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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756화 (756/1,064)

756화

그 소식은 군터에게도 들어왔다. 타라냐드의 군대가 움직이기도 전에, 자이드라 멕시스 본인에게서 말이다.

"타라냐드의 군대가 마침내 움직였습니다. 이로써 리바스트라의 전황도 한결 나아지겠지요."

"3만밖에 안 된다 하지 않나. 크게 변하는 것이 있을까?"

언제부터 3만이 '밖에'라는 말에 어울리는 수가 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드리안은 진정 그리 생각하는지 고개를 갸웃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은 얼마 전까지 3만은 우습게 보일정도의 대군에 맞서 싸웠다. 고작 도시 하나를 지키기 위해서 말이다. 물론 그 도시가 일반적인 도시가 아니라, 두 주를 잇는 길목과 같은 요충지이긴 했으나 아드리안에게 있어 그런 것은 크게 와닿지 않는 부분이었다. 요충지건 무엇이건 간에, 어쨌든 도시 하나를 두고 근 10만에 가까운 병력이 부딪친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말이다.

"어중이떠중이가 아니라 정예다. 장군께서 하신 말씀 못들었나? 멕시스의 직계가 이끈다지 않나."

"후계자도 아니라고 하지 않나."

더 말을 한다고 해도 대화가 제대로 될 것 같지 않다고 생각한 토어릭이 고개를 저었다.

아드리안을 비롯한 몇몇 이들이 뿔이 나 있는 이유를 그도 잘 알았다. 할렌을 비롯한 무수한 전우의 죽음은 그들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상처를 돌보지 않는 조정에 분개했다.

'장군께서 나서주시면 좋으련만.'

무슨 생각인지는 몰라도, 군터는 공공연하게 조정에대한 불만을 토로하는 수하들을 제지하지 않았다. 물론 철저한 보안이 유지되는 군 회의에서만 간간이 나오는 이야기라 밖에 새어나갈 일은 없겠지만, 토어릭은 혹시 모르는 불상사가 생길까 걱정스러웠다.

그렇기에 한번은 이 일에 대해 군터에게 넌지시 이야기를 꺼낸 적도 있었으나, 군터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토어릭은 그런 군터의 모습을 보고 그의 상관 역시 조정에 대한 불만을 품고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것은 오해였으나, 설령 군터가 토어릭의 속내를 알았다고 해도 정정해주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조정이니 포상이니 하는 그런 시시콜콜한 것들은 그의 관심 밖이었으니까 말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부하들이 목소리를 높였다가 줄였다가 하는 꼴을 물끄러미 지켜보면서도, 군터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솔롬으로 돌아가고 싶군.'

적이 물러가기는 했지만, 여전히 키파의 분위기는 어수선했다. 게다가 아무래도 눈들도 많고, 이런저런 준비도 되어있지 않은 탓에 본격적으로 연구를 할 수가 없었다.

이곳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여전히 잠들어 있는 할렌의 영혼을 지루하게 관찰하는 것뿐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솔롬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모페이브의 조언을 구하고, 은밀한 장소에서 마음 편히 연구한다면 아무래도 지금보다는 낫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는 지금 이 도시를 사수하라는 명을 받고 전장에 나와 있었다. 돌아가고 싶다고 돌아갈 수가 없는 처지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볼멘 목소리를 내는 동료들을 애써 설득해보려는 토어릭의 절절한 노력을 보며, 군터는 조용히 턱을 괴었다.

"이 부근입니까?"

아라얀은 수하의 물음에 걸음을 멈췄다. 그는 품에서 맨들맨들한 가죽 뭉치를 꺼냈다. 몇 개의 선과 점이 찍혀 있는 그것은 일종의 기록이며 지도였다. 그의 주인이 직접 만든 것으로, 친절하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는 됐다.

"그런 것 같군."

그림자 검사단의 추적자들을 처리한 그 날, 아라얀은 그의 주인과 떨어져 움직였다. 먼 길을 은밀히 이동해야 했기에 항상 착용하고 있던 갑옷도 벗었다. 여행자, 혹은 떠돌이 용병처럼 위장하기 위해 얇은 가죽 갑옷과 로브를 걸쳤다.

무장도 장검 한 자루와 단검 세 자루로 끝이었다.

지금 그의 모습은 흔하디흔한 떠돌이 그 자체였다. 설령 약간의 이상함을 느낀다 한들, 그에게서 그 용아의 대장을 떠올리지는 못하리라.

"호수를 찾아라."

"예."

그의 수하들이 부지런히 움직였다. 말을 타고 이곳저곳을 누비던 그들이 우뚝 솟은 바위들에 가려있던 자그마한 호수를 찾은 것은 해 질 무렵이 되어서였다.

"찾았습니다!"

아라얀은 수하의 외침이 들려온 곳으로 향했다. 바람에 깎여나간 뾰족한 바위 여럿을 지나자 자그마한 호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크기가 워낙 작아 호수라기보다는 조금 큰 연못이라고 해도 될 정도였는데, 마른 바람이 이렇게 불어오는데도 물이 마르지 않은 것이 사뭇 기이했다.

"그래. 이곳이군."

아라얀이 가죽 뭉치를 돌돌 말아 품에 갈무리했다. 이제 다시 쓸 일은 없는 물건이지만, 주인에게서 받은 것인 만큼 함부로 처리할 생각은 없었다.

'눈에 보이는 것은 허상에 불과하지.'

모르는 이들이 보았다면 어울리지 않는 곳에 있는 자그마한 호수라고 생각했을 테지만, 아라얀은 아니었다.

그는 이 호수의, 이곳의 진실한 모습을 알고 있었다.

'신주(神柱)라.'

글자 그대로 해석하자면 신의 기둥.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기둥은 의미가 다르다. 아라얀은 그 의미를 알고 있었다.

"대장님."

수색을 위해 흩어졌던 수하들이 그의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멀리 떨어져 있어라. 계획대로라면 금방 끝날 테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니 주변에 접근하는 자들이 없는지 철저히 경계하도록."

"옛!"

최대한 은밀히 움직였다고 생각하지만, 혹시 또 모르는 일이다. 중요한 순간에 일을 그르칠 수는 없으니.

수하들을 멀리 보낸 아라얀은 홀로 남았다.

휘이잉

바위들 사이로 불어오는 날카로운 바람이 간간이 호수의 수면에 자국을 내고 흔들었다.

잔잔하게 흔들리며 이는 물결. 그러나 아라얀은 그것이 허상이고 거짓임을 알고 있었다.

아라얀은 천천히 호수 앞으로 걸어갔다. 그러면서 그는 갑옷 안쪽에 들어가 있던 목걸이를 풀어 쥐었다. 얇은 금속줄로 되어있는 목걸이에는 자그마한 구슬 하나가 달려있었는데, 아라얀은 바로 그것을 손에 쥐었다.

새끼손톱보다도 자그마한 붉은 구슬. 그것은 그의 주인, 줄카의 피였다. 그것도 그냥 피가 아니라, 줄카가 직접 자신의 몸에 상처를 내며 그의 의지를 담은 피.

그것은 허락이었으며, 열쇠였다. 오래전 그가 걸어 잠근문을 열도록 하는.

[독특한 놈이었지.]

피를 내어주며, 줄카는 이야기했었다. 그가 이야기하는 내용은 아라얀이 그를 섬기기 전의 일이었기에, 아라얀은 느릿하게 이어지는 옛이야기를 조용히 경청했다.

[어떤 녀석들은 놈들을 야만인이라고 불렀다.]

이민족에 대한 무조건적인 멸시 때문은 아니었다. 우상을 향한 인신공양을 일삼고, 온갖 비합리적인 행태를 일삼는 그들이 선택받은 신민임을 자처하는 카라누르의 입장에서는 이해할 수가 없었던 탓이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조금 달랐어. 놈의 백성들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놈 하나만은 달랐지.]

하나로 단합되지 못한 부족사회가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과정이었다고 할까. 그들은 그런 과도기에 있었다. 만약 그들에게 20년, 아니 10년만 더 시간이 주어졌다면 그들은 하나의 그럴듯한 국가를 이루었을지도 모른다.

[분명 그랬을 테지.]

줄카는 그만큼 그를 높이 평가했다.

[어쩌면 제2의 카라누르가 됐을지도 몰라.]

아라얀은 그의 주인이 했던 이야기를 떠올리며 호수 앞에 섰다.

'그 황제와 동류라.'

물론 그의 주인은 '그'를 황제와 비교하지는 않았다. 다만 동류라고 했다. 처음에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이어지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는 아라얀도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신을 삼킨 자.'

기둥은 곧 봉인이니, 신주란 신을 봉인한장소다.

일찍이 황제는 이 땅 위에 존재하던 신들을 하나하나 쓰러뜨리고 봉인했다. 그들을 가둔 신주는 신의 의지는 잠재우고, 그 힘만을 널리 퍼뜨려 대지에 생기를 가져왔다.

신이란 본디 의지가 없는 존재. 세상이 존재하기에신이 존재하고, 신이 존재하기에 세상이 존재한다.

인간의 사고로는 이해할 수도, 짐작할 수도 없는 신들의 존재는 나약하고 무지한 인간들에게 있어 신비와 두려움, 경외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황제는 그런 신들을 굴복시켰다. 아니, 그는 신들을 신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 신들은 정복의 대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콰직!

아라얀이 손아귀에 힘을 주자 붉은 구슬이 부서져 가루가 되었다. 가볍게 손을 터니 붉은 가루가 호수에 떨어졌다.

사아아

한 차례, 미약한 떨림이 있었을까. 허공이 일렁이더니, 안개가 걷히듯 허상이 걷히고 진정한 신주가 모습을 드러냈다.

잠깐의 일렁임이 끝났을 때, 호수는 온데간데없었다. 있는 것은 풀 한 포기 없이 회색 모래만 가득한 땅. 그리고 그 땅한가운데에 덩그러니 꽂혀 있는 쇳덩이.

'과연.'

아라얀이 눈을 빛냈다.

길쭉한 쇳덩이 위에 위태롭게 걸려 있는 흉측한 생김새의 두개골.

그는 그 두개골에서 느껴지는 위험한 냄새를 맡았다.

온몸을 서늘하게 만드는 흉험한 기운을 느낀 것은 그 냄새를 맡은 직후였다.

[그놈은 이미 인간이라고 할 수 없었다. 놈은 놈의 부족이 이제껏 섬겨온 신을 삼키려고 했고, 반쯤 성공했지. 만약 놈과 맞닥뜨리는 것이 10년만 늦었다면 어땠을지 궁금했다.

뭐…이제는 의미 없는 가정이 되었지만 말이야.]

호기심. 그리고 아쉬움.

무엇에 대한 아쉬움이었을까. 아라얀은 초라한 무덤에 다가가며 생각했다.

'과거의 망령이라.'

그는 쇳덩이와 두개골 앞에서 허리춤의 단검 하나를 빼들었다. 그리고 그것으로 자신의 팔뚝을 그었다.

"일어나시오. 황량한 산맥의 제왕이여."

칼이 긋고 지나간 자국을 따라 핏물이 맺혔다. 조금씩 커지던 핏물은 곧 한 방울, 두 방울씩 회색 모래 위로 떨어졌다.

줄카의 피가 봉인을 여는 열쇠였다면, 지금 흘러내리는 아라얀의 피는 부름이었다.

황량한 산맥의 제왕.

인간으로 태어났으나 인간도, 신도 아닌 존재가 되어버린 그는 죽지 않았다. 신과 하나가 되어버린 그는 살지도 죽지도 않은 채로 이곳에 갇혔다.

그리고 지금. 아라얀은 자신의 피로써 그를 불렀다.

평범한 인간의 피였다면 어림도 없었을 것이다. 백 명, 아니 천 명을 복 벤다고 해도 불가능했을 터.

하지만 아라얀의 피는 평범한 인간의 피와 달랐다. 그것이 줄카가 그를 이곳에 보낸 이유였다.

그그그그

회색 땅이 들썩였다. 처음에는 바람을 맞은 모래가 살짝 튀는 정도였지만, 그 작은 떨림은 곧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크게 바뀌었다.

아라얀은 몇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그러는 사이, 회색 모래는 점점 한곳으로 몰려갔다.

기이한 광경이었다. 넓게 퍼져 있던 회색 모래가 쇳덩이 쪽으로 몰려들더니 높게 쌓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쇳덩이와 그에 걸쳐진 두개골도 높아졌는데, 모래가 쇳덩이와 두개골을 높이 들어 올리는 것 같은 모양새였다.

아라얀은 회색 땅에서 벗어나 그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오래지 않아, 쇳덩이 아래 몰려든 회색 모래가 색을 바꾸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검은색, 그다음은 갈색, 그다음은 푸른색……

그렇게 몇 차 색을 바꾸 니, 다음 달라졌다.

마른 모래가 물에 젖은 것처럼 변하더니, 잠시 후에는 아예 진흙처럼 변했다.

"깨어난 것을 알고 있소."

아라얀이 나직이 말했다. 그는 이제 점점 형체를 갖춰가는 진흙, 아니 이제는 살점처럼 보이는 그것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쇳덩이 아래. 살점 속자그맣게 그어진 선이 위아래로 벌어졌다.

"…익숙해."

그것은 입이었다. 가장 먼저 생겨난 입의 위아래로 턱과 코처럼 보이는 것이 생겨났다.

꿀렁이는 살점들이 빠르게 형체를 갖춰갔다. 그것들은 머리가 되었고, 목이 되었으며, 몸이 되었다.

"어째서지?"

아라얀은 그가 사용하는 언어가 한참 전에 사라진 고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의사소통에 어려움은 없었다.

그의 핏속에는 온갖 종류의 지식이 잠들어 있었고, 그중에는 지금 들리는 고어에 대한 지식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아라얀은 한 번도 사용한 적이 없는 언어를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었다.

"그분의 피와 비슷한 것이 내 몸에도 흐르기 때문이지."

"그분?"

"줄카 전하를 이름이오."

살점은 이제 완전히 사람의 형체를 갖췄다. 그는 길쭉한 쇳덩이를 손에 쥐고 어루만졌다.

"줄카…"

그가 말끝을 흐렸다. 움푹하게 파여 있던 곳에 은은한 빛이 어리더니, 곧 갈색 눈동자를 지닌 눈으로 바뀌었다.

"기억한다."

길쭉한 쇳덩이 끄트머리에 걸려 있던 두개골이 쇳덩이에 녹아들었다. 이상한 표현이지만, 녹아들었다는 말 외에는 그 모습을 묘사할 다른 방도가 없었다.

"기억하고말고."

호수처럼 잔잔하게 가라앉아있던 갈색 눈동자에 바람이 일었다. 사납기 그지없는, 광풍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바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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