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2화
"그자가 끝내 최악의 선택을 하는군요."
시어문드의 목소리는 담담하게 가라앉아 있는 듯했지만, 그의 심정이 어떨지는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모든 일이 계획대로, 가장 바랐던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다만 대놓고 기쁨을 드러내지 못하는 것은 이 기쁨이 숱한 목숨값임을 인지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병사가 아니라 일반 백성들의..
이렇게 말을 아끼고,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가식이라고 해도 좋다. 그러나 전쟁이란 본래 이런 것이 아니던가. 승리를 위해서라면 쓸 수 있는 수를 모든 수를 쓴다. 그 대가가 무고한 백성들의 피라고 해도 마찬가지.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지.'
마음에 아무런 가책이 없는가, 하고 묻는다면 즉답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시어문드는 진심으로,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본래 전쟁이란 이런 것이 아닌가.'
아니라고 하는 것이야말로 거짓이요 가식이다. 시어문드는 무능한 자를 가장 싫어했고, 다음으로는 가식적인 자를 싫어했다. 두 가지가 겹치면 최악인데, 과거 섬겼던 주인이 바로 그런 자였다.
'올바른 선택이었지.'
돌이켜 생각해봐도, 그때 길게 망설이지 않았던 것은 탁월한 결정이었다. 그 가슴 터질 정도로 우유부단하고, 토가 나올 정도로 가식적인 작자에 비하면 지금의 주인은……
'뭐, 이쪽도 이쪽 나름대로 고충이 있기는 하지만.'
시어문드는 슬쩍 상석 쪽을 곁눈질했다. 그의 주인은 역시나 무표정한 얼굴로, 처음부터 지금까지 말 한마디 없이 앉아있었다. 시어문드는 그를 봐온 세월이 짧지 않았기에 그 무표정한 가면 너머에 숨은 진의를 약간이지만 읽어낼 수 있었다.
'관심이 없으신 건가.'
그런 기미를 느낀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정확히 할렌이 죽은 뒤부터였다. 이유가 분명하니 그런 추측에 힘이 실렸다.
혹자들 사이에서는, 특히 그의 밑에서 복무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병사들 사이에서는 피도 눈물도 없는 사내라는 말마저 나오는 그다. 그런 그가 부하 하나의 죽음 때문에 전쟁이 한창인 와중에 감상에 젖으리라 누가 생각이나 하겠는가.
그러나 인간인 이상 누구나 감정이라는 것을 가지기 마련 아니겠는가. 정말로 피가 차가운 사람은 없는 법이다.
'점점 더 바라보기 어려워지고 계시기는 하지.'
시어문드는 문득, 군터라는 사내를 처음 봤을 때를 떠올렸다. 그때도 무뚝뚝하기는 했으나 지금 같지는 않았다. 인간적인 면모도 찾아볼 수 있었고 말이다.
어떤 현인이 말하기를,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또 어떤 현인은 사람은 변하기 마련이라고 했다. 뭐가 옳은지는 모른다.
군터라는 이름이 군터 크렘보르라는 이름으로 변한 것처럼 그 역시 귀족이 되고 힘을 얻으면서 변한 것일까, 아니면 원래 그런 성정이 내면에 숨어있었다가 계기를 얻어 밖으로 드러난 것일까.
사실 뭐가 됐든 상관없다. 시어문드는 예전에도, 그리고 지금도 그의 주인에게 만족하고 있었으니.
'그러고 보면 할렌은 살라스님과 함께 가장 오래 따른 수하라고 했었지.'
할렌은 그 사실을 늘 자랑스럽게 여겼다. 티를 내는 일은 많지 않았으나, 그런 자부심이 있다는 것은 그를 조금만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아차릴 수 있었다.
'슬퍼하고 계십니까. 아니면 분노하고 계십니까.'
대장의 마음이 다른 곳에 가 있는 것은 좋지 않은 일이나, 잠깐 정도는 괜찮을 것이다. 또, 어차피 지금 당장 움직일 것은 아니기도 하고, 군터는 시어문드를 필두로 수하들이 앞으로의 일에 대해 논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시어문드의 추측대로, 그의 마음은 다른 곳에 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할렌의 죽음 때문이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면, 인간적인 정 때문이 아니라 할렌의 영혼을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이었다.
할렌을 잃는 것이 아쉬워 영혼을 거두었으나, 하렌의 영혼을 일반적인 영혼들처럼 다룰 수는 없다. 물론 그의 감옥에 있는 영혼들은 선별을 거친 특별한 것들이나 그것들 역시 몇 번 쓰다 사라진다는 점에서는 일반적인 망령들과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쓰기 위해 거둔 것이 아니다. 군터는 할렌의 영혼만큼은 특별하게 다루고 싶었다.
'영혼 자체에 손을 대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령술이라는 것은 죽음과 영혼을 다루지만, 영혼 자체에 인위적인 조작을 가하지는 못한다. 적어도 그가 알기로는 그랬다. 사령술에서 영혼을 다루는 것은 어디까지나 사용 방식의 문제지, 영혼 자체를 어찌하지는 못한다. 그것은 인간의 능력 밖이다.
영혼 자체에 손을 대는 것이 불가하다면 남는 것은 하나뿐.
'그릇.'
이제껏 그는 시체를 일으키는 데에 영혼을 사용해왔다. 일반적이며, 거의 유일한 방식이다. '유일한'이 아니라 거의 유일한'인 이유는, 옛이야기들을 다룬 고문서에 몇 가지가 적혀있는 것을 봤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말이 좋아 옛이야기지, 믿기 힘든 전설 같은 것들을 두루뭉술하게 적어놓은 것에 불과했다.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것들을 헛소리라고 여겼으나, 얼마 전에 생각이 바뀌었다. 모페이브의 고렘을 보고서였다.
물론 고렘에 핵이 깃들어있지는 않으나, 술법을 이용해 인위적으로 몸을 만든다는 점이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거기서 영감을 받아 보다 강력한 망자의 군대를 꾸릴 생각도 했었다.
'영혼을 중심으로, 손상되지 않는 육신을 만들 수 있다면.'
살점은 다 썩어버리고 뼈다귀만 남은 앙상한 몸뚱이가 아니라, 멀쩡한 인간의 육신보다 더 튼튼하고 강력한 몸을 마련할 수 있다면.
말도 안 되는 망상일 수도 있지만, 군터는 그 망상일 수도 있는 가능성에 계속해서 빠져들었다.
'어차피 지금 당장은 불가능한 일..
지금은 전시다. 적어도 흐르트리 파오의 군대를 완전히 박살낸 다음에야 궁리하는 뭘 하든 할 수 있을 터.
"이제 막 불이 붙은 겁니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이 자그마한 불은 산 하나를 송두리째 태워버릴 만큼 크게 번질 테지요. 우리는 그때를 기다렸다가 움직이면 됩니다."
군터는 시어문드가 차분한 말솜씨로 좌중을 휘어잡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
"빌어먹을! 벌레 같은 것들이 죽고 싶어서 안달이 난 모양이군!"
흐르트리 파오가 노성을 내질렀다. 귀족들과 고위 장교들이 모두 모인 회의 석상이었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그럴 겨를이 없었다. 조금 전에 세 개 도시에서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탓이었다. 세 개 도시라고 해도 그 규모가 변변찮은, 조금 큰 마을 정도에 불과했으나 그 셋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 문제였다. 이런 보고가 하루건너 하루꼴로 들려오고 있었다. 꼬리에 꼬리를 물듯, 줄지은 반란 소식에 그는 넌덜머리가 난 상태였다.
어려운 싸움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죽음까지 각오했다.
그런데 그렇게 비장하게 마음을 먹은 마당에 생각지도 않았던, 별 잡스러운 것들이 그의 발목을 잡고 늘어지고 있었다.
"장군. 이건 아무래도……"
"놈들이 손을 쓴 모양입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오."
처음에는 산발적인 저항에 불과했다. 그런데 어느 시점부터 갑작스레 반란의 규모와 반란이 일어나는 시기가 교묘해지기 시작했다. 무참히 짓밟아도 무방한 수준에서 조금 골치가 아픈 수준 정도로 변했다고 할까.
역시 큰 문제는 아니었다. 문제는 반란 자체가 아니라, 반란의 여파였다.
"보급로가 끊겼습니다."
"도적들이 급증하고 있습니다. 사실상 반란군과 도적의 구분이 힘들 지경입니다."
이게 문제였다. 급증한 도적, 반란군 때문에 보급에 차질이 생기는 것. 급한 대로 반란을 일으킨 마을이나 도시 등에서 이 물자를 챙기고는 있었지만 그런 주먹구구식으로는 이 거대한 군대를 유지하는 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것까지도 놈들의 의도대로인가?"
누군가 무심코 중얼거린 말. 그러나 누구도 그의 혼잣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부정하기에는 상황이 참 묘하게 됐으니까.
이 상황이 그저 우연에 우연이 겹쳐 만들어졌다고 생각하는 자가 있다면 그자는 얼간이일 것이다. 그런데 그런 얼간이는 적어도 이 자리에는 없었다. 모두가 확신하거나, 최소한 이상하다는 생각쯤은 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최악의 상황입니다."
나이 지긋한 귀족이 탄식했다.
그는 아직도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흐르트리 파오를 보며 말을 이었다.
"이런 상황에는, 상황에 맞는 결단이 필요한 법이지요."
"결단이라."
"이미 손에 피를 묻힌 마당입니다. 그 피가 조금 더 많아진다고 해서 달라질 것이 있겠습니까."
"말로 저들을 달래기는 이미 늦었습니다. 그렇다면 힘으로써 저들을 굴복시켜야 합니다. 두려움을 이용해서 말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소."
흐르트리 파오가 무거운 목소리로 답했다.
며칠 후, 반 바라눔 트라소프의 기치를 걸고 무장 항쟁하던 두 개 도시, 여덟 개 마을이 송두리째 사라졌다. 하늘을 맴도는 까마귀가 사흘 동안 밤낮으로 울어댔다.
그것은 진압이 아니라 학살이었다. 그곳에서 있었던 일은 날개라도 달린 것처럼 순식간에 퍼져나갔고, 많은 이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그자가 멍청한 짓, 아니 미친 짓을 저질렀군요."
시어문드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급한 나머지 마음을 독하게 먹은 것이겠으나, 최악의 자충수입니다. 이제 백성들은 저들을 정복자라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학살자로 여기겠지요. 이제 저들이 항복을 권한들, 누가 순순히 백기를 걸겠습니까? 흐르트리 파오는 제 한 목숨 어떻게든 건져보겠다고 제 주인의 손발에 사슬을 채운 셈입니다."
마지막 즈음에 가서는 숫제 비웃는 투였다.
"이 소식이 바라눔 트라소프에게 전해지면, 모르긴 몰라도 그는 흐르트리 파오를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다. 중요한 건 우리지."
군터가 시어문드의 말을 잘랐다.
"내 보기엔 지금이 적기 같은데."
"바로 보셨습니다. 이제 슬슬 움직여도 될 것 같습니다. 이번 일로 백성들이 적잖이 충격을 받았으니, 지금 우리가 움직이지 않는다면 그들은 다시 두려움에 사로잡혀 버릴 겁니다. 반면, 우리가 움직인다면 지금 느끼고 있는 두려움마저 분노로 승화시키겠지요."
"좋아. 싸움을 끝낼 때다."
그날, 군터 크렘보르는 흐르트리 파오와 그의 군대가 저지른 학살을 맹비난하며 군을 일으켰다. 그 소식은 학살 소식만큼이나 빠르게 퍼져, 곧 흐르트리 파오의 귀에도 들어갔다.
"노리고 있었군."
소식을 듣자마자 흐르트리 파오는 쓰게 웃었다.
아주 기다렸다는 듯 움직이니, 이건 모르는 체를 하려고 해도 할 수가 없었다.
"소집령을 내려라. 놈들이 온다."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병력이 집결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