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0화
할 수 있다는 확신은 없었다. 충동적인 결정이었고, 욕심의 발로였다.
그렇다. 욕심이다.
할렌은 능력 있고 충직한 수하다. 이런 수하를 얻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군터가 할렌을 그냥 보내줄 수 없었던 이유는 그런 것 때문이 아니었다. 솔직히 말하면, 그런 것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네놈이기 때문이다."
형체 없는 손이 육신을 떠나던 영혼을 움켜잡았다. 그의 의지가 영혼에 닿았을 때, 군터는 익숙함을 느꼈다. 할렌이라는 이름의 인간이 죽고, 몸뚱이는 식어가기 시작했으나 그의 일부이자 본질이었던 영혼에서 여전히 그의 존재를 느낄 수 있었다.
군터는 망자를 일으킬 때처럼 우악스럽게 힘을 쓰지 않았다. 할렌의 영혼이 망가지거나 다치지 않도록 최대한 집중했다.
본래 영혼을 수거(군터는 영혼을 거두는 것을 그렇게 표현하곤 했다.) 할 때는 크고 작은 반발이 있었다. 그래서 더 영혼을 우악스럽게 잡아채곤 했었는데, 할렌의 영혼은 그런 것이 일절 없었다. 죽기 직전 할렌이 죽은 이후에도 그를 따르겠노라고 맹세했기 때문이리라. 생전의 의식은 사라졌어도 그 의지는 일부라도 영혼에 남은 것이겠지.
'들어가라.'
영혼감옥의 사슬은 밝게 빛나는 영혼을 구속하지 않았다. 군터는 할렌의 영혼을 비록 그의 감옥에 들일 지언정, 죄수처럼 대하지 않았다.
군터는 할렌의 영혼을 영혼감옥 심처로 이끌었다. 육신에서 빠져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까닭인지, 영혼은 아직 불안정한 상태였다. 살아있는 인간으로 친다면 잠들어있다고 할까. 억지로 깨우려면 깨울 수 있지만, 군터는 그러지 않았다. 그는 되도록 할렌의 영혼에 손을 댈 생각이 없었다. 잠들어있다면 스스로 깰 때까지 기다릴 생각이었다.
아아아아!
할렌의 영혼을 깊숙한 곳에 안치하고 감옥의 문을 닫으려는데, 감옥에 갇힌 영혼들이 사납게 울부짖었다. 그들은 감옥에 갇힌 지 얼마 되지 않은 영혼들이었다. 키파에서의 전투 때 보유한 영혼을 전부 소모했기에 새로 영혼을 대거 거두었는데, 때문에 일부는 아직 완전히 굴복하지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굴복하지 않았다고 한들, 일단 감옥에 갇힌 그들이 군터의 통제를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했다.
[접근하지 마라.]
그들은 사슬에 묶인 죄수였고, 군터는 이 감옥의 주인이며 절대자였다. 그가 엄히 선포하니 반발하는 죄수들은 증오를 드러냈으나, 그게 전부였다. 납작 엎드려 벌벌 떠는 것외에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
군터는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가까이 다가왔던 그라모트가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군터가 할렌의 앞에 몸을 낮추고 있었던 것은 아주 잠깐이었다. 그 잠깐 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다른 이들은 그것을 알 수 없었다. 그들의 눈에는 그저 군터가 할렌을 아주 잠깐 살피다가 몸을 일으킨 것으로만 보였다.
"시신을 수습하라."
아직 슬픔을 다 삼키지도 못한, 아니 슬픔을 제대로 느끼지도 못한 그라모트에게 있어 그 한 마디는 너무도 차갑게 들렸다. 믿을 수 없다는 듯 흔들리는 눈이 이미 몸을 돌린 채 걸어가고 있는 군터의 등에 닿았다.
"형님."
우두커니 서 있던 그라모트는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다가온 로우렌이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고생하셨소."
"너……"
"생각이 많겠지만, 일단은 쉬시오. 지금 형님 몰골이 어떤지 압니까? 곧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란 말이오."
그라모트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동생의 걱정 가득한 목소리 때문은 아니었다. 부친의 시신이 병사들의 손에 조심스럽게 들려 사라지고 나니 이 자리를 지키고 있을 이유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
전투는 끝났으나 그들의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적의 대장 흐르트리 파오는 무사히 목을 건사하여 도주했고, 그의 군대 역시 큰 타격을 입었을지언정 아직 그 세가 무시할 수 없을 정도다. 물론 사기가 바닥까지 떨어졌을 테니 당장 무언가를 도모하지는 못할 테지만………
"아군의 피해도 적지 않습니다. 당장 추격하는 것은 어려울뿐더러, 그럴 이유도 없지요."
시어문드의 담담한 목소리가 조용한 막사를 채웠다.
기이한 분위기였다. 분명 대승을 거뒀음에도 좌중의 분위기는 대패라도 한 것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멍청한 놈."
아드리안이 작게 중얼거렸다. 본인도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나온 혼잣말이었을 테지만, 막사 안이 워낙 조용했던 탓에 그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이는 없었다.
그러나 아무도 아드리안을 나무라지 않았다. 탓하는 듯한 말이 짙은 씁쓸함과 슬픔을 담고 있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리고, 타박을 할 자격이 있는 유일한 이가 조용히 있는데, 그들이 나서서 입을 열 수는 없었다.
군터는 할렌의 영혼을 거둔 것에 대해 이야기해야 할지를 고민했다. 그러나 결국 이야기하지 않기로 결정했는데, 아직까지도 그의 수하 중에는 그가 사령술을 쓰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이들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죽은 동료의 영혼이 본래 갔어야 할 곳에 가지 못하고 사령술에 의해 붙들려 있다는 것을 알면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긴 힘들 터였다. 아무리 그것이 본인의 허락 하에 이루어진 일이라고 해도 말이다.
군터는 거듭 생각해 보았지만 역시 말을 하더라도 나중에, 그것도 믿을만한 측근들에게나 털어놓을 일이지 공개적으로 드러낼 사안은 아니라고 결론내렸다.
"할렌은 큰 공을 세웠습니다. 그가 적의 군량을 상당수 태워준 덕에…계획대로 일이 흘러갈수 있을 듯합니다."
시어문드는 최대한 정제된 말투로 할렌을 추켜세웠다. 하지만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죽은 자의 명예를 드높인들…
"할렌의 공에 대한 보상은 그의 남겨진 자식들에게 내리겠다."
그나마 그의 자식들이 군에 있다는 것이 위안거리라면 위안거리였다. 믿음직스러웠던 동료를 잃은 슬픔을, 그 자식들에 대한 후의로 조금이나마 덜 수 있을 테니..
***
"그분께서 아버지를 바라보신 것은 아주 잠깐이었다."
"그랬겠지."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으셨다."
"그랬을 거요."
한쪽은 격정에 차서 한탄을 하고, 한쪽은 덤덤함을 넘어 심드렁한 태도로 고개만 까딱였다. 감정을 쏟아내던 그라모트는 동생의 성의 없는 반응에 화가 나 버럭 소리쳤다.
"넌 어찌 그리 태연하단 말이냐! 아버지는 그분을 위해 평생을 바치셨다. 그런데도……"
"강에 불이 붙지 않는다고 탓할 이유가 뭐가 있소? 강이란 본래 그런 것인데."
"뭐라?"
"크렘보르 장군은 원래 그런 분이셨소. 다만 형님은 모르고 있었던 게지."
그라모트는 동생의 조소 섞인 말에 순간적으로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말문이 막혀 입만 달싹이던 그는 결국 다시 잔을 들었다. 독한 술이 가득 담긴 잔을 단번에 비워버린 그라모트는 주향이 가득 섞인 한숨을 길게 토해냈다.
"난…아버지와 장군 사이에는 무언가 특별한 관계가 있다고 생각했었다. 아버지가 장군께 바치는 맹목적인 충성도 그렇게 이해했었지. 하지만 그건 내 착각이었을까? 그 대가를 바라지 않았던 충성은, 그저 아버지 쪽에서 바치는 일방적인 헌신이었던 걸까?"
"그랬을지도 모르지. 아버지는 늘 크렘보르 장군의 은혜에 대해서 이야기 하시곤 했으니까."
"은혜, 은혜라."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들어서 잘 알고 있다. 고향 땅에서 도망쳐나온 조모와 부친을 크렘보르 장군이 구해주었고, 막하로 거두어주기까지 했다고. 뿐만 아니라 모친과의 인연 역시 크렘보르 장군과 작고하신 마님께서 맺어주신 것이라고 말이다. 어찌 보면 부친의 인생은 크렘보르 장군을 만나기 전과 후로 나뉘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 비중은 당연히 후자가 압도적으로 크고.
"은혜라는 이름의 빚을 졌다고 생각하셨을지도 모르지. 그리고 채무 관계라는 것은 아주 담백하오. 속을 태우는 것은 빚쟁이뿐이지. 빌려준 자는 빚쟁이가 빚을 갚기 위해 어찌 몸부림을 치는 알 바 아니고."
"비참하군."
"비참하지. 아버지는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이었소."
"함부로 입을 놀리지 마라."
그라모트의 목소리에 단번에 날이 섰다. 그에 로우렌이 쓰게 웃었다.
"오늘만 좀 봐주시오. 내색하지 않으려 최대한 참고 있소만, 내 속도 말이 아니거든."
그라모트의 눈에서 한순간에 독기가 사라졌다.
안다. 어찌 모를까. 애써 평소의 모습을 잃지 않으려는 동생의 속이, 어쩌면 자신 못지않게 시커멓게 타들어갔음을.
"아버지가 대공을 세웠다는군. 상이 내려질 거라던데."
"관심없다."
"어째서 관심이 없소. 아버지의 공이지만, 형님의 공이기도 한데."
"아버지의 목숨을 팔아 세운 공 같아서다. 그리고…내가 한 일이라고는 추하게 도망쳐서 원군을 구걸한 것밖에 없어."
"자기 비하는 하지 마시오. 형님은 형님이 할 수 있었던 최선을 다했을 뿐이니까."
"그게 내 최선이었다면 더더욱 비참하구나. 어쩌면 난 마지막까지 아버지에게 짐만 됐었던 것일지 몰라."
젖
로우렌은 계속해서 더 깊은 우울 속으로 빠져드는 형을 보며 혀를 찼다. 늘 활기차고 강했던 형의 모습이 때때로 보기 싫었지만, 이렇게 힘이 빠져 있는 꼴은 더 보기 싫었다.
하지만 남을 비꼬는 재주는 있어도 달래는 재주는 없는 로우렌이었기에, 형에게 해줄 마땅한 말을 찾지 못한 채 잔을 들었다. 슬픔을 덜어줄 수 없다면 술잔이라도 부딪쳐주는 것이 낫겠다 싶었다.
"여기들 있었느냐."
형제의 조용한 술자리에 불청객이 찾아온 것은 두 사람의 술잔이 이제 막 세 번째 부딪쳤을 때였다. 그라모트는 천막을 들추고 들어온 이를 보자마자 벌떡 일어섰고, 로우렌은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공자님. 어찌……"
"울적해하고 있을 것 같아서, 자리나 같이 해주려고 말이다."
보리스는 엉망이 된 그라모트의 얼굴을 보고는 나직이 한숨쉬며 앉으라고 손짓했다. 그라모트와 로우렌이다시 자리에 앉자, 보리스는 그들 사이에 끼어 앉았다. 상석을 내어주려는 그라모트를 제지하면서 말이다.
"슬픔이 크겠지. 그 심정을 일부나마 짐작한다."
"태어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할렌님은 늘 내게 영향을 미쳤다. 나는 그분을 대부님처럼 따랐지. 늘 그분을 존경했었고, 가족처럼 여겼었다."
보리스의 말이 이어질수록 그라모트의 고개는 아래로 내려갔다. 소리내어 울지는 않았으나 눈물이 한 방울씩 뚝뚝 떨어졌다.
반면, 로우렌은 그답지 않게 입을 꾹 다물고 묵묵히 보리스의 이야기를 들었다. 다만 간간이 벌린 입에서는 소리없는 긴 한숨이 새어나왔다.
"무슨 말도 위로가 되지는 않겠지. 하지만 너무 오래 슬픔에 취해있지는 말아라. 이건 명령도, 충고도 아니야. 부탁이다. 말했듯이 난 할렌님을 대부님으로 여겼었다. 너희는 내 형제나 다름없어. 대부님을 잃은 슬픔도 크지만, 형제가 울적함에 젖어 있는 것을 보는 것도 슬프기는 마찬가지다. 감히 짐작하자면, 할렌님도 너희가 힘을 잃고 있는 것을 원치는 않으실 게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