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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748화 (748/1,064)

748화

'기분 나쁜 놈이로군.'

코르디 틸레노어는 간단히 몇 마디를 나누자마자 달려드는 적장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상대의, 품위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무례함 때문만은 아니었다. 고지식한 어떤 이들은 그런 것을 중히 여길지도 모르지만, 그는 아니었다. 명문 귀족 가문 출신임에도 그는 그런 허례허식에 구애받지 않았다.

그가 눈살을 찌푸린 것은 상대의 머리카락을 눈여겨본 탓이었다. 전장에 나설 정도로 정정한 사내의 머리카락이 나이 지긋한 노인처럼 하얗게 색이 바래는 것은 결코 일반적인 일이 아니었으니까.

'색이 빠지고 있지 않은가.'

그는 상대의 몇 안 되는 검은 머리카락이 점점 희어지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것을 보며 그가 술법적인 무언가를, 그중에서도 금술이라 불리는 여러 가지를 떠올린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불길한 놈이다.'

그는 덤벼드는 적을 응시하며 뒤로 물러났다. 호위병들이 앞을 가로막고, 뒤편의 병사들이 앞으로 나섰다.

"응전하라! 무리할 필요 없다! 우리가 버티기만 하면 놈들은 끝장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사방에서 아군이 몰려오고 있다. 적은 아군 진영의 한복판에 고립되었으니, 시간을 끌기만 하면 자연히 괴멸될 것이다.

군량고를 사수하며 버티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코르디 틸레노어는 그것이 손쉬운 일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며 여유로웠던 그의 표정은 점점, 빠르게 굳어졌다. 응전하기 위해 나섰던 그의 병사들이 오래지 않아 밀리기 시작하더니, 대열까지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방패병! 물러나지 마라! 궁병대! 뭘 망설이나! 당장 쏴!"

정면으로 적과 맞부딪치고 있는 상황에서 무슨 대단한 전략 전술 같은 것을 쓸 수 있을까. 설령 그럴 수 있는 명장이 있다 하더라도, 그게 코르디 틸레노어는 아니었다. 그는 침착하고, 상황판단에 능했으나 불세출의 명장 같은 결코 아니었다. 그는 병사들에게, 그들을 지휘하고 있는 장교들에게 쉴새 없이 외쳐댔으나 그의 목소리는 제대로 닿지 않았다.

와아아아-!

의미 없는 함성들이 많은 목소리를 묻었다. 코르디 틸레노어가 아무리 애타게 외쳐보아도, 그의 목소리는 바로 옆에 있는 그의 종자와 호위 무관 외에 다른 이들에게 들리지 않았다.

퍼억!

할렌은 어느 순간부터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목소리 대신 행동으로 군을 이끌었다. 그는 돌격해오는 기병의 창을 피하고, 어깨로 그의 가슴을 들이받았다. 충격에 몸이 흔들렸지만 두 다리로 말의 등을 조이며 굳건히 버텼다. 반면 그러지 못한 적 기병은 낙마할 것처럼 크게 뒤로 튕겼는데, 할렌은 그를 마저 처리하지 않고 다시 속도를 높였다. 그의 처리는 그의 뒤를 바짝 따르던 그라모트의 몫이었다.

서걱!

다급히 상체를 세우려던 적병의 목이 깔끔하게 잘려나갔다. 그라모트는 쏟아지는 핏물을 맞으며 부친의 뒤를 따랐다.

"위험합니다!"

그의 다급한 외침은 좌측에서 날아드는 가느다란 선을 발견함과 동시에 터져 나왔다. 그러나 그가 외쳤을 때는, 할렌이 이미 몸을 앞으로 숙이며 화살을 피한 뒤였다.

'어떻게…'

보지도 않았다. 아마 들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가볍게 화살을 피하는 부친을 보며 그라모트는 상황도 잊고 순수히 감탄했다.

'대단하다.'

부친에 대한 걱정도 이 순간만큼은 잊었다. 부친의 피를 진하게 이은 그라모트는 군인이었으며, 그 전에 무인이었다. 그런 만큼 그는 부친이 보이는 무공에 감탄했고, 매료되었다.

그라모트는 단단하게 뭉친 적을 손쉽게 돌파하는 부친을 보며, 그 어떤 적이라도 그를 막아설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그의 생각은 아직은 틀리지 않았다.

콰앙!

창과 방패가 부딪쳤다. 단단히 고정된 방패에 창이 부딪친다면 보통은 창이 튕기거나 부러지기 마련일 텐데, 이번엔 달랐다. 이를 악물고 버티던 방패병이 방패와 함께 나가떨어졌고, 창을 내지른 할렌은 흔들림이 없었다. 그는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새로 생긴 틈을 파고들었다.

푹!

막 적진으로 파고들던 할렌에게 두 자루 창이 양옆에서 찔러왔다. 하나는 할렌의 창에 막혔으나, 한 자루는 그의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아버지!"

그라모트가 다급히 외쳤다. 그의 눈에는 할렌이 금방이라도 비틀거리며 쓰러질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할렌은 쓰러지지도, 비틀거리지도 않았다. 그는 침착하게 몸을 빼내며 허리춤의 칼을 뽑아 들어 창대를 베고, 적병을 찔렀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말을 달렸다. 옆구리에서 덜렁거리는 나무토막만 아니었다면 누구도 그가 옆구리에 창상을 입었다고는 생각지 못할 터였다.

'안돼.'

그라모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지 않았다. 그 대신, 끌어 오르는 화를 다스리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 참기 힘든 화는 그 자신을 향한 것이었다.

'얼간이 자식! 대체 뭘 하는 거냐!'

부친을 지키겠다고 맹세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엄한 곳에 한 눈이 팔려서는……

챙!

또 하나. 그라모트는 할렌을 향해 쇄도하던 적을 막아섰다. 칼과 칼이 연달아 네 번 부딪쳤고, 힘에서 밀린 상대가 잠시 틈을 보였을 때 그라모트는 득달같이 몸을 들이밀었다. 할렌의 피를 이은 데다, 어려서부터 부족함 없이 먹고 자란 그는 보리스를 제외하고는 또래에게 힘에서 밀려본 적이 없었다.

퍽!

그런 그가 온 힘을 다해 밀치니, 상대는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다. 그라모트는 그때를 놓치지 않고 칼을 휘둘렀다.

"하아…하아……"

핏물이 이미 붉게 물든 얼굴을 다시 한번 적시는 핏물이 만족스러웠다.

"쓸데없는 짓 마라!"

"예!"

이 시끄러운 와중에도 이상할 만큼 선명하게 들리는 부친의 핀잔이 그 만족스러움을 더 크게 키웠다.

몸 여기저기에 상처가 늘어나고 통증이 늘어날수록, 그라모트는 성취감에 젖어갔다. 그 성취감이, 그 만족스러움이 그를 주저앉게 하려는 모든 부정적인 감각을 억눌렀다.

"허억…허억……"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부친의 바로 옆에 있었다. 말목에 기대다시피 몸을 숙인 채 숨을 헐떡거리던 그는 그와 달리 꼿꼿이 허리를 세우고 있는 부친을 바라보았다.

할렌은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는 호위병들 뒤에 숨어, 아들놈과 비슷하게 헐떡거리고 있는 적장을 보았다.

"너…이름이 뭐냐."

"여기까지 와서도 이름 타령인가."

대단한 고집 아닌가. 할렌은 픽 웃었다. 그런 그와 달리, 적장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턱 근육이 선명하게 보일 정도로 이를 꽉 깨물고 있는데도 피가 새어나오지 않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이름이 무슨 소용인가. 어차피 다 묻혀 사라질 것인데."

"내가 무명잡배에게 당했다고 믿고 싶지 않다."

"미련한 놈. 무명잡배이면 또 어떻단 말이냐."

전장의 창칼은 귀족과 평민을 가리지 않는다. 이름 있는 자들이 징집병의 칼에 목이 달아나는 경우가 얼마나 흔한가. 무명잡배에게 죽고 싶지 않았다면 필사적으로 발버둥이라도 쳤어야지.

"내가 …!"

퍼억!

또 시끄럽게 주절주절 떠들어댈 기세라, 할렌은 그가 다시 입을 열자마자 냅다 창을 던졌다. 화살처럼 빠르게 날아간 그의 창은 정확하게 적장의 머리를 꿰뚫었다. 그의 앞을 가로막고 있던 호위병들은 반응도 하지 못했다. 계속된 전투로 지친 탓이었다.

"이놈!"

예상치도 못하게, 한순간에 상관을 잃어버린 그들이 분노하며 달려들었으나 할렌은 혼자가 아니었다.

"패잔병들은 패잔병답게 납작 엎드리면 된다!"

할렌의 뒤편에서 승리를 직감하고 있던 병사들이 달려들어 그들을 제압했다. 할렌은 하나하나 쓰러져가는 그들을 보고 있다가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불을 질러라."

곧 네 번째 검은 연기가 치솟았다. 할렌은 삽시간에 번져가는 불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지금도 포위망은 좁혀오고 있다. 당장 수천 병력이 다시 그들의 앞을 가로막아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이동한다."

미끄러지려는 창을 고쳐 잡고 몸을 돌리던 중. 할렌은 지친 몸을 억지로 일으켜 세우는 아들을 보았다.

작게 입술이 달싹거렸지만, 끝내 그는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고, 앞으로 어찌 될지도 뻔히 보였다. 그걸 알면서도 허락한 것은 아들의 의지가 그만큼 강했기 때문이다.

'일이 어찌 되더라도, 내 너 하나만은……

할렌은 조용히, 또 하나의 각오를 다졌다.

***

언젠가부터, 똘똘 뭉친 수십 명의 적을 돌파하는 것은 군터에게 있어 쉽고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 그는 그의 적들과 다른 시간 속에서 움직였다.

물론 그렇다 한들 모든 창칼을 피할 수는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자잘한 상처들이 생기고, 더러는 제법 깊다고 할 만한 상처도 하나둘씩 그의 몸에 새겨졌다.

하지만 그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피는 그의 창에 묻은 피와 비할 바가 아니었다.

열…스물…서른…

검은 창과 그의 몸을 휘감은 사기는 점점 짙어졌다. 그 짙은 죽음의 잔재는 곧 그의 힘이 되었고, 군터는 차오르는 힘을 아낌없이 휘둘렀다.

그어어~!

때때로, 그가 의도한 바가 아니었음에도 그의 창에 찔리고 베인 시체가 일어나 그의 적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충만한 사기가 시신의 잔혼과 얽혀 사령술 비슷한 효과를 낸 것이다.

"장군! 저기 적장이 있습니다!"

아드리안이 외쳤으나, 쓸데없는 짓이었다. 군터는 전투가 시작되기 전부터 단 한 순간도 적장을 주시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웃기는 놈.'

처음에는 선봉에라도 설 것처럼 앞에 있더니, 전투가 시작되고부터 조금씩 뒤로 물러나고 있다. 총사령관이 몸조심하는 것이야 이상할 것이 없고, 오히려 당연한 일이지만 저놈이 우습게 느껴지는 것은 눈치를 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조금씩 물러서는 모습 때문이었다.

'겁은 나지만, 욕심도 난다 이건가.'

흔한 일이다. 다만 수만 대군을 이끄는 자가 저렇게 흔들린다는 건…

군터는 중갑을 뚫고 흉부를 깊게 관통한 창을 빼냈다. 끔찍한 몰골이 되어서도 아직 숨을 헐떡거리던 적 병사의 머리 위로 무자비한 말발굽이 도끼날처럼 떨어져 내렸다.

와아아-!

적장이 그의 두려움과 욕심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던 사이, 시어문드가 이끄는 본대가 언덕을 거의 다 내려왔다. 그들이 내지르는 함성은 몸에도, 목에도 힘이 빠진 이쪽과는 달리 잔뜩 힘이 넘쳤다.

그 소리를 듣고서야 정신이 들었는지, 적장이 다급히 뒤로 물러나는 것이 보였다.

"아드리안! 속도를 낼 테니 바짝 따라와라!"

"옛!"

욕심에 발목이 잡혀 멀리 물러나지 않았던 탓에, 적장은 여전히 가시권이었다. 작정하고 쫓는다면 잡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후우."

내쉬는 긴 숨결에 피로와 고통이 실려 나가고, 들이마시는 숨에 활력이 샘솟았다.

히히히힝!

말도 주인을 닮았을까. 분명 지쳤을 터인데도, 전투가 시작되고 처음 달릴 때처럼 힘 있게 땅을 박찼다.

***

따라잡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보면 실패한 셈이지만, 실패가 실패가 아니었다.

군터의 추격은 흐르트리 파오의 정신을 빼놓았다. 그는 죽음의 위협을 느꼈고, 신이 나서 추격할 때보다도 더 빠르게 도망쳤다. 퇴각이 아니다. 도망이다. 비슷한 뜻인 것 같지만 의미는 달랐다.

와아아아아-!

시어문드가 이끄는 본대는 시기적절하게 적의 옆구리를 들이받았다. 전군을 지휘해야 할 총사령관은 이미 제 한 목숨 건사하기 바빠 군을 통솔할 겨를이 없었다. 머리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데 팔다리가 혼자 뭘 할 것인가. 산발적인 저항은 단결하여 몰아치는 군세를 당해낼 수 없었다.

"밀어붙여라!"

시어문드의 지휘 아래, 본대의 병력은 적을 인정사정없이 밀어붙였다. 군터의 병력 또한 기세를 올리며 힘을 보탰다.

승리했다.

아직 전투가 계속되고 있지만, 몇몇 이들은 그들이 이미 승리했음을 알았다.

"길게 추격하지 마라. 적이 전열을 정비하고 반격한다면 승패를 장담할 수 없다."

시어문드는 승리의 여운에 취해 있는 와중에도 냉정했다. 그는 대장기를 쫓는 아군 부대를 보며 추격을 중지할 것을 명했다.

"추격 중지 명령입니다."

"쳇."

로우렌의 말에 보리스는 혀를 차며 고삐를 당겼다. 그는 여전히 흥분한 상태였다. 조금 더 활약하고 싶은 욕심도 여전했고, 하지만 명령이 떨어진 이상 거역할 수는 없는 법. 그는 대장기를 쫓는 대신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할렌님 쪽은 어떻지?"

"아직 소식이 없습니다. 전멸하지 않았다면 아마도…아직 저기 어딘가에 있겠지요."

로우렌이 말끝을 흐리며 적진 한복판을 가리켰다. 적장 흐르트리 파오가 이끌던 본대는 패퇴하여 물러나고 있지만, 후군을 비롯하여 아직도 많은 적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물론 그들도 슬슬 물러나려고 꿈틀대고는 있었지만 말이다.

"고립됐겠군."

"아마도 그렇겠지요."

"그렇다면 구하러 가야지."

로우렌이 고개를 저었다.

"불필요한 일입니다. 위험한 일이기도 하고요."

"냉정한 척할 필요 없다."

"하지만 …"

"아군의 승리를 위해 위험을 무릅썼다. 그런데 그들을 살피지 않는다면 앞으로 누가 위험 속에 뛰어들겠나."

보리스가 로우렌의 반대를 물리치고 말머리를 돌리려던 차였다.

둥! 둥! 둥!

느닷없이 전고가 울렸다.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돌리니, 대장기가 움직이고 있었다. 그 대장기는 지금까지 보리스가 쫓았던 것과는 다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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