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터-745화 (745/1,064)

745화

할렌도 할렌이었지만, 그 휘하의 장교들 또한 전투 경험이 풍부했다. 아니, 경험이 풍부하다는 말조차도 그들의 노련함을 표현하기에는 부족했다. 그들은 젊은 시절의 반, 혹은 그 이상을 전장에서 보낸 이들이었으니까 말이다.

"이 얼간이 자식들! 자연스럽게 한 말이다! 요염한 여인네가 사내놈을 홀리려고 엉덩이를 흔들어대는 것처럼 살랑살랑, 어?!"

분명 급박한 상황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지만, 함께 말을 달리고 있는 상관이 이런 식으로 태연하게 행동한다면 휘하 병사도 자연스럽게 마음이 편해질 수밖에 없다. 그들은 여인네처럼 엉덩이를 흔들어대라, 라는 말의 뜻을 이해하지는 못했으나 한결 부드럽게 몸에 힘을 빼고 말의 속도를 줄이는 데는 성공했다.

"이제 곧 따라붙습니다!"

그 결과, 열심히 그들을 쫓아오는 적과의 거리가 빠르게 좁혀졌다.

"좋아! 산개!

할렌의 호령에 병사들이 사전에 여러 번 합을 맞춰보기라도 했던 것처럼 순식간에 흩어졌다. 거의 다 따라잡았다고 생각하며 각오를 다지던 후방의 적군은 당황하여 반응이 늦었다. 불과 몇 호흡 정도. 하지만 순간을 다투는 전투에서 그 짧은 지체는 너무도 큰 결과를 낳았다.

"쳐라!"

가장 앞에서 말을 달리던 할렌은 어느새 가장 뒤쪽으로 내려와 있었다. 그는 공격 명령을 내림과 동시에 가장 먼저 적에게 달려들었다. 번개처럼 뻗어간 창은 제법 그럴듯하게 무장한, 장교로 추정되는 적의 가슴을 찔렀다. 적은 칼을 들어 막으려 했지만 할렌의 창은 그의 예상보다 훨씬 더 빨랐다. 푹! 소리가 들렸을 때, 그의 칼은 이제 막 배 높이에 이르러 있었다.

"컥!"

할렌은 깊게 파고든 창을 힘주어 밀었다. 힘이 빠진 몸뚱이는 어렵지 않게 밀렸고, 곧 말 위에서 미끄러져 떨어졌다.

"후우."

숨 한번 고르는 사이 옆에서 서늘한 예기가 느껴졌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젖히니 화살 한 대가 섬뜩한 소리를 내며, 지나갔다. 할렌은 이를 악물며 몸을 틀었다.

부웅!

역시나 화살은 시작에 불과했다. 다급히 숙인 등 위로 이번에는 창 한 자루가 지나갔다. 튕기듯 몸을 일으키며 창을 휘둘렀다. 반원을 그리는 궤적에 걸린 팔 하나가 피를 뿌리며 허공에 떠올랐다.

"무르군! 물러! 어설프기 짝이 없구나!"

그의 목숨을 끊어놓으려는 숱한 위협 속에서, 할렌은 조금도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몸에 넘쳐흐르는 힘이 그에게 자신감을 안겨주었다. 젊었을 적 온몸을 뜨겁게 달구던 그 힘이, 아니 그 이상의 힘이 느껴졌다. 화살도, 창칼도, 그 무엇도 두렵지 않았다. 그 무엇도.

턱!

찔러오는 창을 피한 후 창두 바로 뒷부분을 낚아챘다. 그리고 살짝 힘주어 당기니 균형을 잃은 적이 허무할 만큼 쉽게 끌려왔다. 할렌은 칼을 쥐듯 짧게 잡은 창을 역시 칼처럼 휘둘러 끌려온 목을 베었다. 갈라진 목줄 사이로 터져 나온 피가 그의 얼굴을 적셨다. 얼굴을 가득 적신 핏물은 충혈된 그의 눈만큼이나 붉었다.

"아버지!"

그라모트가 적 한 명의 목을 치고 다급히 따라붙었다. 그는 할렌이 예고도 없이 뛰쳐나간 탓에 크게 당황했으나, 어찌 됐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잊지는 않았다.

'아버지를 지킨다. 무슨 일이 있어도.

군인으로서의 본분을 잊었다고 비난받을 만한 일이지만, 그라모트는 전투의 승패 같은 것보다는 부친의 안위가 우선이었다.

지금 그의 마음은 한 자루 칼처럼 날카로워진 상태였다. 그 날카로움은 그가 느끼는 불안함과 비례했는데, 마치 이번 전투가 마지막이라는 듯 초연한 분위기를 풍기는 부친 때문에 그의 불안함은 그 어느 때보다 커져 있었다.

'포기하시오. 아버지가 죽든 살든, 그건 당신의 마음에 달린 것일 테니 우리가 끼어들어 애를 쓰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을 거요.'

동생 로우렌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때 그라모트는 동생에게 벌컥 화를 냈었다. 그가 동생에게 그리 화를 낸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넌 어찌 그리 태평하단 말이냐! 너도 보아서 알겠지만, 아버지의 분위기는 정상이 아니었다. 그분께서는……'

'보아서 알고 있지. 그래서 하는 말이오. 아버지가 대체 무엇에 그리 홀려버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분의 눈에 우리는 여전히 앳된 아이에 지나지 않는단 말이지. 우리가 무슨 말을 하든, 어떻게 만류를 하는 들어먹지를 않으실 테니 죄다 헛수고란 말이오.'

'아니. 아버지는 지금 공명심에 사로잡히신 것뿐이다. 그분께서 그러실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지만, 군인이 전공을 탐하는 것은 사실 흔한 일이지. 그분은 욕심 때문에 무리를 하고 계신 것뿐이야. 그렇다면 우리가 곁에서 힘을 보태드려야 한다. 그분께서 조금이라도 덜 무리하실 수 있도록.'

'우리가 아니오. 형님이지. 형님도 알다시피, 내게 그런 재주는 없지 않소?'

그라모트는 자조하는 동생에게 차마 다시 화를 낼 수 없었다. 동생이 자신에게 품은 열등감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난 아버님을 곁에서 모실 생각이다.'

'그러시오.'

'그동안 넌 공자님을 곁에서 모셔라.'

'말 안 해도 그럴 생각이오. 걱정 말구려.'

그게 그들 형제의 마지막 대화였다.

***

'어리석은 형님 같으니.'

로우렌은 저 멀리 피어오르는 먼지구름과 그 밑에 바삐 움직이는 흐릿한 점들을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부친과 형이 저기에 있을 것이다. 지금쯤 적과 부대끼며 열심히 피를 보고 있겠지.

'나라고 몰랐을 것 같소?'

자랑은 아니지만, 눈치라면 그가 그의 형제보다 훨씬 더 뛰어났다. 부친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도 그가 먼저였다. 아니, 오랜만에 다시 만난 그 자리에서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리고 그의 이상이 무엇으로부터 비롯되었는지 또한, 오래지 않아 알았다.

'금술이라니. 멀쩡한 양반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렇지 대체……'

누가 전장에서 활약하라고 등에 칼을 대고 협박이라도 했단 말인가? 꾸준히 세월을 먹고 고생을 하다 보면 몸이 노쇠하는 것이야 자연스러운 일이지 않은가. 흰머리와 수염이 희끗희끗 나기 시작했는데 몸의 기력이 젊은 시절 그대로이길 바라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욕심이다.

'나도 분명 당신의 피를 이어받았을 텐데, 어째 나는 당신이 조금도 이해되지 않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아버지.

말도 안 되는 고집과 욕심을 부리는 부친을 설득하려고도 했었다. 좋은 말을 못 들을 것을 뻔히 짐작하면서도 말이다.

'아버지. 말도 안 되는 일을 저지르셨더군요. 저야 그렇다 치더라도, 아버지를 걱정하는 어머니나 형은 생각도 하지 않으십니까?'

퉁명스럽게 말을 던졌을 때, 로우렌은 예의 그 서늘한 시선이 날아들 줄 알았다. 그래도 담담히 반응하리라 다짐하며 답을 기다리는데, 돌아온 것은 뜻밖에도 평온한 한 마디였다.

'네 어미와 너희에게는 미안한 마음이다.'

'…미안할 일은 안 하면 좋잖습니까. 금술이라더군요. 어떤면 때문에 금술이라 불리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금술이 괜히 금술이겠습니까. 지금이라도 관두시죠.'

'이미 늦었다. 늦지 않았다고 해도 돌이킬 생각은 없고.'

'젠장. 대체 무슨 똥고집입니까? 나이도 자실 만큼 자셨으면서 철부지 애송이처럼 구시는군요.'

'그럴지도 모르지. 아니, 네 말이 옳다. 나잇값을 못하고 있지.'

'그걸 아시면서…'

'기이하게도 말이다. 내 시간은 그 철부지 애송이였던 시절에 멈춰있다. 내가 이나이가 되었음을 실감하게 해주는 것은 네 어미와 너희들뿐이야. 그래서 나는 남편으로서, 아비로서 부족하지 않으려고 내 나름대로는 노력했었다.

'그때 나와 함께 싸웠던 녀석들은 얼마 남지 않았다. 그 얼마 안 되는 놈 중 대다수는 은퇴하여 가정을 꾸렸지. 그리고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피 냄새에서 멀어졌다. 지금까지 나와 함께 장군을 모시고 있는 녀석은 정말 얼마 되지 않아.'

할 말은 많았지만, 이야기를 잇는 부친의 모습이 낯설어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처음으로 보여주는 낯선 모습이었지만, 로우렌은 그 모습이 이제껏 그가 봤던 부친의의 그 어떤 모습보다도 보기 좋았다. 늘 어렵고, 때로는 밉기도 했던 부친이 마치 자신의 또래가 된 것처럼 가깝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네 말대로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 녀석들이 정상적인 것일지도 몰라. 아니, 그런 거겠지. 하지만 장군은 여전히 그 시절에 머물고 계신다. 살라스님도 마찬가지. 그분들은 여전히 그때처럼 용맹하게 전장에 나선다. 나는…그분들에게 뒤처지고 싶지 않았다. 예전처럼, 그때처럼 그 등 뒤를 바짝 따르고 싶었어. 그 마음은 지금도 여전하다.

'…그게 바로 욕심이라는 겁니다. 마음은 알겠지만, 세상에는 마음대로 안 되는 일도 있는 법이지 않습니까..

'그래. 네 말이 옳다. 욕심이지. 하지만 세상에는, 욕심이라는 걸 알면서도 포기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지 않으냐."

'지금 굉장히 철없어 보이시는 거 알고 계십니까?'

'안다. 내가 너를 온갖 이유로 수없이 나무랐지만, 정작 난 그럴 자격이 없는 인간이었음을 이제야 알겠다. 미안하구나.

사과. 부친의 입에서 마지막으로 미안하다는 말을 들은 것이 언제였던가.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을 보니 정말 까마득할 정도로 옛날이거나, 아예 처음일 것이다. 이

'됐습니다. 본래 부모라는 이들이 그렇지 않습니까. 본인도 하지 못하는 것, 갖지 못한 것을 자식에게 바라지요. 본인보다 더 나아지기를 바라는 마음, 아니 욕심에서 말입니다.

불편한 마음으로 왔지만, 그즈음에 이르러 그의 마음은 더없이 홀가분해졌다. 원하는 바를 이뤄서가 아니라, 체념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무슨 말을 하더라도 부친의 고집을 꺾을 수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마음 같아서는 크렘보르 장군께 달려가 아버지를 말려달라고 간청이라도 드리고 싶군요.

'네가 그러지 않을 것을 안다.

'저를 너무 믿으시는 것 아닙니까?'

'내 피를 이은 자식이다. 내가 너를 모를 것 같으냐? 네가 간청한다고 해도 소용없음을 알 테니 쓸데없는 일로 심력을 낭비하지 않을 테지.'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이 짜증 나는군요.

결국, 한숨을 쉬며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로우렌은 부디 눈치 없는 형이 부친의 곁에서 본인이 말한 대로 부족한 힘이나마 있는 대로 더해주기를 바랐다.

"할렌님은 잘 해내실 거다."

항상 떠들어대는 로우렌이 말없이 있는 것이 신경 쓰였는지, 보리스가 다가와 위로하듯 한 마디를 건넸다. 그러자 로우렌은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 더 걱정입니다."

"음?"

"공명심이라는 것이 사람의 눈과 귀를 가리는 법 아닙니까. 뭔가 잘 풀린다 싶으면 더 욕심이 생기겠지요."

"할레님은 경험이 많은 분이다. 그런 실수를 하지는 않으실 거야."

"실수라는 것이 어디 하고 싶어서 하는 거랍니까."

"걱정이 많구나. 하긴, 부친과 형제가 모두 가 있으니 걱정이 될 만도 하지."

"괜한 걱정이기를 바랄 뿐입니다."

둥! 둥! 둥!

잠깐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다시 전고가 울렸다. 보리스는 소리가 들려온 곳을 힐끗 보더니 곧 저 아래로 눈길을 돌렸다. 거리가 멀었지만, 그의 눈에는 우뚝 솟은 몇개의 대장기가 휘날리는 것이 보였다.

"할렌님을 위해서라도, 우리가 잘해야 한다."

"알고 있습니다. 가시지요."

로우렌의 표정은 어느새 평소처럼 담담하게 변해 있었다. 보리스는 그를 보고 가볍게 웃으며 돌아섰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