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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755화 (755/1,064)

755화

뒷맛이 개운치 않았다고는 하나 승리는 승리였다. 그것도 몇 배의 적을 상대로 거둔 대승, 쾌거였다.

단순히 성문을 닫아걸고 버티기만 하는 것이라면 끝내 이겼다고 해도 쾌거라는 표현은 조금 애매했을 것이다.

병가에서는 통상적으로 농성하는 적을 공략하려면 세 배의 병력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만큼 수성하는 측이 유리하다는 것이다. 그러니 단순히 버티기만 하는 것이라면 군터가 거둔 승리가 조금은 퇴색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버티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성문을 열고 나가 적과 회전을 치르고, 크게 물리쳤다. 몇 배나 되는 적을 상대로 야전을 건 것도, 그렇게 건 싸움에서 대승을 거둔 것도 그렇고 전례가 드문 일이었다.

테리브란의 조정에서도 그 공을 크게 치하했다. 황자가 직접 서신까지 써서 보내기까지 했다.

"결국은 말뿐이로군요."

"그렇게 볼 수만은 없지."

아드리안이 툴툴대자 토어릭이 반박했다.

"일단은 적이 물러갔다고 해도, 이곳은 여전히 전장이 아닌가. 이런 곳에 금은보화를 실어 보내기라도 할까?"

"뭐, 그렇다는 거네. 어쨌거나 말로만 치하한 것은 사실이지 않나."

엄밀히 말하면 말로만 치하를 한 것은 아니었다. 나흘 전에 물자가 이전보다 더 넉넉하게 당도한 것이다. 그러나 아드리안은 그것은 당연히 와야 할 것이라고 여기는 듯했다.

토어릭은 이 이상 아드리안과 말싸움을 하는 것은 시간낭비라고 생각했는지, 군터에게 시선을 돌렸다.

"장군. 양 전선의 상황이 녹록지 않은 모양입니다. 아록 쪽은 말할 것도 없고, 리바스트라도……"

"들은 것이 있나?"

군터가 물었다.

그의 기억으로 엊그제 전령이 전한 소식에는 별다른 것이 없었다. 좋지 않은 상황인 것은 여전하지만, 그 이상으로 나빠졌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소문을 들었습니다. 쥬드 포트락이 그의 군대 일부를 나누어 남진시켰다더군요."

소문이라는 것은 믿을 게 못 된다. 하물며 전란 속에 떠도는 소문이라면 더더욱.

하지만 그런 소문이 돌 정도로 리바스트라 쪽의 상황이 좋지 못하다는 추측 정도는 할 수 있다. 만약 쥬드 포트락이 쉽사리 나아가지 못하고 발이 묶인 상태라면 그런 소문이 돌리는 없을 테니까.

"시간을 벌고 있을 뿐입니다."

시어문드가 입을 열었다.

"애초 계획이 무엇이었든, 이 이상 밀려서는 곤란하다는 것을 조정에서도 알 겁니다. 무슨 수라도 쓰겠지요."

대개 차분하게 할 말을 하던 그였지만 지금의 어조는 다소 차가웠다. 아니, 말 자체가 냉소에 가까웠다. 그 역시 미적지근한 조정의 행사에 화가 쌓인 것이다.

토어릭 만큼은 아니어도, 시어문드 정도면 그나마 온건한 편에 속했다. 지금 군터의 휘하에는 아드리안처럼 대놓고 조정에 대한 반감을 드러내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군터는 그들의 불만을 알았음에도 직접 나서서 그들을 달래려 하지 않았다. 그는 수하들이 마음대로 생각하고 마음대로 말하게 내버려 두었다. 아드리안 등은 그것을 보고 그도 조정에 불만을 품은 것으로 지레짐작했지만 군터는 그 역시 부인하지도, 긍정하지도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군터는 그런 것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당장 눈앞에 닥친 상황이었다.

잔카라스 데반이 군대를 이끌고 공격해왔을 때, 그는 전력으로 맞서 싸웠다. 흐르트리 파오가 그 자리를 대신해 다시 덤벼들었을 때도 마찬가지.

그렇게 당장 눈앞에 보이는 적을 물리친 지금, 군터의 신경은 온통 영혼 감옥에 잠들어 있는 할렌의 영혼에 쏠려있었다. 그는 멀고 가까운 곳들의 전황을 보고받으면서도 어떻게 하면 할렌의 영혼을 온존하면서 그를 부활시킬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회의가 파하고, 군터는 홀로 남아 내면을 관조했다. 희미하게 맥동하는 할렌의 영혼을 느끼며,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장군."

그렇기에 그는 다른 수하들과 함께 시어문드가 다시 그를 찾아왔을 때, 약간 성가시다고 생각했다.

"무슨 일인가."

"할렌의 죽음으로 상심하신 것은 짐작하고

있습니다만……"

무슨 일인가 했더니, 생각했던 것보다 시답잖은 일이었다.

총명한 시어문드가 이번만큼은 실수한 것이다. 그는 군터가 평소와 다르다는 것은 눈치챘지만, 그 원인에 대해서는 완전히 헛짚었다.

"걱정할 필요 없다."

군터는 시어문드에게 거짓말을 하지도, 그렇다고 속내를 다 털어놓지도 않았다. 언젠가는 밝히겠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너 혼자만의 생각이더냐?"

"소관 말고도 몇몇이 비슷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장군께서 근래 부쩍 생각이 많아 보이셨으니까요."

괜한 걱정이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원인을 제공한 것은 자신이니 딱히 할 말도 없었다. 군터는 걱정하지 말라는 말뒤로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다가 시어문드를 돌려보냈다.

"순순히 따르더냐."

"따르지 않을 도리가 없지요. 그 치들이야 가문이 나라보다 우선인 족속들 아닙니까."

쥬드 포트락은 아들의 신랄한 말에 쓱 웃을 뿐, 주의를 주거나 반박하지 않았다. 다소 원색적으로 표현하기는 했으나, 그 역시 아들과 같은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귀족이라는 자들이 대개 그렇지. 나라가 망해도 귀족은 망하지 않는다고 하지 않더냐."

"하지만 우리 또한 귀족이지요. 그런 자들과 같은 귀족이라 불리는 게 치욕스럽기 그지없습니다."

"그래서 전부가 아니라 대개라고 하지 않았더냐."

귀족이지만 귀족답지 않다. 쥬드 포트락은 이름을 떨치기 전, 젊었던 시절에 여기저기서 그런 이야기를 들었었다.

그런데 그의 아들 역시 그런 모습을 보이니, 과연 피가 진하기는 진한 것인가 싶었다.

쥬드 포트락은 귀족보다는 군인에 더 가까워 보이는 아들이 기꺼웠다. 흐르트리 파오를 비롯한, 나라의 일보다는 자신들의 일이 먼저인 이들을 싸잡아 비난하는 것도 나쁘게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그런 개인적인 감상은 속으로 감추고, 겉으로는 엄한 모습을 보였다.

말했듯, 귀족들은 대개 그렇다. 하지만 전쟁은 귀족들의 힘 없이는 치를 수 없지. 그렇다면 네 개인적인 감정 같은 것을 드러내서야 쓰겠느냐."

"알고 있습니다. 이런 말을 입 밖에 내는 것은 아버지 앞에서뿐입니다."

"내 앞에서도 조심하거라. 한번 입 밖으로 튀어나온 말은 언제든 다시 나올 수 있는 법이니."

"명심하겠습니다."

시온 포트락은 부친의 말에 토를 달지 않았다. 부친을 마음속 깊이 존경하기 때문이기도 했고, 괜한 일로 부친의 심력을 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몸은 좀 어떠십니까."

"괜찮다. 그럭저럭 버틸 만해."

시온 포트락은 부친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는 부친의 주치의에게 가서 물어야겠다고 생각하며 화제를 돌렸다.

"전황은 어떻습니까?"

"느리긴 해도 수월하다. 적이 욕심을 부리지 않고 있기 때문이지."

최대한 버티기는 하되, 내줄 것은 내주면서 조금씩 물러나고 있다. 쥬드 포트락은 적의 그런 전략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승리가 아니라 시간을 끌기 위함이라면 적은 최선의 판단을 내리고 있는 것이었다.

"조금 더 과감하게 밀고 들어가는 것은 어떻습니까?"

"의욕을 앞세우면 실수가 생길 수 있다. 지금만 해도 나쁘지 않은데 굳이 더 욕심을 부릴 이유가 없지."

군대를 부림에 있어 쥬드 포트락의 원칙은 하나였다.

그것은 바로 패하지 않는 것. 그는 승리를 거두는 것보다 패하지 않는 것을 우선했다. 패배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들고, 거기서 승리를 향해 나아간다. 그렇기에 그는 전장에서 늘 신중하고 철저했다.

'세상이 아버지를 잘못 알고 있는 게지.'

하지만 그럼에도 세간에는 쥬드 포트락이 과감함으로 수 없는 승리를 일궈낸 용장으로 알려져 있다. 결과만을 놓고 봐서 생긴 착각이었다.

남들의 눈에는 과감함으로 비쳤을지 모르나, 그 과감함은 충분한 계산 끝에 나온 판단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조공(助攻)이다. 본분을 잊어서는 안 되지."

"전하께서도 수월하게 밀어붙이고 계시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우리는 보조를 맞추면 그뿐이다."

아무런 욕심도 없다는 듯 담담하게 말하지만, 부친의 마음을 모를 그가 아니었다. 시온 포트락은 의미심장하게 물었다.

"무엇을 염려하고 계십니까?"

"여우."

"예?"

"아직 제 굴에서 튀어나오지 않은 여우 놈을 경계하고 있다."

"혹…타라냐드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쥬드 포트락이 탁자 위의 지도에 눈길을 옮겼다.

지금 그들이 있는 리바스트라의 위쪽. 길쭉하게 늘어진 타라냐드가 보였다.

"자이드라 멕시스를 알고 있다. 아주 오래전이기는 해도 한번은 직접 보기도 했지."

"어떤 자입니까? 꾀가 많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만."

쥬드 포트락은 조용히 옛 기억을 더듬었다. 솔직히 별로 기억에 크게 남은 자는 아니었다. 직접 만나봤다고는 해도 대연회장에서 짤막하게 통성명을 한 것이 전부였고, 그에 대한 이야기는 소문으로 접한 것이 다였다.

그러나 간혹 들었던 소문만으로도 그가 보통내기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효웅이라고 봐야겠지. 한 지역의 패주로 수십 년을 지내온 야심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그는 자이드라 멕시스가 이쪽이 아니라 자콥트라소프의 밑으로 들어갔을 때 의외라고 생각하면서도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길 수 있는 쪽에 붙는 것이 아니라 얻을 것이 더 많은 쪽에 붙었지.'

타라냐드의 총독은 야망이 있는 자다. 그런 자가 자신의 본거지 바로 아래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투에 아직까지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고 있다. 저쪽에다 무슨 핑계를 대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언제까지 손 놓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타라냐드가 끼어들 거라 보시는군요."

"지금까지 잠잠한 것이 오히려 이상했지."

"하긴, 그렇기도 하군요. 그렇다면 그가 언제쯤 움직일 거라 보십니까?"

"글쎄."

잠시 흰 턱수염을 어루만지던 쥬드 포트락이 입을 뗐다.

"곧이겠지. 더 끌었다가는 전세가 뒤집을 수 없을 정도로 기울게 될 테니."

그의 예상은 맞아떨어졌다.

정확히 엿새 후, 전령의 다급한 외침이 그의 군막에울려 퍼졌다.

"타라냐드의 군대가 남하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군세는 대략 3만 이상으로 추정됩니다!"

전령의 보고를 들은 시온 포트락은 부친을 바라보았다.

그의 부친은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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