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3화
때가 무르익었다고 판단하고 군사를 움직였건만, 그들을 기다리는 전투다운 전투는 없었다. 흐르트리 파오가 갑작스레 군을 물린 것이다.
"뭐지?"
시어문드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그가 출진 이틀 전에 한참 멀리서 일어났었던 일에 대해 짐작하기는 불가능했다.
***
"뭐라?"
흐르트리 파오는 얼굴을 붉히며 벌떡 일어났다. 방금까지 차분하게 말했던 것은 다 연기였다는 듯, 그는 이글거리는 눈으로 전면에 앉은 상대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가 사납게 노려보고 있어도 상대의 신색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의 반응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는 듯.
"군을 물리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군대를 이끄는 것은 나야."
"제 말을 따르지 않으신다면, 더 이상은 아니게 될 겁니다."
소리가 날 정도로 이를 악물었다. 마음 같아서는 무슨 개수작이냐고 소리치고 싶었으나, 그럴 수는 없었다. 상대는 그조차도 조심해야 할 신분이었으니..
시온 포트락.
쥬드 포트락의 장남이자 후계자. 벌써부터 부친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아들이라며 명성이 자자한 사내다.
물론 여기까지만 놓고 보면 하고 싶은 말까지 삼키며 자존심을 구길 필요는 없다. 그러나 문제는 그가 쥬드 포트락의 아들로서가 아니라, 전령으로서 왔다는 점이다.
"장군. 착각하셔서는 곤란합니다. 이건 부탁이 아니라 명령입니다."
즉, 군을 물리라는 이 명령은 쥬드 포트락으로부터 내려왔다는 뜻.
"일전을 앞두고 있네. 이 순간만을 위해……"
"일전? 외람되지만 장군. 그 일전이라는 것은 무엇을 위한 일전입니까? 승리? 아니면 가문을 위한 죽음?"
"죽음으로써 오명을 씻겠다는 마음가짐은 존경합니다만, 장군의 그런 사욕 때문에 수만 군사를 잃을 수는 없습니다. 대장군께서는 그것을 우려하고 계시고요."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다."
"약속드리지요. 지금 물러나신다면 책임은 장군과 이곳에 계신 분들 선에서 그칠 것입니다. 그러나 장군께서 대장군의 명령을 따르지 아니하시고 기어이 고집을 부리신다면… 수도에 있는 장군의 가문과 가문의 식솔들에게까지 피해가 미치겠지요."
"나를 협박하는 건가?"
"조언을 드리고 있는 겁니다."
시온 포트락은 자신이 해야 할 말은 다 했다는 듯, 김이 많이 줄어든 차를 들었다.
털썩!
흐르트리 파오는 박차고 일어났던 자리에 반쯤 주저앉았다.
'빌어먹을!'
흐르트리 파오는 눈앞이 깜깜해졌다. 명예롭게 최후를 맞을 각오까지 마쳤건만, 이렇게 뜻을 꺾어야 한단 말인가.
저 건방진 젊은 놈을 무시해버릴까 하는 생각은 들지도 않았다. 이미 이곳의 일이 쥬드 포트락의 귀에까지 들어간 이상, 저 젊은 놈이 입을 막고 일을 저질러버린다고 해도 그 뒷감당이 문제다. 정말 가문에 화가 미친다면, 죽음을 각오한 이유가 사라지지 않는가.
난감한 처지가 된 것은 다른 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대개 힘 있는 가문의 일원이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쥬드 포트락의 명령을 거스를 배짱은 없었다. 설령 그들이 하나로 힘을 모은다고 해도 마찬가지. 쥬드 포트락은 잔카라스 데반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상대였다.
그러니 그들에게는, 흐르트리 파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시어문드는 뜻밖의 상황에 당황했으나, 결과적으로는 나쁘지 않았다. 어쨌거나 적이 물러갔고, 그들은 또 한 번 키파를 지켜내는 데 성공한 것이었으니.
"어디까지나 겉으로만 보면 말입니다."
시어문드가 탄식했다.
"놈들의 병력을 줄여놓을 기회였습니다. 놈들이 이렇게 전력을 보존한 채 돌아간다면, 언제고 정비하여 다시 쳐들어올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회전에서의 큰 승리도 시어문드의 마음에는 차지 않은 듯했다. 그는 연신 아쉬움을 토로했으나, 별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물러나는 적을 지금부터 추격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
"아니. 올 수도 있는 것이 아니라, 필시 다시 올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이번처럼 쉽지 않을 것은 자명한……"
"그렇다 한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군터가 시어문드의 푸념을 끊었다.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 만약 그들이 내게 이 이상을 바란다면, 돌아갈 것이다. 죽으라는 명령을 따를 생각은 없으니."
황자에 대한 충성심이 넘치는 이들이 들었다면 불경이고 불충이라며 들고 일어섰겠지만, 이곳에 그런 이는 없었다.
"장군의 말씀이 옳습니다. 우리는 할 만큼 했습니다. 아니지. 할 수 있는 이상을 했지요. 만약 놈들이 다시 대군을 이끌고 온다면…그때도 지금처럼 지원 없이 막으라 한다면 우리는 말머리를 돌려야 합니다."
"탈영이고, 반란이네. 조정에서 가만히 있을 것 같은가?"
"가만히 있지 않으면? 장군의 말씀 못 들었나? 조정에서 우리 더러 죽으라고 한다면 자네는 얌전히 목을 내밀 텐가?"
그간은 승리의 기쁨에 가려졌었으나, 군터 휘하의 군관들은 조정과 황자에 대해 상당한 유감을 느끼고 있었다. 몇 배나 되는 적에 힘겹게 맞서 싸우는 동안 아무런 지원도 받지 못한 것이 그 이유였다.
"아직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다. 내가 말한 것은 가정일 뿐. 미리부터 흥분할 필요들 없다."
군터는 자칫 과열될 뻔한 분위기를 가라앉혔다. 시어문드는 슬슬 얼굴을 붉히기 시작하던 군관들이 한마디 말에 잠잠해지는 것을 보며 내심 감탄했다. 익숙하지만, 그래도 이런 것은 볼 때마다 놀라웠다.
"놈들이 물러난 이상 이곳에 더 머물 이유는 없다. 회군하도록 하지."
군터의 그 말이 있고서야, 군관들은 정말 그들의 작은 전쟁이 끝났음을 비로소 실감했다.
***
군터는 키파로 돌아온 후로도 계속 정찰대를 부지런히 돌리면서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했다. 그러나 보름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난 후에도 별다른 이상은 감지되지 않았다. 이정도면 흐르트리 파오가 기만책을 부린 것은 아니라고 봐도 좋을 듯했다.
"나머지 오백은 일어나지 못할 듯합니다."
"그런가."
대승을 거뒀다고는 해도, 그들이 입은 피해는 적지 않았다. 사망자는 말할 것도 없고, 부상자 또한 천이 훌쩍 넘으니, 한 달이 지난 후에 회복한 이는 삼분지 일도 되지 않았다.
"적이 다시 밀고 들어온다면, 그때는 정말 물러나야 할 것 같습니다."
그나마 지금 키파를 비롯한 인근 지역을 사수할 수 있는 것도 프란시스 티브리악이 이끌고 온 지원군 덕분이었다. 그들이 없었다면 지금쯤 이 도시에서 한발자국도 나서지 못하고 있었으리라.
"조정에서는 아직 답이 없습니까?"
"그래. 아직이다."
시어문드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쪽도 답답한 모양이군요."
욕지거리를 뱉지 않는 것은 바로 얼마 전에 남쪽에서 들려온 비보를 접했기 때문이었다. 바라눔 트라소프가 기어이 시드폴을 함락시켰다. 여기까지만 들으면 도시 하나가 함락당한 것이 뭐 대수냐 싶을 것이다. 하지만 그 함락당한 도시를 지키던 이가 카리아의 당주라면?
"대귀족의 목을 그리 망설임 없이 베어버릴 줄은 몰랐습니다."
많은 이들이 시어문드와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것이 대사건이 되어 아직도 세인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는 것일 테고, 아무튼, 그 사건으로 바라눔 트라소프는 자신의 단호함을 보였다. 자신에게 대항하는 적이라면 그게 일개 병사든, 대귀족이든 개의치 않고 벨 것을 천명한 것이다.
"아록은 주인을 잃었습니다."
물론 당주의 목이 달아났다고 해서 카리아 가문의 명맥이 끊긴 것은 아니다. 테리브란에 있던 카리아의 후계자가 부친의 뒤를 이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카리아의 기반은 아록에 있다. 그리고 카리아의 신임 당주는 지금 아록이 아니라 테리브란에 있고,
"넘어갈 것이라고 보나?"
"지금도 반쯤 넘어갔습니다. 구심점을 잃은 이상, 나머지 반도 오래 버티지 못할 겁니다."
달가운 소리는 아니었다. 아록의 상황이 힘들어지면 힘들어질수록 이곳의 상황도 덩달아 힘들어질 테니.
"나쁜 일만은 아닙니다. 하브람 카리아의 죽음으로, 조정에서도 전황의 심각성을 깨달았을 테니까요."
북쪽에서는 쥬드 포트락이, 남쪽에서는 바라눔 트라소프가 설쳐대고 있다. 아직은 조금씩 밀리는 형세지만, 언제 확 하고 무너져버릴지 장담할 수 없다.
"적어도 여유를 부릴 때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았을 겁니다."
"여력이 있다고 보나?"
"여력이요?"
시어문드가 가볍게 웃었다.
"모르겠습니다만, 상관없지 않겠습니까? 이 전쟁에서 지면 모든 걸 잃을 텐데, 후일을 걱정할 겨를이 있겠습니까? 남은 것을 쏟아붓는 게 아니라, 없는 것도 짜내야 할 판입니다. 그저 그들이 그것을 깨달았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쪽이 곤란하다. 군터는 여차하면 돌아가겠다고 말했지만, 그건 대놓고 조정에 항명하겠다는 뜻이니 정말로 뒤가 없는 이야기다.
'부디 그런 최악의 상황만은……'
시어문드가 속으로 한숨을 내쉬던 시각.
테리브란의 왕궁 내전에서는 은밀한 만남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정말 뜻밖이군."
[무엇이 말이냐.]
"나와 이야기할 때는 목소리로 이야기해주시오."
[귀찮은 허식이군. 아니면 부질없는 미련인가?]
"내 집에서는 내 식대로 하겠다는 뜻이지."
자콥 트라소프는 깊게 내려온 후드를 뒤로 젖히는 상대를 응시했다.
"원한다면 그리 해주지."
힘 있는 목소리가 나직이 흘러나왔다.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그의 육성을 듣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새 못 보던 자국이 생겼소이다."
"오래되지 않았다."
"남쪽에서 소란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
왼쪽 눈 밑에서 턱 끝까지 이어지는, 작은 뱀 한 마리가 기어간 것 같은 흉터. 칼밥 먹는 인생이라면 얼굴에 크고 작은 상처가 생기는 것이야 흔한 일이라지만, 그게 이 사내라면 이야기는 다르다.
"보통 충돌이 아니었던 모양이오."
"덩치 녀석은 늙은이의 편에 붙었다. 아니, 붙었다고 하기는 그런가?"
그는 뭔가 더 적절한 표현을 찾으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그래. 손을 잡았다고 해두지."
"아간투스베록은 오만한 자가 아니오. 그런 자가 노괴물과 손을 잡았다?"
"원하는 것이 있으니까."
"언약비인가?"
"눈치가 빨라 좋군."
"당신은 아직 자유롭고? 하긴, 그러니 나를 찾아왔겠군."
"그 말대로다."
사내, 줄카가 씩 웃었다. 그러나 자콥 트라소프는 확신할 수 있었다. 저 시원시원해 보이는 웃음이 진정성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그저 습관적으로 지은 표정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을.
"무엇을 원하시오?"
"늙은이가 바라눔 녀석을 밀고 있다. 알고 있나?"
"그럴 수도 있다고 짐작은 했지."
그리고 그 짐작은 지금 사실로 드러났다. 자콥 트라소프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줄카는 인상을 찌푸리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의 감정 표현이 흥미롭다는 듯.
"기뻐해도 좋다. 늙은이가 바라눔 녀석을 밀었다는 건 네 쪽이 더 우세하다고 판단했다는 뜻이니."
"그게 무슨 의미가 있지? 노괴물이 바라눔을 지원한다면…"
"지원이라고는 해도, 그리 거창한 것은 아니다. 어쨌거나 그 늙은이는 리비암에서 한발자국도 나오지 못하니."
"그러나 그의 눈과 귀, 손발은 제국 전역에 뻗어 있지."
"그래서 포기할 텐가?"
"그럴 리가. 솔직히 말하지. 난 지금 당신이 무슨 제안을 가져왔는지 기대하고 있소."
줄카가 피식 웃었다. 역시 감정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인형의 웃음과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