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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749화 (749/1,064)

749화

"장군! 아버지를 구해주십시오!"

군터는 피투성이가 되어 나타난 그라모트를 바라보았다. 온몸이 상처투성이였지만, 처절함을 자아내는 것은 피륙의 상처가 아니라 그의 흔들리는 눈이었다.

떨리고 있는 눈에 두려움이 가득했다. 전투가 시작되기 전,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만 해도 흔들림 없이 굳건했던 두 눈이 이제는 두려운 것을 앞둔 겁쟁이처럼 떨리고 있었다.

군터는 그 두려움의 이유를 알아차렸다. 그것은 분명, 부친인 할렌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을 것이다.

"할렌은?"

"여섯 번째 군량고를 태우고 적에게 포위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원군을 청하라시며 저를……"

시기가 안 좋게 겹쳤다. 본래 계획대로라면 후방 군량고를 치다가 적당히 빠져야 했는데, 적의 퇴각 시기와 맞물리면서 적진 한복판에 고립되고 만 것이다.

'원군이라.'

군터는 말에 절박하게 외치는 그라모트를 뒤로 하고 말에 올랐다. 얼마 쉬지도 못한 말이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며 투레질을 쳤지만, 그게 다였다. 말 못하는 짐승이지만 괜한 반항은 끔찍한 고통을 불러온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장군."

"넌 남아라. 아드리안. 이곳에 남아 상황을 수습하다가, 시어문드가 오면 그쪽으로 합류해라."

"예. 헌데, 병사는 얼마나……"

크게 승리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피해가 없을 수는 없었다. 고작해야 천 오백 남짓 남은 병력을 둘로 나눈다면.

"오백이면 족하다."

"그것으로 되겠습니까."

"충분해."

뒤에서 대화에 끼지 못하고 있던 그라모트가 할 말이 많아 보였지만, 군터는 끝내 상태가 괜찮은 병사 오백을 거느리고 퇴각하는 적군의 한복판으로 향했다.

***

"하아…하아…"

절망? 그런 것은 이미 한참 전에 넘었다. 이제는 체념이다. 덜덜 떨리는 손에서 아직도 창칼을 놓지 못하는 것은 마지막 남은 오기. 그리고 자존심 때문이고, 깃발은 버린 지 오래다. 빠르게 결단을 내린 덕에 그나마 지금까지 숨이 붙어있을 수 있었다. 어설프게 자존심을 지키겠다고 끝까지 깃발을 들고 있었다면 도망치는 와중에도 공적에 눈이 돌아간 적들에게 진즉 둘러싸여서 비참하게 목이 달아났을 것이다.

적들의 틈에 섞여 들어가 위장 전술을 써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게 온갖 발악을 했음에도, 결국 최후의 순간은 다가왔다.

"이게 다 대장 때문이요."

"음?"

"그 머리가 너무 눈에 띄어서 그런 거 아니겠소."

할렌은 수하의 핀잔에 피식 웃었다. 일리 있는 말 같았다. 백발을 휘날리면서 창을 휘두르고 다니면, 아무래도 너무 눈에 띄기는 한다. 지금의 이 상황도 필시 먼발치에서나마 그를 보았던 적 때문에……

피잉!

잠깐의 상념도 허락하지 않는 건가. 할렌은 머리로 날아든 화살을 가볍게 피해낸 후 창을 고쳐 잡았다.

"열여섯인가."

"대장까지 치면 일곱이지."

"적어도 셋씩은 데려가야 먼저 가있는 녀석들에게 면이 서지 않겠나."

"대장은 대장이니까 여섯 데려가쇼."

"그러지."

시원하게 답했지만, 과연 가능할까 싶었다.

평소 같았으면 그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감 하나만은 놓지 않았겠으나, 지금 그의 몸 상태는 전에 없이 최악이었다. 살과 근육은 뼈에 달라붙기라도 한 것처럼 메말랐고, 숨을 쉴 때마다 목구멍과 코가 불에 타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그런 가운데서도 창을 쥘 수 있고, 말 위에서 버틸 수 있는 것은 얼마 남지 않은 생기를 계속해서 태우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할렌은 느끼고 있었다. 이제는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더 태울 수 있는 것이 없어지는 순간, 그의 육신은 생명과 함께 무너지리라.

얼마 남지 않았다. 그렇기에 이렇게 가만히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 아까웠다. 마지막 그 순간까지 원없이 날뛰어야 하지 않겠나.

"너희 덕분에 꽤 즐거웠다."

"조금 더 말랑말랑한 말을 기대했는데 말이지."

존대도 없다. 그들은 이미 아주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있었다. 할렌은 크게 웃으며 말을 달렸다. 겁먹은 말이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려 했으나 끝내 주인의 뜻을 거스르지 못하고 힘차게 내달렸다. 하지만 얼마 남지 않은 힘을 쥐어 짜내는 것은 사람이나 말이나 마찬가지였는지, 그 속도는 그리 빠르지 않았다.

문득,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바뀌었다.

타고 있는 갈색 말은 흑마로 바뀌었고, 눈앞에 보이는 적들도 잘 차려입은 정규군이 아니라 가죽과 갑옷을 반씩 걸쳐 입은 야인들로 바뀌었다.

할렌은 그들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어찌 못 알아보겠는가. 그들은 바로 그의 동족인 것을.

창을 피하고 창을 찔렀다. 몸으로 밀고 들어오는 적을 밀쳐내고 이가 나간 칼로 목을 쑤셨다. 그들이 외치는 소리, 병장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전부 환청처럼 메아리쳤다.

푹!

어디선가 날아든 화살을 팔을 들어 막았다. 그는 팔뚝에 살짝 파고든 화살을 즉시 뽑아냈는데, 피와 살점이 묻은 화살을 뽑아내며 잠깐 멈칫했다.

해골처럼 마르고 갈라져야 했을 손가락이 제법 뽀송뽀송했다.

기이함을 느낄 새도 없이, 할렌은 깨달았다. 자신은 지금 처음 전장에 나선 열여섯 꼬맹이라는 것을.

'그렇다면.'

눈앞에 달려드는 적도 보지 못한 채, 할렌은 연신 고개를 돌렸다. 이곳이 그날의 그곳이라면, 분명……

푸욱!

뜨거운 피가 머리 위로 쏟아졌다. 할렌은 몸뚱이에서 떨어져 나간 머리가 그의 머리 위로 날아가며 떨어진 것임을 조금 늦게 깨달았다. 하지만 그런 것은 중요치 않았다.

"뭐 하고 있는 거냐."

쏟아지는 핏물 속에서, 그는 그때의 목소리를 들었다. 퍼뜩 고개를 드니, 무심하게 가라앉은 두 눈이 보였다.

"…죄송합니다."

그때와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 아니, 어쩌면 그때보다는 조금 더 목소리에 힘이 빠져있었을까.

***

살벌한 전장의 한복판, 그를 따라온 오백…에서 조금 줄어든 병사들이 주변의 적들과 혈전을 벌이는 와중에도, 군터는 산책이라도 나온 듯 가만히 멈춰 있었다.

"…죄송합니다."

할렌은 쓰러진 말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발견하자마자 전속력으로 달려들지 않았다면, 지금쯤 저 볼품없는 칼에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군터는 할렌에게서 눈을 떼고 주변을 살폈다. 어디를 보아도 다른 생존자는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

그라모트가 말에서 뛰어내리고 할렌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부친을 두 걸음 앞두고 벽에 부딪히기라도 한 것처럼 멈춰 섰는데, 그 역시 알아차린 듯했다.

'생기가 꺼져간다.'

조금씩 흔들리는 백발은 다 타고 남은 재 같았다. 뼈 위에 가죽을 붙여놓은 것 같은 마른 몸은 시체와 다르지 않았다. 두 눈에 흐릿하게 떠오른 빛이 아니었다면, 누구라도 그를 살아있는 사람으로 보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원한 것이었다."

할렌은 눈물 흘리는 아들에게 담담히 말했다.

그는 아들의 눈물을 이해했다. 그 눈물에 담긴 슬픔도, 원망도 이해했다. 다른 이들의 눈에 자신은 미치광일지도 모른다. 하지만…뭐 어떤가. 누군가의 이해를 바라면서 사는 것은 피곤한 일이다. 남의 이해를 갈구하느라 정작 자신의 바람을 추구하지 못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고,

"장군."

시야가 흐릿해져 갔다. 바로 앞에 서 있는 아들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었고, 그 뒤에 있는 그의 모습은 그림자처럼 변해 형체만을 알아볼 수 있었다.

"말해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초조해졌으나, 그것도 이 덤덤한 목소리를 듣자마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늘 그랬다. 처음에는 두려웠고, 이후에는 껄끄러웠으며, 언젠가부터는 익숙하고 믿음직스러웠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흔들림 없는 저 목소리에서 위안을 얻곤 했다.

"저는 여기까지입니다."

다 말라버린 몸을 위태롭게 지탱하던 무릎이 꺾였다.

***

"이랴!"

마지막으로 이렇게 다급해졌던 것이 언제였을까. 아마 머리가 좀 트이기 전이었을 것이다.

'그래. 그때가 마지막이다.'

형과 함께 아버지 밑에서 가혹한 훈련을 받던 시절, 몸이 너무 고되었던 탓에 경계 임무를 나갔다가 그대로 곯아떨어지고 말았다. 덕분에 교대하러 가야 할 시기를 놓쳐버렸고, 후에 잔뜩 화가 난 아버지가……

'젠장. 아직도 그때 생각만 하면 몸서리가 쳐지는구만.'

사람은 각자 타고난 재주와 그릇이라는 게 있는 법이다. 몸 쓰는 일과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을 억지로 굴려 봐야 성과는 나오지 않는다는 거다. 하지만 인정사정없는 아버지는 그런 것 따위는 고려하지 않았다. 물론 그때의 자신은…여러모로 한심하기는 했지만,

'우리 부자 사이가 원만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이렇게 인사다운 인사 한마디도 없이 끝내는 건 조금 그렇지 않습니까.'

아무리 무심한 척해도 어쩔 수 없는 혈육이다. 로우렌은 열심히 달리고 있는 말을 계속 닦달했다. 그리고 말이 혀를 빼물 즈음, 북적거리는 다른 곳에 비해 유난히 조용한 곳을 찾을 수 있었다.

이백 정도 되어 보이는 병사들이 어느 한 지점을 둘러싸고 있었다. 그리고 그중 한 병사는 대장기를 들고 있었고,

"이랴!"

한계에 다다른 말을 채근하고 또 채근하여, 로우렌은 마침내 인의 장막을 비집고 들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보았다. 쓰러져 있는 부친과 그 옆에 주저앉아 질질짜고 있는 형을.

***

이상한 기분이었다.

가슴 한복판에 구멍이 뚫리고, 그 구멍을 바람이 오가는 느낌.

그러나 그 바람은 시원하지도, 따갑지도 않았다. 있어야 할 것이 없어진 것처럼, 쓸쓸함을 닮은 알 수 없는 감정이 조금씩 가슴을 두들겼다.

감정. 감정이라.

군터는 할렌과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

할렌과 그의 어미를 구했던 것은 같은 처지의 동족에 대한 얄팍한 동정심 때문이었다. 그때는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돌이켜 보니 동정심이 맞았다.

딱 그 정도였다. 당장 살려주기는 하지만, 그 이후의 일 따위는 안중에 없었다.

그랬던 마음을 바꾼 것은 그 어린 꼬마의 독기어린 눈. 군터는 그 눈에서 과거의 자신을 보았다.

변덕.

그가 자신을 닮은 꼬마를 거둔 것은 어디까지나 가벼운 변덕 때문이었다. 당시의 그는 독기 가득한 꼬마를 거두면서도 별다른 기대는 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그 꼬마는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부딪치고 깨지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아등바등 기어 올라왔다. 그리고 끝내 자신의 옆자리를 차지했다.

"제 삶은…장군을 만난 그날부터 바뀌었습니다. 아니, 그날부터 제 삶이 시작됐다고 하는 게 좋겠지요."

억지로 뱉는 말은 가느다란 숨소리에 섞여 흘러나왔다. 그 목소리를 제대로 듣기 위해, 군터는 말에서 내려 할렌의 옆까지 다가갔다. 그는 주춤거리며 비켜서는 그라모트를 지나, 할렌의 앞에서 한쪽 무릎을 굽혔다.

"처음엔 저와 어머니를 구해주신 은혜를 갚기 위해서였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아니었습니다. 그저 장군의 뒤를 쫓는 것이 좋았습니다. 그 외에 다른 것은 생각할 수 없었지요."

두 눈에 희미하게 머물러 있던 빛조차 거의 사라졌다. 읊조리는 할렌의 말은, 이제 지척에 있는 그라모트조차 들을 수 없었다.

"장군. 어떠셨습니까."

"제가 장군의 수하로서, 그래도 괜찮았습니까?"

점점 작아지는 그 물음을 들은 순간. 군터는 그의 가슴에 난 구멍이, 바람이 더 커졌음을 느꼈다.

"그 누구보다도."

부서질 듯 마른 얼굴이 아주 조금 꿈틀거렸다. 만족스러웠을까. 웃고 있는 것일까.

군터는 할렌이라는 인간을 붙들고 있던 기운이 이제 거의 다 사라졌음을 느꼈다.

이제 곧, 할렌은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할렌이었던 육신만이 남겠지.

"나를 따르겠느냐."

충동적이었다. 공허한 바람이 등을 떠민 것일지도 모른다.

"저는 언제나 장군을 따랐습니다."

"너는 곧 죽는다. 난 네게…죽은 이후에도 나를 따를 것인지를 물은 것이다."

"…그럴 수만 있다면, 당연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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