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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746화 (746/1,064)

746화

따라붙은 적은 함정에서 제때 발을 빼지 못했다. 할렌은 휘하 병사 백여 명과 함께 적진을 갈랐고, 허리가 끊긴 채 둘러싸인 적은 이렇다 할 반격도 하지 못한 채 뿔뿔이 흩어지기 바빴다.

"성공입니다!"

"들뜨지 마라! 아직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다!"

흥분을 이기지 못하고 한마디 했던 그라모트는 부친의 일갈에 즉시 입을 다물었다. 가슴에서 시작해 머리까지 뻗어 나갔던 흥분이 한순간에 차갑게 식는 느낌이었다.

'대단해.'

하지만 그의 가슴은 여전히 격렬하게 뛰고 있었다. 부친의 등이 무척이나 넓어 보였다. 부친을 보면서 '크다'는 느낌을 받은 것은 십대 후반이 되어 어느 정도 다 자란 이후로 처음이었다.

"쫓지 마라! 기수! 흑기(黑旗)를 들어라! 비즈라! 당장 가서 돌아오라고 전해!"

눈에 보이는 적이란 적에게는 다 달려들면서도, 할렌의 시선 일부는 항상 전장에 향해 있었다. 그는 아군 병력이 뿔뿔이 흩어지는 적을 추격하려 하자 즉시 제지했다.

"시간은 충분히 지체했다. 우리의 임무를 잊지 마라."

최대한 서두른다고 했지만, 그래도 시간을 지체했다. 적도 이제는 눈치를 채고 반응하기 시작했으니, 자칫 잘못하다가는 적진 한복판에서 고립될 수도 있다.

"정신 바짝 차려!"

할렌과 병사들은 다시 속도를 높였다. 할렌의 말처럼 시간을 지체해서인지, 그들의 앞을 가로막으려는 적들이 계속해서 나타났다. 그러나 그 수가 그리 많지는 않고, 지휘관이 제각각인지 움직임도 다 제각각이라 대응하기가 어렵지는 않았다. 정면돌파하려면 그럴 수도 있었으나, 할렌은 부딪치기보다 회피하기를 택했다.

와아아-!

뱀처럼 이리저리 움직이며 달리는 할렌과 병사들의 양옆, 그리고 뒤쪽으로 적의 추격군이 길게 늘어졌다.

"뭐냐?"

이즈음, 흐르트리 파오도 후방의 소란을 알아차렸다. 그러나 그에게는 후방으로 파고든 적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목적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군터 크렘보르의 뒷모습이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을 것처럼 가까워졌기 때문이다.

'무슨 수작인지는 모르겠다만, 그것도 네놈의 목이 달아나고 나면 다 부질없는 짓이지.'

머리를 잃고 나면 팔다리도 다 축 늘어지는 법 아니겠나. 흐르트리 파오는 점점 가까워지는 적의 후미를 보며 연신 입꼬리를 꿈틀거렸다.

"장군! 적의 본대가 움직이고 있습니다!"

"알고 있다! 신경 쓰지 마라!"

언덕 위에서 죽은 듯 박혀있던 적군이 온갖 요란이란 요란은 다 떨면서 경사를 내려오고 있었다.

하지만 예상했던 바다. 대장의 목으로 적을 끌어들이고, 적당히 유인했다 싶으면 언덕 위의 본군과 함께 추격군을 협공한다. 처음부터 뻔히 보였고, 그래서 더 의심스러웠다.

'숨겨둔 한 수가 뭔가 싶었지.'

그런데 보아하니 그 한 수는 지금 저 멀리 나타난 놈들인 모양이다. 자신의 목을 노리는 암살자들인 줄 알았는데, 크게 우회하여 후방으로 움직이는 것을 보니 그건 아닌 듯했다.

'뭐가 됐든 상관없어. 저놈들이 내려오기 전에 모두 끝날 테니.'

부리나케 내려오고는 있지만, 너무 굼뜨다. 흐르트리 파오는 적의 본대가 내려오기 전에 충분히 군터 크렘보르를 잡아 죽일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어리석은 놈들. 너무 욕심을 부리다가 때를 놓쳤구나.'

매 순간 모든 것이 뒤바뀌는 전장에서는 과감함이 신중함만큼이나 중요하다. 지휘관의 결단력이라는 것은, 어쩌면 병사의 머릿수보다 더 중요할지도 모른다.

저기 등을 보이고 있는 군터 크렘보르나, 지금 바쁘게 경사진 땅을 내려오고 있는 또 다른 적장은 그런 면에서 볼 때 지휘관으로서 자질이 부족하다고 할 수 있다.

'용맹한 것 하나는 인정하지. 하지만 그 용맹이 네 명줄을 끊어놓는구나."

거리는 꾸준히 가까워졌다. 뒤따라붙은 아군 기병과 교전하면서 체력이 다한 것인지, 도망치는 속도가 처음보다. 현저히 느려져 있었다. 반면 흐르트리 파오가 이끄는 병력은 열심히 달리느라 조금 지치기는 했을지라도 여전히 기세등등했다. 도망치는 적을 쫓는 모양새였기에 더 그랬다. 그들은 저 앞에 있는 적이 그들을 두려워하여 도망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그 생각이 착각이라는 것을 알게 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멈췄어?'

어떻게든 거리를 벌리려 안간힘을 쓰던 적이 갑작스레 우뚝 멈춰섰다. 더 도망쳐도 소용없다는 것을 깨달은 걸까?

그들은 반전했다. 대열을 맞추고, 태세를 정비하는 꼴만 봐도 한판 붙어보겠다는 의중을 읽을 수 있었다.

'우습군.'

적은 길게 늘어섰다. 정면으로 힘 싸움을 벌이겠다는 뜻이 아니겠나. 하지만 저 초라한 병력으로 대체 뭘 할 수 있지?

"뭉개버려라!"

흐르트리 파오는 대열을 정비시키지도 않았다. 추격하던 기세 그대로 적을 밀어버릴 것을 명했다.

와아아-!

그리고 그의 병사들은 그의 뜻을 충실히 받들어, 힘차게 함성을 토하며 내달렸다.

***

검은 물결이 밀려오는 모습은 실로 장관이라고 할 만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 장엄한 광경을 있는 그대로 마음을 열어 감상할 수 있는 이는 이 자리에 없었다.

어떤 이는 다리를 떨었고, 어떤 이는 입술을 씹었다.

또 어떤 이는 별로 고이지도 않은 침을 계속 삼켰고, 어떤 이는 연신 고함을 질러댔다.

긴장과 두려움이 병사들의 머리 위에 내려앉아 그들을 무겁게 짓눌렀다.

이곳에서 평온함을 느끼고 있는 이는 오직 군터 한 명이었다. 그러나 그는 밀려오는 적의 모습을 장관이라고 느끼지 않았다. 이제 곧 목숨을 걸고 칼부림을 벌여야 할 상대를 그저 덤덤히 지켜볼 뿐이었다.

"시작하라."

"옛."

적장. 이름이 흐르트리 파오라고 했던가? 아무튼, 그는 한 가지를 간과했다. 눈에 뻔히 보이는 수를 굳이 썼을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확률이 크다는 것과 …

"시작하라!"

이 전장을 선택한 것은 그가 아니라 이쪽이라는 것.

아드리안을 비롯한 몇몇이 바쁘게 움직이며 소리쳤다. 그러자 그 신호를 들은 이들이 앞으로 나섰다.

그들은 본래 평범한 병사였으나 이제는 평범하지 않게 된 이들이었다. 그들의 존재에 대해 아는 이들 중 몇몇은 그들을 술사라고 불렀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그들은 술사가 아니었다. 다만 마치 술사와 같은 힘을 제한적으로 발휘할 수 있을 뿐 거인들이 일어섰다. 족히 백은 되어 보이는 수. 그들은 아무것도 없는 흙에서 일어나 우뚝 섰다. 그들이 일어섬으로 인해 그들 주변의 땅은 움푹 파였다. 본래 땅을 덮었던 흙이 모두 그들의 몸이 되었으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저, 저건 무엇이냐?"

병사들도 놀랐지만, 가장 놀란 것은 여유롭게 말을 몰던 흐르트리 파오였다. 그는 흙의 거인들 자체에 놀란 것은 아니었다. 신분이 신분인 만큼, 적잖은 술사들을 접할 기회가 있었다. 전투 술사들을 부리기도 했다. 그러니 술법이나, 초자연적인 현상 자체에 경이나 두려움을 느낄 이유는 없었다.

지금 그가 놀란 것은, 모든 것이 생각대로 흘러가는 와중에 변수일 가능성이 커 보이는 무언가가 갑작스레 튀어나왔기 때문이었다. 땅에서 일어난 저 거인들은 명백히 그의 계산 밖이었다. 무언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어쩌면 일이 틀어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한순간 엄습해왔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한순간이었다.

저 거인들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고작해야 수십. 많아 봐야 백 정도다. 기병이 돌격하기만 해도, 저것들은 말발굽에 형체도 남지 않고 으스러질 것이다.

"돌격! 돌격하라!"

뱀처럼 고개를 들고 거머리처럼 달라붙는 불안감을 지우기 위해, 흐르트리 파오는 허공에 칼을 휘두르며 고함을 질렀다.

흐르트리 파오의 목소리가 말발굽과 거친 숨소리에 흔적도 없이 묻히고 있을 때, 흙에서 일어난 거인들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땅을 울리며, 백배도 넘는 적을 향해 달려든 거인들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거대한 물결에 휩쓸려버렸다. 선두에서 찌른 창에 머리와 몸통이 뚫리고, 밀어붙이는 전마의 돌격 앞에 무력하게 쓰러졌다. 존재감을 드러내며 달려들었던 것이 무색할 만큼 허무하게, 그들은 무너져내렸다.

흐르트리 파오는 자신의 예상대로 된 것에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역시 이 또한 허세였군. 이 사기꾼 같은 놈.'

힘만 믿고 설치는 곰인 줄 알았더니 머리 굴리는 게 여우보다도 더 약삭빠르다. 다만 그 잔꾀가 훤히 들여다보인다는 게 문……

콰앙!

그의 마음속에서 불안감이 씻은 듯 사라짐과 동시였다. 난데없는 굉음이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그 소리를 들은 흐르트리 파오가 휙! 하고 고개를 돌렸을 때, 그는 그의 군대,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육편(片)을 볼 수 있었다.

***

모페이브의 걸작, 고렘은 파격적인 발명품이지만 아직 여러모로 부족한 점이 많았다. 특히 전투 병기로서 더욱 그랬다. 고렘이 전장에 나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말이나 소 대신 수레를 끄는 것. 혹은 망가진 공성추 대신 육탄 돌격으로 성문을 두들기는 정도다.

게다가 하나하나 공들여 제작해야 하는 터라 대량으로 만들어내지도 못한다. 이번에 군터가 가져온 백여 구의 고렘은 모페이브가 갖은 노력 끝에 만들어낸 전부였다.

사실 군터는 고렘을 가져오면서도 이것을 쓸 일이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지치지 않는 일꾼. 물론 훌륭하지만, 단순히 일꾼일 뿐이라면 대체 이것을 어디다 쓸 수 있을까?

영감을 받은 것은, 사실 꽤 오래전의 일이었다.

모페이브의 고렘은 군터에게도 꽤 깊은 인상을 주었다.

그는 언제나, 본능적으로 강력한 군대를 원해왔다. 그리고 모페이브의 고렘은 그에게 이런저런 생각할 거리를 안겨주었다.

군터는 모페이브에게서 받은 고렘의 핵을 나름의 방식으로 연구했다. 그러나 제작자로부터 설명을 들었음에도 그는 고렘의 핵에 담긴 술법적 지식을 다 이해할 수 없었다. 다만 일부나마 이해하고, 그것을 토대로 독자적인 시도를 몇 차례 해보았을 뿐.

콰앙!

그리고 지금 저기서 피어오르고 있는 피 구름은 그 시도의 결과물이었다.

고렘의 핵은 얼핏 보면 별 것 없어 보여도, 실은 굉장히 정교한 술식의 집합체였다. 땅의 기운을 새긴 그릇에 동류의 기운을 흡수하는 술식, 거기에 그 흡수한 기운을 토대로 형태를 구축하는 구축식까지. 그야말로 정교함의 향연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다.

군터는 그 복잡한 술식을 이해할 수는 없었으나, 술식에 담긴 힘의 흐름은 느낄 수 있었다. 그건 그의 탁월하다 못해 초월적인 기감의 힘이었다. 불이 왜 타오르는지는 알지 못해도 불이 뜨겁다는 것은 손만 가져다 대도 알 수 있는 것처럼, 그는 자연스럽게 술식의 흐름을 이해했다.

지금 저기서 활약하고 있는 고렘, 정확히는 고렘의 핵에 그가 한 일은 사실 별것 없었다. 정교하게 돌아가는 술식에 그의 기운을 아주 약간 불어넣은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 약간의 기운만으로도, 조금의 오차도 없이 돌아가던 술식에 이상을 일으키기에는 충분했다.

콰앙!

"휘유! 잘도 터지는군요."

아드리안이 손으로 햇빛을 가리며 휘파람을 불었다.

"혼란에 빠지는 것도 잠깐이다. 결국은 시간 벌이에 불과해."

"물론 알고 있지요. 준비는 끝났습니다."

좋아.

군터가 그의 창을 높이 들었다. 창이 올라감과 동시에 이곳저곳에서 깃발이 올라갔고, 길게 도열한 채 멈춰있던 군대가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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