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터-754화 (754/1,064)

754화

"그 애송이가 받아들였습니까?"

"당연히 그랬겠지요."

육중한 전신 갑옷을 입은 사내, 카니악이 무슨 말을 하냐는 듯 혀를 찼다. 그러나 아라얀은 그의 시건방진 부하에게는 눈길 한번 주지 않은 채, 줄카에게 시선으로 답을 물었다.

[받아들였다.]

제안이라고는 하지만, 어차피 저쪽은 선택의 여지가 없다.

이 나라에 그의 아군이 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뿐이었으니.

[쿠엘단과 룬차이는 죽었고, 덩치 녀석은 목줄이 잡혔지.]

이런 상황에서 달리 무슨 선택지가 있겠는가. 덤덤한 얼굴이기는 했으나, 그 속은 썩어들어가고 있었으리라.

"그대로였습니까? 고집만 센 얼간이?"

고집만 센 얼간이. 그건 일찍이 줄카가 자콥 트라소프를 평한 말이었다.

[그래. 여전하더군.]

그러나 그건 비하의 의도가 아니었다. 오히려 줄카는 그 애송이를 꽤 높게 평가했다. 적어도 황제의 핏줄 중에서는 가장 낫다고 생각했다.

'돌연변이 같은 녀석이지.'

이 지저분한 판에 끼어드는 것은 여전히 마음에 안 들지만, 그나마 마지막까지 남은 녀석 중 그 고집쟁이 녀석이 있어서다행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정말 화가 많이 났었을 테니.

"군대는 준비됐습니다만……"

카니악이 말끝을 흐렸다.

[나설 일은 없다. 적어도 당분간은.]

아간투스베록과의 일전은 승자도, 패자도 남기지 않은 채 끝났다. 서로가 만만치 않은 상대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처음부터 끝장을 보려던 것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양측의 군대는 크게 상하지 않았다. 오히려 상한 것은 전투가 시작됨과 동시에 서로에게 달려들었던 두 군주였다.

[빌어먹을 자식.]

줄카가 아직 핏기가 가시지 않은 상처를 쓰다듬으며 이를 갈았다. 받은 만큼 돌려주기는 했지만, 그래도 얼굴에 떡하니 남은 상처가 수치스러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잘 참으셨습니다. 그곳에서 끝까지 갔었더라면 그 늙은 괴물만 기뻐했을 겁니다."

줄카는 몇 번 거칠게 숨을 내쉬더니 곧 노기를 가라앉혔다.

아라얀의 말대로다. 덩치 큰 잡종 녀석과 끝장을 보는 것은 바라는 바지만, 그것이 남의 손에서 놀아나는 것이라면 내키지 않는다. 하물며 그 손이 음흉한 노괴물의 것이라면 말할 필요도 없다.

"그나저나…"

[꼬리를 달고 왔구나.]

카니악은 자신의 말을 끊은 주군을 보며 순간 멍한 표정을 지었다가, 무섭게 인상을 일그러뜨렸다.

이곳에 마지막으로 당도한 것은 자신이었다.

"빌어먹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는데 말입니다."

[무리도 아니지. 놈들의 기척을 눈치 챌 수 있는 이는 드물다.]

당연하지만, 그런 말은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카니악은 자책과 분노에 휩싸여 몸을 일으켰다. 그의 손에는 어느새 육중한 철퇴가 쥐여 있었다.

"어느 쪽입니까?"

[북쪽. 생포는 힘들 거다.]

"그래도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무거운 쇳덩이를 온몸에 걸친 자의 움직임이라고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카니악은 전력 질주를 하는 말처럼 튀어 나갔다. 처음 세 발자국을 뗄 때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네 발자국째를 내디뎠을 때, 희미한 기척이 여럿 느껴졌다.

"이 쥐새끼들! 잘도 냄새를 맡았구나!"

검은 형체가 세 방향으로 날아올랐다. 카니악은 그중 하나를 쫓았다. 그의 철퇴가 움직이자 허공에 떠 있던 형체가 갑작스레 모습을 감췄다.

"흥!"

눈에 보이던 것이 갑작스레 사라졌으나 카니악은 당황하지 않았다. 그는 기감에 걸린 미약한 기척을 향해 철퇴의 방향을 틀었다.

콰앙!

묵직한 충격과 함께 사라졌던 형체가 다시 모습

드러냈다. 가죽 갑옷으로 가볍게 무장한 검사였다.

'그림자 검사단. 이야기는 익히 들었지.'

암살자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첩보원이라고 해야 할까.

확실한 건 검사단이라는 명칭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무인이나 군인이 아니라는 점이다.

콰직!

한번은 막았으나, 그게 다였다. 카니악은 몸을 일으키려는 상대에게 재차 달려들어 머리를 으깨버렸다. 역시나 동료애라고는 없는 것인지, 나머지 둘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난 뒤였다.

"한 놈도 놓치지 않는다."

분노 때문인지, 피를 봤기 때문인지 그의 몸 안에 흐르는 피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얼굴을 다 가린 투구 사이로 난 눈구멍에서 불그스름한 빛이 새어 나왔다.

***

"17조의 소식이 끊겼습니다."

답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그는 계속 보고를 이어갔다.

"그가 자콥 트라소프와 접촉한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만일……"

[만일은 없다.]

그의 입이 닫혔다. 그는 살짝 고개를 들었지만, 그의 주인은 여전히 정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정원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을.

"허나, 대비는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리석은 놈은 아니다. 자신이 움직인다면 내가 어찌 나올지 짐작하고 있을 것이야. 그러니……]

키리스트는 정원에서 시선을 거뒀다. 돌아선 그는 부드러운 모피로 된 자리에 비스듬히 몸을 누였다.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마음에서 마음으로, 감정의 파도가 밀려왔다. 주인이 느끼는 지독한 권태와 허무가 그의 정신을 어지럽혔다. 몸에 잔뜩 힘을 주고 긴장을 늦추지 않은 덕에다행히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을 수 있었다.

[아이들을 돌려보내라.]

"예."

그는 짤막하게 답하곤 뒤편에 시립 해 있던 수하에게 눈짓했다. 무언의 명령을 받은 군관이 조용히 발걸음을 옮겼다. 곧 바깥에서 들려오던 천진난만한 웃음소리가 그치고, 적막함과 햇살만이 실내를 채웠다.

[들여라.]

무엇을 들이라는 것일까 의아해할 필요도 없었다. 그저 문을 여는 것으로 충분했다. 문을 열자 그 앞에 어두운 얼굴로 서 있던 노인이 기다렸다는 듯 들어섰다.

"전하."

며칠 동안 제대로 식사를 하지 못한 것처럼 잔뜩 야위어 초라해 보이는 노인, 만약 그가 이 거대한 제국에서 손꼽히는 고귀한 신분이라고 한다면 믿을 사람이 있을까?

하지만 사실이었다. 노인은 여명 교단의 추기경이었으며, 제국의 국교를 이끄는 실질적 수장이었다.

[그래. 생각은 마쳤나?]

노인은 이를 악물었다. 그는 두려워하고 있었으나, 동시에 분노하고 있었다.

"아직 마치지 못했습니다."

[답을 가지고 오라 했을 텐데?]

"답을 드리기 전에, 한 가지만 여쭙겠습니다."

이 한 마디를 입 밖에 내기 위해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했는지는, 오직 당사자인 노인만이 알았다.

노인은 몸을 세우고 고개를 들었다. 권태가 묻어나는 시선이 송곳처럼 날카롭고 따갑게 느껴졌다.

"어째서입니까? 이 나라를 도탄에 빠뜨리는 것이 전하께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되묻지. 그걸 아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

머릿속에 메아리치는 진의를 고스란히 느낀다는 것은 고통이었다. 배려라고는 조금도 없는 속내, 경멸과 조소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니까.

그는 묻고 있다. 지금까지처럼 적당히 눈과 귀를 가리고 사치와 향락에 젖어 남은 생을 보내면 될 것을, 왜 어울리지도 않게 목소리를 내려 하느냐고, 옳다. 사실 노인은 지금도 후회하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고개를 숙이고, 상대가 원하는 답을 줄까 하고 말이다.

하지만,

"전하께는 우습게 보일지도 모르지만, 저는 한평생 원신의 종으로 살아왔습니다. 위로는 신과 황제 폐하를, 아래로는 신민을 살펴왔지요. 물론 때때로 세속의 욕망에 젖어 의무를 게을리 한 적도 있습니다. 신께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왔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부족한 몸, 죄인의 삶이었지요."

첫마디부터 시작된 떨림은 말을 이어갈수록 잦아들었다.

담담히, 고백하듯 천천히 읊조리는 말 속에서 노인은 자신의 삶을 돌아보았다.

"죄로 얼룩진 삶이었으나, 그런 부끄러운 삶 속에서도 저는 단 한 순간도 제가 누구인지 잊지 않았습니다. 신을 향한, 그분의 사도이신 폐하에 대한 믿음은 조금도 흔들렸던적이 없습니다."

[나를 실망시키는군.]

머릿속에서 천둥이 치는 듯했다. 상대는 아직 비스듬히 누운 채 반쯤 눈을 감고 있었으나, 그의 은은한 분노는 이미 노인의 등골을 사정없이 긁고 내려갔다.

두려움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노인은 굴하지 않았다.

비록 지금은 초라한 몰골이 되었다고는 하나 그는 제국의 국교를 이끄는 몸이었다. 만인의 위에 선 고귀한 신분인 것이다.

움츠러들려는 몸을 억지로 세웠다.

"송구합니다. 허나 전하께서 저를 납득시켜주시지 않는다면 저는 전하를 실망시켜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제 생각에, 전하께서 하시려는 일은 이 나라는 물론이고 원신께도 해가 되는 일인 것 같으니까 말입니다."

말을 마친 노인은 눈을 감았다. 할 말은 다 했으니 이제 남은 것은 답을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그 답이 말이 될지, 칼이 될지는 그의 손을 떠난 문제였고,

[네 마음을 들여다볼 수 없는 것이 불편하구나.]

노성이 날아들지 않을까 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머릿속을 울리는 소리에는 즐거움이 묻어 있었다.

[무엇 때문이지? 두려움 때문인가? 살날이 길지 않으니 막연하게만 여겼던 죽음이 이제 슬슬 두려워지기 시작했나?]

노인은 눈을 부릅떴다. 그러나 그에게 반박은 허락되지 않았다. 발작적으로 입을 열려 했을 때, 그는 자신이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음을 알았다.

[두려워할 필요 없다.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어야 하지 않겠나. 그런 의미에서 죽음은 축복이라 할 수 있지. 삶의 종지부를 부정하려 하지 마라. 죽음 뒤에 이어지는 삶같은 것은 없어. 신이 다스리는 사후의 세계? 그런 달콤한 거짓말을 믿나?]

믿는다. 어찌 의심하겠는가? 노인은 신의 존재를 직접 목도했다. 그의 사도가 행하는 기적과 같은 역사를 이 두 눈으로 보았다.

[순진하기 짝이 없군. 아니, 두려움에 눈이 먼 것이겠지.]

군주 키리스트가 냉소했다.

노인은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황제를 섬긴 군주였다. 황좌와 제국을 수호하기로 신성한 맹세를 한 장본인이었다.

그런데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이 분노와 환멸은, 저 조소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잘못된 것은 바로잡아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그 순간, 노인은 무언가를 보았다.

젊은 사내였다. 한 여인을 바라보며 웃고 있던 사내는 어느 순간 피와 시체로 가득한 전장에 있었다. 그는 이길 수 없는 적을 상대로 싸웠으며, 끝내 좌절했다. 그리고….

[내가 바라는 것은, 거짓과 기만으로 쌓은 죄의 몰락이다.

내가 가져 마땅한 정당한 권리지. 나는 그것을 행사할 뿐이다.]

키리스트가 몸을 일으켰다. 그는 떨고 있는 노인에게서 시선을 거뒀다.

[가치 없는 것에 목매지 마라. 부질없는 도피일 뿐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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