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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757화 (757/1,064)

757화

신이라는 것들.

줄카는 그것들을 신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괴물, 아니 괴물이라기에는 초월적인 존재.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신이라는 거창한 이름으로 불릴 정도는 아닌.

그는 그것들이 정령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이 세계와 밀접하게 연결된, 인간 하나보다는 세계에 더 크게 연결된 존재.

인간 하나가 당장 죽는다고 해도 세계는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는다. 노예건, 평민이건, 귀족이건 말이다. 영향을 받는 것은 인간의 사회일 뿐, 세계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소위 신이라 불리는 것들은 다르다. 그것들은 각각이 세계를 이루는 축. 놈들이 사라지면 세계는 크게 꿈틀거린다.

줄카는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 자신이 바로 그 축의 하나였기에.

"괜찮겠습니까? 놈이 전하의 뜻대로 움직여줄까요?"

카니악의 물음에, 줄카는 즉답하지 않았다. 그는 과거 치열하게 싸웠던 적을 떠올렸다.

사납기 그지없었던 구적(舊敵)의 모습을 떠올린 그는, 곧 고개를 저었다.

놈이 뜻대로 움직여줄 것 같냐고? 그럴 리가. 놈을 쓰러뜨리고 봉인한 것이 자신이니, 놈은 분명 자신에게 원한을 품고 있을 터. 이쪽에서 이렇게 저렇게 움직이라 말한들 그대로 따를 리가 없다.

허나 그래도 상관없다. 애초에 그런 것을 바라지는 않았으니.

[풀어놨을 뿐이다. 어디로, 어떻게 향할지는 알 수 없지.

신경 쓸 필요도 없고.]

하지만 한 가지는 알 수 있다. 맹수는 고기를 탐하는 법이고, 고기를 얻기 위해서는 주변의 먹이를 사냥하리라는것.

그거면 충분하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든 이 판을 흐리는 것이니.

"그렇다면, 많이 풀어놓을수록 좋은 것 아닙니까?"

[무작정 많이 풀어놓는다고 해서 능사가 아니다.]

무작정 제국에 혼란을 일으키는 것은 리비암에 있는 늙은이가 좋아할 일. 그러니 이쪽은 그 반대로 움직여야 하지 않겠는가.

[내 손이 닿은 녀석이 몇 안 되는 것이 애석하군.]

심지어 그 몇 안 되는 녀석들조차 남부에 몰려 있고, 북서부에는 '그놈' 하나뿐이었다. 정복 전쟁 당시 북서부에서 활약한 것은 그가 아닌 룬차이였다.

[아쉽군.]

"룬차이 전하를 생각하고 계십니까."

[그래.]

"그자가 손을 썼다고 생각하시는군요."

[놈이 아니면 누구겠느냐.]

줄카는 자신과 동년배인 주제에 껍데기는 한참을

앞서갔던, 과거의 전우를 떠올리며 혀를 찼다.

"…믿기지 않아."

나짐은 탄식했다. 이곳에 올 때마다 바보처럼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다는 것을 그 자신도 알았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이 장엄한 지하세계에 발을 디디고, 이전에 가보지 못한 곳을 탐험하다 보면 절로 입을 벌리게 된다.

"틀림없어요. 이 지하 미궁은 지상의 도시보다 거대한 게 분명합니다."

그의 주장에 모페이브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 같군. 벌써 다섯 번째로 오는 것인데도 여전히 지도를 완성하지 못했어."

모페이브가 큼지막한 가죽 지도를 보며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처음에는 그도 나짐처럼 그저 감탄하며 미지의 세계에 대한 흥분으로 가득했었다. 하지만 이곳에 온것이 벌써 다섯 번째인데도 여전히 지하 미궁의 구조를 다 밝혀내지 못하자 조금은 암담함을 느꼈다.

"확실합니다. 이곳은 쿠엘단의 손에 만들어진 곳이 아니에요. 아무리 그가 전지하다고한들 이런 곳을 혼자서 만들어낼 수는 없습니다."

물론 쿠엘단이 오랜 세월, 많은 노동력을 동원했다면 이 거대한 지하세계를 만드는 것도 영 불가능하지는 않다.

하지만 나짐은 그 어떤 문헌에서도 쿠엘단이 헤이모라의지하에 대규모 미궁을 지었다는 이야기를 접한 적이 없었다.

'이만한 곳을 비밀리에 만들어낸다는 것은 불가능해.'

물론 군주라는 이들이 초월적인 존재이며, 상상하기 힘든 권능을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은 안다. 그들의 능력이정말 신에 필적하는 수준이라서, 손짓 한 번에 거대한 구조물을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도 마찬가지지.'

나짐이 그리 확신하는 이유는, 단순히 이 지하 미궁이 어마어마하게 거대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곳의 역사를 어렴풋이 짐작하기 때문이었다.

'그래. 틀림없다. 이곳은 군주들보다, 어쩌면 카라누르보다 더 오래된 곳이야.'

나짐은 횃불을 벽에 가까지 가져다 댔다. 이곳에도 역시 벽화가 벽 전체에 새겨져 있었다. 난해한 그림이었으나 비슷한 것을 여러 번 본 경험이 있기에 해석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신화. 그것도…그래. 창세신화로군.'

주제에 비해 표현은 그리 거창하지 않았다. 담백하다는 느낌마저 들 정도였으나, 덕분에 알아보기가 쉬웠다.

이전에도 비슷한 주제의 벽화를 보기도 했고,

'분명…14구역에서였던가.'

지하 미궁의 규모가 규모다 보니 체계적으로 분류를 할 필요가 있었다. 일정 범위를 한 구역으로 지정하고 지도에 기록했는데, 현재까지 나눈 것만 35구역이었다. 그런데도 아직 이 빛 들지 않는 미궁의 끝을 보지 못했으니……

'세부 내용은 조금 다르지만, 큰 줄기는 비슷하군.'

큰 하나에서 뻗어 나온 작은 것들. 13구역에서 보았던 그림은 나무와 가지로 형상화했었는데, 이것은 물줄기를 그린 듯했다. 큰 강에서 지류가 생겨나는 듯한…….

"이전에 보았던 것과는 다르군."

모페이브가 다가와 말했다. 그 역시 벽화의 내용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리고 같은 주제의 벽화를 본 적이 있다는 것도 단번에 떠올렸다.

"같은 공간에 다른 표현. 저희가 세운 가설에 한층 더 힘이 실리는군요."

"장군께서 언질을 주셨지 않나."

"그렇긴 합니다만, 직접 확인하는 것은 또 다르지요."

처음 지하 미궁에 발을 디뎠던 당시, 군터가 비밀의 수호자를 쓰러뜨리고 영혼 감옥을 습득했다. 그리고 그 안에 갇혀 있던 영혼들에게 이 지하 미궁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다만 오랜 세월 갇혀 있었던 탓인지, 아니면 전투 중에 손상을 입은 탓인지 영혼들의 상태가 좋지 않아 그들로부터 얻을 수 있었던 정보는 상당히 제한적이었다.

"고대인들을 이 지하로 밀어 넣었던 재앙이라는 것이 대체 뭘까요?"

"글쎄. 안타깝게도 그것에 대해서는 정보가 없지 않나."

두려움 때문이었을까. 불길한 것은 언급해서는 안 된다는 미신은 아직도 여러 국가와 문화에 널리 퍼져있다. 대부분의 인간이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어둠을 두려워하듯, 그런 미신도 본능적인 영역에 걸쳐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안타깝군요. 그 재앙의 정체야말로 이 고대 유적의 정체를 꿰뚫는 비밀일 텐데 말입니다."

"비밀은 감춰져 있기에 비밀이지. 그것을 알아가는 것도 우리의 숙제이자, 즐거움일 걸세."

"하하. 옳은 말씀입니다."

나짐은 그답지 않게 크게 웃었다. 방금 모페이브의 말은 그의 취향을 아주 제대로 찌른 한 마디였다.

'평범한 듯하지만, 속에는 이렇듯 비범함이 있단 말이지.'

하긴, 고렘이라는 기물을 만들어낸 것부터 평범과는 거리가 멀다. 겉으로 보이는 무던함은 내면의 재기를 감추는 가면일지도 모른다.

'사교도였다고 했지.'

이런저런 일들을 함께하면서, 둘의 사이는 제법

가까워졌다. 오래된 시시콜콜한 비밀들을 털어놓을 정도로 말이다.

모페이브는 그가 과거에 어떻게 군터 크렘보르와

만났는지에 대해 알려주었다. 그 과정에서 그가 과거 사교도였다는 것도 짤막하게나마 이야기해주었다.

그 사교가 그리 규모가 큰 곳도 아니었으며, 오래전에 사라져버린 곳이라고 해도 쉽게 이야기할 주제는 아니었다.

제국이, 정확히는 제국의 국교인 여명 교단이 사교에 대해서라면 눈에 불을 켠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말이다.

'그렇기 때문일까.'

모페이브는 여명 교단에서 말하는 창세신화와 전혀 다른, 고대인들의 벽화를 보면서도 별다른 거부감이나 의문을 드러내지 않았다.

'다행이지.'

독실한 원신의 신자였다면 이 벽화를 보자마자 눈을 부릅떴으리라. 그리고 망치나 철퇴를 들고서 이 오래된 벽을 후려쳤겠지. 신성모독이니 뭐니 소리쳐대면서 말이다.

"큰 하나에 속하는 작은 여럿. 혹은 큰 하나에서 갈라져 나온 작은 여럿. 세세한 표현은 달라도 말하는 내용은 같군요."

"그래. 이곳에 내몰렸던 이들은 같은 뿌리를 공유했음이 틀림없네. 뭐, 그러니까 같은 피난처에 숨어들었겠지."

모페이브와 나짐이 서로의 견해를 주고받던 시각. 일단의 이방인들이 헤이모라에 발을 디뎠다.

"그 음산했던 도시가 이렇게 황폐하게 변했군."

그들의 수는 열이 조금 넘었다. 후드가 달린 로브로 몸을 가린 그들이 적막한 도시에 들어섰을 때, 도시를 지키던 병사들은 그들의 존재를 감지하지 못했다.

"불필요한 충돌은 피한다. 우리의 임무는 어디까지나 유적의 탐색임을 잊지 마라."

그들 중 가장 앞에 서 있던 자가 조용히 당부했다.

"신주는 이곳 어딘가에 있다."

그들의 주인은 그렇게 말했다. 정확히는 '가능성이 크다'였지만, 그들은 의심하지 않았다. 그들의 주인에대한 충성심과 믿음은 신앙과 같았다.

'만약 신주가 이 도시에 있다면…쿠엘단이 이 외딴곳에 자리를 잡은 이유도 설명이 가능하지.'

그들은 그림자가 되어 도시에 소리 없이 녹아들었다.

그들은 한나절 만에 헤이모라의 대략적인 수색을 끝냈고, 한가지 사실을 알아냈다.

"도시의 지하에 거대한 미궁이 있다."

그 사실을 알았을 때, 그림자들을 이끄는 우두머리는 이곳에 신주가 있음을 거의 확신했다.

"돌아갈까요?"

"아니."

거의 확신했으나, 확인한 것은 아니다.

"들어간다."

직접 확인해야 한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다. 지하로 통하는 입구마다 적지 않은 병력이 배치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그들이 은신에 능하다고 해도 그 삼엄한 감시를 완전히 피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는 수 없지."

그들은 그늘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웬 놈들이냐!"

칼을 뽑아 든 그들은 지하로 통하는 입구로 향했다. 입구를 지키던 병사들이 그들을 발견했으나, 그들이 할 수 있었던 것은 한 마디 외침이 전부였다.

그들이 근처의 동료들에게 신호를 보내기도 전에, 무기를 제대로 들기도 전에 소리 없는 칼날이 그들의 급소를 파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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