빨리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일까. 카흐란은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적을 앞에 두면 언제나 들끓었던 투쟁욕이 이 순간만큼은 얼음처럼 차갑게 식었다.
"그래서… 상이라도 줄 텐가?"
"물을 것을 다 묻고 나면 편히 죽여주지. 물론, 네놈이 순순히 협조해야 한다는 전제가 붙겠지만."
"흐흐. 그거 꽤 훌륭한…개소리구만!"
칼을 쥔 팔에 잔뜩 힘을 주고 밀었다. 예상했던 대로, 상대는 가볍게 밀려났다. 힘에서 밀리는 게 아니라, 끌어당기는 듯 부드럽게 뒤로 물러난 것이다.
짐작했던 대로였다. 한번 부딪쳤을 뿐이지만, 카흐란은 이들이 어떤 방식으로 싸우는지 알 것 같았다.
'암살자 놈들과 비슷해.'
어쩌면 비슷한 게 아니라 정말 암살자일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카흐란은 물러나는 상대에게 칼을 집어 던졌다.
항상 갈고 닦았던 투척술은 이번에도 빛을 발했다. 묵직한 장검이 비수처럼 날아갔다.
"큭!"
이번만큼은 여유를 부릴 수 없었는지, 적이 허공에서 몸을 틀었다. 최대한 빗겨내려는 것이었겠으나, 그것도 카흐란의 예상 범위 내였다.
크아아아!
두 걸음. 단 두 걸음 만에 짐승으로 변한 카흐란이 허공에서 막 떨어지고 있는 적을 향해 달려들었다.
* * *
"모페이브님! 피하셔야 합니다!"
눈살을 찌푸린 것은 모페이브가 아니라 나짐이었다.
다급하게 달려온 호위병이 기껏 열심히 그려놓은 술진을 짓밟았기 때문이다.
"무슨 일인가?"
"침입자입니다. 입구를 지키던 병사들은 소식을 전할 틈도 없이 당했습니다. 지금 제 동료가 적을 막기 위해 남았으나, 그리 오래 버티지는 못할 겁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지금 당장 피하셔야 합니다!"
"…가지."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적의 정체가 무엇인지, 궁금한 것은 산더미였지만 모페이브는 지금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잊지 않았다.
"나짐. 기록들을 챙기게. 술진은 다 지우고, 기구들은 모두 부수게."
"예."
그들이 사용하는 연구 도구들은 대부분이 고가의
물건이었으나, 모페이브는 그것들을 모두 부수었다. 적의 정체가 무엇이든, 적들에게 득이 될 수 있는 것들은 하나도 남기지 않기 위함이었다.
'그들이 노리는 것이 이 미궁이라면…작은 것 하나라도 내줄 수 없다.'
모페이브는 연구 기록을 포함해서 들고 갈 수 있는 가벼운 것들만 챙기고, 무게가 나가는 것들은 모두 부수고 찢었다.
불을 놓는 게 가장 빠르겠지만, 그랬다가는 이쪽의 위치를 알려주는 꼴이 될 테니 불을 사용할 수는 없었다.
"빨리. 서두르셔야 합니다."
모페이브와 나짐이 뒤처리를 하는 데 걸린 시간은 아주 잠깐이었다. 하지만 히룬가는 그 잠깐도 불안했던지 그들이 하는 일을 도우면서도 연신 서두를 것을 종용했다.
"모시겠습니다. 이쪽으로."
앞장서는 히룬가의 눈이 노랗게 변했다. 그는 후각과 청각을 최대한 끌어올린 채, 소리 없이 걸음을 옮겼다.
* * *
"…빌어먹을 놈."
그의 앞에는 커다란 짐승 한 마리가 쓰러진 채 꿈틀거리고 있었다.
늑대 같기도 하고, 곰 같기도 하며, 인간 같기도 한 짐승은 금방이라도 숨이 끊어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 크고 작은 칼자국이 스무 개 가까이 나 있었고, 그 상처들에서 예외없이 피가 줄줄 흘러나왔다.
"지독한 놈 같으니."
그 또한 수하의 말에 동의했지만, 상대의 독기를
인정한다고 해도 자존심이 상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 무슨 추태란 말인가. 고작해야 경계나 서던 잡스러운 놈에게 이렇게 애를 먹다니. 그림자 검사단의 일원으로서 부끄럽기 그지없는 일이다.
"보통 놈이 아니었다. 이 안에 있다는 그 술사 놈이 중요인물이라는 뜻이겠지."
하지만 자존심은 자존심이고, 임무는 임무.
"그 술사 놈은 이 유적에 대해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놈이 이곳에 있는 것도 신주의 봉인을 연구하기 위함일지도 모르지."
필시 그럴 것이다. 쿠엘단이 사라지고 난 뒤에도
헤이모라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돌지 않았다. 자콥트라소프가 손을 써서 이야기가 밖으로 새어나가는 것을 막았기 때문이며, 헤이모라 부근의 출입을 철저히 통제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도시의 지하에, 이렇듯 비밀스러운 공간에서 술사가 연구를 하고 있다? 얼마나 중요한 연구이기에 이렇게 비밀스럽단 말인가.
떠오르는 것은 한 가지뿐이다.
"쫓아라!"
그림자 검사단은 음지에서 활동하는 단체였다. 드러나지 않는, 드러나서는 안 되는 일을 처리하는 그들은 검사단이라는 명칭을 쓰고는 있으나 실상 암살자에 가까웠다. 그러나 그들이 보통의 암살자와 다른 것은, 그들이 암살을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삼는다는 점. 그리고 그들의 능력이 하찮은 암살자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나다는 점이었다.
그들은 히룬가의 흔적을 손쉽게 찾아내고 따라갔다. 전력 질주를 하는데도 소리 하나 나지 않았다.
오래지 않아, 그들은 모페이브와 나짐이 한동안 머물며 연구하던 공터에 도착했다.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그렇겠지. 급하게 움직이느라 흔적을 제대로 지우지도 않았어."
정확히는 지우지 않은 것이 아니라 지우지 못한
것이겠지만, 어쨌거나 덕분에 일이 한결 편해졌다.
* * *
"헉! 헉!"
모페이브와 나짐은 체력이 좋은 편이었다. 그들 모두 얌전히 연구실에만 박혀서 연구에만 매진하는 책상물림이 아니기 때문이다. 전투 술사들과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그들은 나름대로 험하게 살아온 기간이 있었다. 모페이브의 경우는 사교에 몸담았던 때가 있고, 그 후에 군터를 따르면서도 몸 관리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나짐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는 제국의 양지에 나설 수 없는 사령술사로서, 온전한 자신의 힘으로 살아온 자였다. 그는 어지간한 날치기 용병보다 몸을 쓰는 데 능했다.
"허억…허억……"
하지만 그런 그들도 이제는 한계였다. 그들이 아무리 술사치고는 체력에 자신이 있다 한들, 앞서 달리는 히룬가와 비교할 수는 없었다. 처음에는 그럭저럭 따라갈 수 있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한계를 드러냈다.
히룬가가 곧 멈춰설 것 같은 모페이브를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업히십시오."
히룬가가 몸을 낮추며 등을 보였다. 그에 모페이브가 멈칫했다. 업히는 게 껄끄러워서가 아니라, 나짐에게 생각이 미쳐서였다. 자신이야 업혀서 간다고 쳐도 나짐은 어쩐단 말인가.
'설마…버리고 가겠다는 말인가.'
그가 생각한 것을 똑같이 떠올렸는지, 나짐의 표정이 굳었다. 모페이브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것 없네. 쉬지 않고 충분히 이동했어. 출구도 코앞이니, 잠시 숨을 돌리고 이동한다면 충분할 게야."
"그렇지 않습니다. 놈들은……"
히룬가가 다시 재촉하려던 찰나, 그들이 지나온
어두컴컴한 길에서 흐릿한 형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발이 느리군. 여유인가 안일함인가. 어느 쪽이든, 우리로서는 고맙다만."
"…빌어먹을."
딱딱하게 굳은 히룬가의 얼굴에 암담함이 감돌았다.
'카흐란이 당한 건가.'
그는 모페이브와 나짐을 자신의 뒤로 보냈다.
"제가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보겠습니다. 도망치십시오."
적어도 카흐란보다는 오래 버티겠노라 다짐하며, 히룬가가 이를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