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7화
시간 벌이.
그가 고렘의 핵에 손을 쓰면서 기대했던 것은 과장도, 축소도 없이 딱 그 정도였다.
고렘의 핵을 이루는 술식에 이질적인 기운을 부여함으로써 불안정함을 증가시는 것은 그리 어렵지도 위험하지도 않은 일이었다. 간단히 실험을 해보았을 때, 고렘을 일으키고 얼마 지나지 않아 폭발하는 경우가 열에 여섯 정도였다. 그리고 그 폭발은 그리 대단한 수준으로 일어나지는 않았다. 기껏해야 투석기가 쏜 돌 하나 정도의 위력? 물론 그 정도만 해도 가까이에 있는 인간 몇을 날려버릴 정도는 되지만, 고작 그 정도로 만 명이 넘는 군대를 어찌 해보겠다는 것은 망상이다.
그렇기에 군터는 핵의 폭발이 아주 잠깐이라도 좋으니 적의 발을 묶어주기를 바랐다. 그들을 당황시키고, 지체시킬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좋다.
두두두!
적의 발이 멈추고, 기세가 주춤한다면.
와아아아!
그 틈을 노려 들이칠 수 있을 테니..
"장군! 놈들이……!"
"나도 눈이 있다!"
흐르트리 파오는 버럭 외치며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길게 늘어선 적이 대열을 유지한 채 몰려오고 있었다. 전면에서만 보면 그들과 대등한 수의 대군이 몰려오는 것 같은 착각이 일 정도였다.
물론 그것은 착각이다. 하지만 당장 눈에는 그렇게 보인다는 것이 중요하다.
"당황하지 마라! 자잘한 수작이고, 허세에 불과하다! 용감히 응전하라!"
흐르트리 파오는 애써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하고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그의 군대는 그의 사고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그들은 당황해 있었으며, 그 당황을 아직 추스르지도 못한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 달아나기만 하던 적이 갑자기 방향을 바꿔 달려드니, 그들은 자연스레 뒷걸음질을 치거나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것은 아주 잠깐이었지만……
둥! 둥! 둥!
흐르트리 파오의 눈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그는 이 모든 것이 거짓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저 북소리도, 일전을 벌이자는 듯 달려오고 있는 적도 다 거짓이며 허세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째서 멈추지 않지?'
그의 시선이 몰려오는 적의 가운데, 눈에 띌 정도로 가장 앞에서 말을 달리고 있는 한 사내에게 머물렀다.
한눈에 알아보았다. 못 알아볼 리가 없지 않은가. 키파에서도 그 모습을 보았고, 바로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의 뒷모습을 눈에 불을 켜고 쫓았었는데.
'정말 무모하기 짝이 없군.
누군가를 속이려면 교묘하게 행동해야 한다. 그리고 그 교묘함은 때때로 과감함으로써 완성될 때가 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저건 너무 무모하지 않은가. 저러다가 눈먼 화살 한 대에 쓰러질 수도 있는 노릇 아닌가.
'아니. 정말 그런가?'
자신은 저렇게 무모한 자의 속임수에 이렇게 깊이 발을 담갔단 말인가?
'무모한 것이 아니라, 단지 무모하게 보일 뿐인 것은 아닌가?'
마음이 흔들림을 느꼈으나 그 흔들림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럴 겨를이 업었다. 용맹하게 뛰던 가슴은 이제 불안으로 떨고 있었고, 높게 치켜들었던 칼은 조금씩 아래로 떨어졌다.
"저놈이 군터 크렘보르다!"
"저놈만 잡으면 아군의 승리다!"
"아무도 나서지 마! 저놈의 목은 내 것이야!"
선두에 홀로 툭 튀어나와 있는 군터 크렘보르를 알아본 것은 흐르트리 파오만이 아니었다. 몇몇 용력에 자신 있는 자들이 눈에 불을 켜고 앞으로 나섰다.
침착해라!
흐르트리 파오는 그렇게 외치고 싶었다. 저것마저도 함정일지 모른다고, 그들을 말리고 싶었다. 그런 안타까움과 답답함을 느낌과 동시에, 그는 가슴을 답답하게 조여오는 강한 위화감을 인지했다.
저들을 탓할 게 아니다. 저들은 저리 나서도록 부추긴 이가 바로 자신이 아니었나.
"목을 내놔라아~!"
앞다투어 튀어 나간 이들은 십수 명. 그 배가 훌쩍 넘는 이들이 뒤늦게 나섰지만, 거리는 이미 상당히 벌어진 상태.
군터는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자신만을 노려보며 달려드는 적들을 보았다. 서로 보조를 맞출 생각도 없는지, 달려드는 방향이나 속도가 모두 제각각이었다.
'부나방 같은 것들.
굳게 닫혀 있던 입이 벌어지고, 조소가 떠올랐다. 군터는 자신이 왜 웃는지, 심지어 웃고 있다는 것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야말로 자연스럽게 떠오른 웃음.
부웅!
그가 창을 크게 한번 휘둘렀다. 허공을 긋는 창의 궤적을 따라 흐릿한 기운이 쏘아져 나갔다. 빠르지만 은밀하게 뻗어 나간 그 기운은 가장 앞에서 말을 달려오던 자를 덮쳤다. 그는 무언가 흐릿한 것이 날아왔다는 것을 마지막 순간에 알아차렸으나, 뭐라도 하려고 할 때는 이미 죽음의 기운이 그의 몸을 휩쓴 뒤였다.
"허윽!"
순간적으로 몸이 찌그러지는 느낌.
생채기 하나 생기지 않았고,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그저 아주 잠깐, 아주 약간 몸이 굳었을 뿐.
히히힝!
그러나 그가 몸의 이상이 크지 않음을 느끼고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그는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커다란 인마(人馬) 를 마주해야 했다.
콰앙!
번개가 치듯 떨어져 내린 창이 그의 정수리를 찍었다. 가로막은 창대는 마른 나뭇가지처럼 순식간에 갈라졌고, 그 아래에 일그러진 얼굴 역시 마찬가지였다.
사람의 머리부터 사타구니까지가 갈라졌고, 그 아래 말의 허리가 끊겼다. 너무도 쉽게, 거짓말처럼.
"으아아앗!"
충격적인 광경에 충격을 받은 이들도 있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고삐를 당겨보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흥분에 몸을 맡긴 채 야망에 타오르는 이들도 있었다.
두 개의 창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양옆에서 찔러왔다. 서로 합을 맞추려고 한 것은 아닌 듯했으나, 좌우에서 달려드는 이들의 합공은 제법 매서웠다.
군터는 창대 끝으로 오른쪽에서 찔러오는 창끝을 튕겨냈다. 가벼운 동작이었으나 힘의 차이는 현격했다. 창대, 끝에 부딪힌 창날이 크게 방향을 바꿨다.
왼쪽에서 들어온 창은 허리를 틀어 피했다. 그러자 상대는 그대로 베어버리려는 듯, 속도를 줄이지 않으면서 창날을 비스듬히 눕혔다. 꽤 괜찮은 반응이었다. 능숙하다고 할 만큼, 기지와 순발력 모두 상당한 수준. 어쩌면 이 기술로 꽤 재미를 봐왔을지도 모른다.
다른 이라면 꼼짝없이 당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군터에게는 그의 빠른 대처가 별로 대단치 않게 보였다. 군터는 서로의 창이 닿을 정도로 거리가 가까워졌을 때부터 그의 움직임, 호흡을 모두 감지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턱!
손 닿을 거리에서 움직이는 창 한 자루를 낚아채는 일 따위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는 말이다.
당황했는지 눈이 커졌다. 군터는 낚아챈 창을 거칠게 잡아당겼고, 끌려오는 상대를 보며 손에 힘을 주었다.
콰직!
나무로 된 창대는 그의 괴력에 힘없이 부러졌다. 자그마한 나무 파편 몇 개가 완갑 사이로 튀었는지 따끔한 통증이 일었다. 하지만 그가 느낀 고통 따위는.
푸욱!
창날에 눈이 찔린 상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으리라.
***
처음 예상한 난관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어떻게 적진 깊숙이 파고들면서 적의 추격을 뿌리치느냐.
그리고 또 하나는 적의 군량고를 어떻게 찾아내느냐.
이만한 대군이 군량을 한 곳에 쌓아뒀을 리는 없다. 필시 여러 곳으로 분산시켜놓았을 테지만, 그래도 굵직한 곳은 있을 터. 그런 곳이 열 개가 있다고 가정하면, 그중 최소 서너 개 정도를 찾아 불을 놓는 것이 그들의 임무였다.
"어디냐!"
그리고 지금, 첫 번째 난관을 어떻게든 해쳐나온 그들은 두 번째 난관에 맞닥뜨렸다.
"저곳인듯합니다!"
수하의 말이 들리기 무섭게 할렌의 고개가 휙! 하고 돌아갔다. 수하가 가리킨 곳. 적 병력이 한창 결집하고 있는 곳에는 수레가 여러 개 널려 있었다. 그 뒤로는 족히 수십 개는 돼 보이는 막사가 있었는데, 멀리서 봐서는 그게 군량을 쌓아놓은 창고인지 병사들이 머무는 군막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할렌은 냄새를 맡았다. 눈으로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감이 왔다. 적병이 저곳에 집결하고 있는 것이 그들을 요격하기 위함이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곳이다!"
그렇기에 할렌은 지체하지 않고 말머리를 돌렸다.
곧 요란한 고함과 비명이 시끄럽게 뒤섞였고, 잠시 후 그 자리에 시커먼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 연기는 제법 먼 곳에서도 한눈에 볼 수 있을 정도로 크게 피어올랐는데, 코르디 틸레노어도 그것을 보았다.
"빌어먹을!"
그는 군량고의 위치를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지금 저 시커먼 연기가 피어오르는 곳은 바로 그 열 한 곳 중 하나였고, 그가 병력을 이끌고 향하던 곳이었다.
하지만 한발 늦고 말았다. 적은 이미 다음 목표를 향해 움직였을 터.
"장군, 포위망이 완성됐습니다.
"한가한 소리! 물건을 다 잃고 난 후에 도적놈을 잡아봐야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아…죄, 죄송합니다. 소관은 그저……"
그물은 완성되었다. 하지만 망이 좁아지기도 전에 짐승이 도망을 치면 어찌할 것인가. 또, 그게 아니더라도 이미 충분히 난리를 친 후에 잡으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서둘러라! 군량고의 관리 장교가 포로로 잡히기라도 했다면 놈들은 이제 더는 길을 헤매지 않을 것이다!"
코르디 틸레노어의 아니었으면 하는 예상은, 그에게는 불운하게도 그대로 맞아떨어졌다.
"만약 거짓이라면, 내 맹세컨대 차라리 죽음을 빌도록 만들어주마."
할렌은 모든 것을 포기한 듯 축 늘어진 적 장교를 보며 으르렁거렸다. 그러나 그런 위협은 이제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협박을 듣는 그는 이미 편한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었으므로, 군량고를 공격한 후 불을 놓기까지. 짧은 시간이었지만 한 사람의 입에서 그가 아는 모든 것을 끄집어내는 데는 충분했다. 지금 할렌과 함께 움직이고 있는 이들 중에는 고문 전문가라고 자부할 수 있는 이들이 한 손으로 꼽지 못할 정도로 많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제법 완고한 척하던 적 장교의 입을 수중의 크고 작은 칼로 가볍게 열어 놓았다.
"불씨는?"
"아직 충분합니다."
세 번째. 군량고를 지키고 있던 적병을 쓸어버리고 다시 한번 불을 놓았다. 번거롭게 기름을 붓고 불을 붙일 필요는 없었다. 할렌을 비롯하여 그 휘하 장교들은 '불씨'라고 불리는 신비한 가루를 각자 한 주머니씩 휴대하고 있었다. 기름의 대용품이었는데, 그 효력은 실제 기름 못지않았다. 가루를 뿌리고 횃불 하나만 던져도 삽시간에 불길이 번지니, 이 작은 주머니에 하나가 같은 크기의 금덩이보다 비싸다는 말이 이제 이해가 갔다.
"계속 움직인다."
"슬슬 말들이 지쳐갑니다."
"안다."
쉬지 않고 계속 이동했다. 중간중간 전투를 치르기도 했다. 사람이나 말이나 지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걸 알면서도 계속 움직이는 것 역시, 어쩔 수 없는 일이고.
"열 한 개가 있다고 했다. 우리는 그중 셋을 태웠지. 하지만 부족해. 못해도 둘 정도는 더 태워야 한다."
할렌은 점점 더 조급해졌다. 그 조급함은 적을 해치울 때마다, 적의 군량고에 불을 놓을 때마다 더 커져만 갔다.
죽는 것은 두렵지 않았다. 오직 할 일을 다 하지 못할 것이 두려웠다.
"드디어 잡았군. 쥐새끼."
네 번째 군량고를 앞두고, 족히 3천은 되어 보이는 적과 맞닥뜨렸을 때, 할렌은 수하들의 피하자는 말을 듣지 않았다.
"이름은?"
"코르디 틸레노어. 알고 있나?"
"아니. 처음 듣는군."
"…그런가? 그러는 네놈은? 이름이 뭐냐."
할렌은 호위병 여럿에게 둘러싸인 적장을 향해 창을 겨눴다.
"들어도 모를 것이다. 곧 죽을 놈이 알 필요도 없고."
얼마 남지 않은 검은 머리에서 천천히 색이 빠졌다. 이제 그의 머리는 완전한 백발이었다. 할렌은 그의 머리가 새하얗게 변한 것도, 그의 아들이 뒤에서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있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설령 알았다. 한들 신경도 쓰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 그의 눈은 적장의 얼굴 외에 다른 곳으로는 움직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