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1화
자콥 트라소프와 바라눔 트라소프가 만들어낸 전란의 소용돌이는 수십, 수백만의 백성들을 휩쓸었다. 키파도 예외는 아니었는데, 어떤 면에서 전쟁의 영향은 키파의 시민들보다 키파 인근의 성이나 마을에 거주하는 백성들에게 더 크게 미쳤다. 잔카라스 데반은 백성들에게 물자를 징발했고, 병사들의 사기를 유지하기 위해 약탈을 허용했다. 일군을 이끄는 지휘관으로서 불가피한 결정이었겠지만, 그런 그의 결정은 당연하게도 백성들의 반감을 샀다.
하지만 백성들은 참았다. 힘이 없으니 참을 수밖에 없었다. 수만의 군대 앞에서 볼멘소리를 낼 수 있을 만큼 간이 큰 자는 세상을 다 뒤져도 많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잔카라스 데반이 키파에서 패퇴하고, 실각하여 흐르트리 파오가 지휘권을 넘겨받은 뒤로도 마찬가지였다. 키파 공성전에서 승리를 거둔 군터 크렘보르의 군대가 주변 지역으로 영향력을 뻗쳤을 때, 그들은 두려움에 떨며 숨죽여야 했던 시간이 드디어 끝난 줄로 알았다. 그렇기에 흐르트리 파오의 군대가 재진군을 하고, 군터 크렘보르의 군대가 각지에서 패퇴하였을 때 그들은 크게 낙담했다.
돌아온 정복군은 이전보다 더 가혹했다. 희망이 꺾인 백성들은 무자비한 탄압에 신음하며 지렁이처럼 꿈틀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절망했다. 그들의 유일한 희망은 키파로 물러난 군터 크렘보르의 군대가 다시 한번 승리하여 무자비한 정복자들을 몰아내는 것뿐이었다.
"놈들이 크게 패했다네!"
"흐르트리 파오가 군대도 내팽개치고 도망쳤다는군!"
실낱같은 희망. 그 희망이 현실이 되었을 때, 그들은 더 이상 숨죽이고 있지 않았다.
흐르트리 파오가 패퇴한 군대를 결집하고, 이전에 그랬듯 점령한 성과 마을에서 물자를 징발하려고 했을 때
"더는 못 참겠다!"
"키파의 군대가 오고 있소! 우리가 놈들과 맞선다면, 놈들은 오래 버티지 못하고 물러날 수밖에 없을 거요!"
용기 있는 한 마디. 누가 외쳤는지 모를 그 목소리에 그들은 현혹되었다. 그 이야기가 현실성이 있고 없고는 중요치 않았다. 그들이 그간 억눌러왔던 분노가 폭발하는 화산처럼 일어났다.
"머리에 똥만 찬 놈이 아닙니까? 이제껏 그렇게 가혹하게 굴어와 놓고, 다시 또 대대적으로 징발을 하면 민심이 가만히 있으리라 생각한 걸까요."
보리스의 헛웃음을 시어문드가 받았다.
"당연하게 여긴 게지요. 이제껏 그래왔으니, 지금도 마찬가지이리라 생각한 겁니다. 상황이 바뀌었다는 것을 모르는 거지요. 머리에 똥만 찼는지는 모르겠지만, 둔한 작자인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입가에 웃음이 걸린 것은 시어문드도 마찬가지였다. 처음 전술을 고안할 때 머릿속에 그렸던 가장 이상적인 그림이 현실로 이루어지고 있으니,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다만, 안심하기는 이릅니다."
"물론 적을 얕봐서는 안 되겠지요. 그러나 놈들이 당황해 있는 시기를 놓쳐서는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흐르트리 파오는 진창 속에 발을 담갔습니다. 그자는 의식하지 못하고 있을지도 모르지만…아마 쉬이 발을 뺄 수는 없을 겁니다. 필사적으로 발버둥을 칠 테고, 그러면 그럴수록 점점 힘이 빠지겠지요. 우리는 그때 나서면 됩니다. 굳이 아직 여력이 남아있는 적과 상대해줄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일부는 이해한 얼굴이었고, 일부는 아리송한 얼굴이었다.
"이번 전투에서 대패를 거둔 이상, 저들이 증원 없이 다시 키파를 도모한다는 것은 사실상 힘들어진 상황입니다.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한다면 기껏해야 일단 뒤로 물러난 뒤 정비를 마치고서 전선을 유지하는 정도겠지요."
"그렇겠지요."
"그러나 흐르트리 파오는 물러나지 못합니다. 이대로 물러나서 제가 말씀드린 최선을 행한다면, 그의 목이 무사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지요."
"아아."
그제야 아리송한 얼굴이었던 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어문드는 그들을 보며 내심 참 단순한 이들이라고 생각했다.
'나쁜 것은 아니지.'
엄밀히 말해 이 부분은 군사보다는 정치에 가깝다. 여기 있는 이들은 군사에는 익숙하나 정치에는 대부분 경험이 적고 서툴렀다.
"패장이 패전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이야 당연한 일입니다만, 흐르트리 파오에게는 전과가 있지요. 여기서 그가 패배한 채 뒤로 물러선다면 잔카라스 데반이 졌던 책임도 함께 짊어져야 할 겁니다. 흐르트리 파오는 그것을 알고 있지요."
"그러나…이런 상황에서 더 버텨봐야 결국 파국이라는 것을 그도 알고 있을 텐데요."
보리스가 그래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목이 걸렸다는 것은 알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일군의 명운을 책임지는 총사령관이 그토록 무책임할까 싶었던 것이다.
"알고 있겠지요. 알고 있을 테지만…설령 그가 대국적인 결단을 내린들 어쩔 수 없을 겁니다."
"어째서입니까."
"그를 후원하는 귀족들이 그가 물러서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테니까요."
***
"이대로 물러나셔서는 안 됩니다."
흐르트리 파오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눈을 뜨지도 않았다. 상석에 앉은 그는 회의 아닌 회의가 시작되고 처음부터 지금까지 줄곧 눈을 감은 채 침묵을 고수하고 있었다.
"우리가 이번에 크게 패하긴 했습니다만, 적도 적잖이 피해를 보았습니다. 아직도 병력은 우리가 크게 앞서고 있지요. 군대를 정비하고 태세를 바로잡는다면 다시 한번 승부를 겨뤄볼 만합니다."
흐르트리 파오도 두 가지에는 동의했다. 적도 적잖은 피해를 보았다는 것과 병력은 아직 이쪽이 앞선다는 것. 그러나 과연 군대를 정비한다고 해서 다시 일전을 벌일 수 있을까? 사기가 땅에 떨어지다 못해 아예 땅속으로 파고 들어가 버린 이 병사들로?
현실성이 떨어진다. 아직도 탈영병이 속출하고 있는 상황에, 대체 언제 정비를 하고 태세를 가다듬는단 말인가.
'기어이 키파를 다시 한번 칠것이라면…원군을 청하는 게 옳다.'
다만 그럴 경우, 그 군대를 지휘하는 것은 자신이 아닐 것이다.
'꼴이 우습게 되었구나.'
잔카라스 데반의 뒤를 이으면서 처음 생각했었던, 가장 안 좋은 결말이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왔다. 흐르트리 파오는 자신도 모르게 실소했다.
"장군?"
"아무것도 아니오."
눈을 떴다. 하나같이 어두운 얼굴을 한 이들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람은 여럿인데 마음은 똑같다.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넜음이야.'
자신도, 저들도, 이제는 돌이킬 수 없다.
잔카라스 데반을 몰아냈던 그 순간부터 그들을 기다리는 결말은 승리 아니면 죽음뿐이었으니, 이제 와서 발을 뺀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
"좋소. 어디 해봅시다."
이 한목숨을 건지기 위해서는 승리해야 한다. 그러나 만약 그럴 수 없다면 차라리 죽어야 한다. 그렇다면 가문이나마 살릴 수 있을 테니.
결연한 각오를 다진 흐르트리 파오였으나, 그의 단단한 마음은 곧 생각지도 않았던 시험과 맞닥뜨렸다.
"장군! 치오레에서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장군! 급보입니다! 핀저에서…!"
"장군!"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반란 소식. 그 대부분은 반란이라는 말을 붙이기도 우스운, 약간의 소란 정도에 불과했으나 그것만으로도 크게 거슬렸다. 중대한 일을 앞두고 몸을 깔끔히 하고 마음을 다스리는 와중에 생각지도 못하게 벌레에 물린 느낌이라고 할까.
"한번 패했다고 아주 우습게 보였나 보군."
솔직히, 다분히 감정적인 대응이었다. 아주 약간, 이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도 들긴 했으나 흐르트리 파오는 이성보다는 들끓는 감정 쪽에 손을 들어주었다.
"인정사정 봐주지 말고 진압해라. 다른 놈들이 똑똑히 보고서 다시는 허튼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분풀이가 필요했던 것은 병사들도 마찬가지였던 것일까. 흐르트리 파오가 강경 진압을 명하자, 그의 병사들은 다소 과할 정도로 충실하게 그 명에 따랐다. 피가 흘렀고, 대대적인 징발에 반발했던 자들의 목이 깃발 옆에 효수되었다.
그렇게 본보기를 보였으니 끝이라고 생각했다. 처음 깃발을 바꿔 걸 때 그랬듯, 힘과 두려움을 보여주었으니 그들의 반발도 곧 사그라질 것이라고.
너무나 안일한 생각이었다.
가라앉으리라 생각했던 불은 사그라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크게 타올랐다.
***
"중요한 건 민심을 잃는다는 거야. 어쩔 수 없이 억눌려 있던 백성들이 죽기 살기로 덤벼들기 시작하면 아무리 수만 대군이라 해도 피곤해질 수밖에 없지. 군대를 상대하는 것과 일반 촌민들을 상대하는 것은 느낌이 상당히 다르니까."
프란시스 티브리악의 말에 보리스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게 영향이 크겠습니까?"
"우선은 말했듯, 육체적으로나 심적으로나 지치게 될 테고…두 번째는 안 그래도 말이 아닐 군의 사기가 더욱 꺾이게 될 걸세."
"어째서입니까?"
"흐르트리 파오의 군대에는 여전히 투항병들이 남아있다더군. 졸지에 고향 사람들을 제 손으로 죽여야 하는 꼴이 되지 않았나. 그들이 동요한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닐 테지."
"아아."
"흐르트리 파오 역시 그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을 터. 어떤 식으로 손을 쓰겠지. 다른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강하게 밀어붙이든지, 그게 아니면…그들을 쳐내든지. 뭐가 되었든 썩 좋은 결과가 나오지는 않을 터."
"흐음."
보리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프란시스 티브리악에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꺾었다.
"왜 그러나?"
"마음이 편치 않군요. 얼마나 많은 백성이 죽어 나가겠습니까. 몇만, 아니 몇십만의 피가 흐를 테지요. 우리는 그 피를 거름 삼아 싸우려는 것 아닙니까."
"그걸 왜 자네가 신경을 쓰나?"
"예?"
"착하다는 말도 어울리지 않아. 자네는 참 순진하구만 그래."
"무슨 말씀이신지."
"자네 말대로일세. 백성들이 꽤 죽어 나가겠지. 그러나 그것을 왜 자네가 신경을 쓰는가? 어차피 자네의 백성들도 아니지 않나."
자신도 모르게 어색한 표정을 지어버렸을까. 보리스는 마땅히 답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 입을 꾹 다물었다.
같은 귀족이라고 해도, 태생부터 귀족인 프란시스 티브리악과 그는 여러 면에서 달랐다. 가끔 이런 사고방식의 차이를 접할 때마다 보리스는 생각이 많아지곤 했는데, 이번 역시 마찬가지였다.
'내 백성이 아니다? 틀린 말은 아니지.'
전장에 나와 있는 몸. 중요한 것은 피아의 구분과 냉철한 마음이지, 어정쩡한 자비가 아니다.
'아버지도 개의치 않으셨지 않은가.'
그의 아버지, 군터 크렘보르도 알고 있었을 터다. 수십만, 그 이상이 휩쓸리리란 것을.
"제가 너무 무른 것일까요."
보리스가 쓰게 웃으며 말했다.
"무르다? 아니. 나는 그보다, 말한 것처럼 순진하다고 표현하고 싶군. 전장에서는 승리, 더 나은 승리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아야 하네. 자네는 조금 더 비정해질 줄 알아야 할 것 같군. 눈앞의 적을 상대하는 것처럼 말이야."
"으음."
프란시스 티브리악의 조언에, 보리스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