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4화
"이랴!"
적이 가시거리에 들어왔을 때부터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적장을, 흐르트리 파오를 노린다는 생각은 처음부터 하지 않았다. 물론 적 총대장의 목을 칠 수 있다면 더없이 좋겠지만, 그게 그리 쉬울 리가 없지 않은가. 실현 가능성이 낮은 목표보다는 노릴 수 있는 것을 노리자는 것이 옳다고 판단했다.
그렇기에 군량이었다. 적은 대군이고, 대군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군량이 필요하다. 하물며 그적이 원정군이라면 더 말할 필요도 없다. 보급선을 통해 계속해서 본토로부터 지원을 받고 있지만, 그들의 보급선은 이전처럼 튼튼하지 않았다. 잔카라스 데반이 착실히 마련해둔 보급선은 점령지의 민심이 흉흉해지면서 점점 위태로워지고 있었고, 그 위태로움은 현재에 이르러 최고조에 달했다.
여기서 한 번만 더 흔들어놓을 수 있다면.
6만여 대군과 정면으로 맞서 싸워 물리칠 필요는 없다. 그게 가능한지는 둘째 치고, 가능하다 해도 크게 피를 볼 것이 분명한데 굳이 그럴 이유는 없지 않은가.
하여 처음부터 적진의 후방에 위치한 적의 군량을 태우는 것을 목표로 했다. 전부를 없앨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겠으나 현실적으로 그건 어렵다고 보았고, 반 정도라도 없앨 수 있다면 적에게 큰 타격을 줄 수 있으리라 보았다.
하지만 이는 위험한 일이었다. 군량은 모든 군대가 가장 중히 여기는 것이고, 따라서 언제나 군량을 지키기 위한 병력의 배치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적의 후방까지 들어가는 것도 문제고, 그 삼엄한 수비를 뚫는 것도 문제였다.
그러나 할렌은 이 위험천만한 임무를 자청했다. 처음 시어문드가 이야기를 꺼냈을 때, 할렌은 이 일이 자신을 위한 일임을 확신했다. 시어문드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위험한 일이라고 재차 이야기했을 때도 가슴의 두근거림은 멈추지 않았다.
마치 그 어렸던 시절, 첫 전투에 나서기 전에 느꼈던 떨림.
"이랴!"
어린 시절부터 하루의 반 이상을 말과 함께 보내는 초원 민족은 말을 제 수족처럼 다루듯 한다. 그러니 말에 올라 말과 호흡하는 것은 그들에게 있어 무척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할렌은 지금 그 이상을 느끼고 있었다. 그의 호흡과 말의 호흡이 하나가 된 것처럼, 그는 자신을 태운 채 달리고 있는 말의 모든 움직임을 느꼈다.
지금 이 순간, 그의 집중력은 더 오를 수 없을 만큼 올라 있었다.
"아버지! 적이 우리를 발견했습니다!"
공적인 자리에서는 아버지라고 부르지 말라고 누누이 말했지만, 이 멍청한 아들 녀석은 아직도 이 경솔한 입버릇을 고칠 생각이 없는 듯했다.
못마땅하게 혀를 찬 할렌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퉁명스럽게 답했다.
"그게 뭐가 그리 놀라우냐. 놈들이 모두 맹인이 아닌데, 당연히 반응하겠지."
그의 눈에는 한참 부족해 보이긴 해도, 그라모트 역시 나름대로 몇 번의 실전을 겪은 무관이었다. 당연히 피를 보는 것을 두려워한다거나, 적의 사소한 움직임 하나하나에 과민반응을 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눈에 띄게 굳어 있는 것은 이 일이 그가 전에 경험한 바없는 위험하면서도 중대한 일이기 때문이며, 또한 그 위험과 중요성을 실감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할렌은 듣기 좋은 몇 마디 말로 아들의 굳은 표정을 풀어주려 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제 곧 적과 칼을 맞대고 나면 자연히 풀릴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정신 바짝 차려라. 곧이다."
적 일부는 그들의 존재를 눈치챘지만, 그건 그야말로 일부에 불과했다. 아직도 적의 대다수는 군터와 그가 이끄는 병력에 정신이 팔려있었다. 하긴, 총대장부터가 눈이 돌아간 마당에 그 휘하 장교나 군졸들이야 말할 필요가 있겠나.
"장군께서 우리를 위해 시간을 벌어주고 계신 것이다. 그러니 조금의 실수도 있어서는 안 된다. 정신 바짝 차리고 내 뒤만 따라라."
여전히 잔뜩 굳어 있는 아들의 얼굴이 썩 미덥지 않았다. 따라가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것을 억지로라도 떼어 놨어야 했나 싶었지만, 이제 와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겠나.
할렌은 날카로운 눈으로 조금씩 꿈틀거리는 적진을 살폈다.
***
"아직인가?"
"아직이네."
토어릭의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조급함이 담겨 있었고, 그에 답하는 시어문드의 목소리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단호했다.
'더 큰 효과를 내기 위해서는 더 진중해야 한다.
미풍에도 흔들리던 잔가지가 좀 더 격렬히 춤춘다고 해서 누가 눈길을 주겠는가. 이제껏 흔들림 없이 굳건하던 고목이 꿈틀거릴 때야 비로소 시선을 빼앗기는 법이다.
그렇기에 시어문드는 군터가 쫓기다가 결국 따라붙은 적과 교전을 벌이기 시작했을 때에도, 은밀히 움직이던 할렌이 적에게 발각됐을 때에도 군을 움직이지 않았다. 그가 기다리는 시기는 보다 급박한 한순간이었다.
그러나 겉으로만 담담한 척하고 있을 뿐, 시어문드의 내심은 옆에서 초조한 기색을 온몸으로 드러내고 있는 토어릭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 역시 당장이라도 출진 명령을 내리고 싶었다. 다만 그런 본능을 이성으로 간신히 억제하고 있을 뿐.
'조금, 조금만 더.'
이쯤 되면 침착한 계산의 결과라기보다는 막연한 믿음의 발로였다. 지금 당장 군을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조금만 더 기다린다면 더 나은 결과를 얻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와 희망을 품었다. 그러한 두 생각, 두 마음이 서로 격렬하게 부딪치며 그의 입술을 계속 달싹거리게 만들었다.
버티고 또 버텼다. 그러던 중, 결국 그의 인내심이 바닥난 것은 추격군과 맞서 싸우던 군터의 병력이 다시 말머리를 틀었을 때였다. 대장기를 휘날리는 적의 또 다른 병력이 지근거리까지 접근함과 동시였다.
"진군하라!"
앞으로 나서면서도 균형을 유지하던 적군이 군터 쪽으로 몸을 틀었다. 그 순간 적진 후방을 향해 침투하던 할렌에게 길이 열렸고, 전장 전체가 크게 출렁였다.
시어문드는 그것을 알아차리자마자 기수와 고수에게 명령을 내렸다. 출진을 명하는 깃발이 흔들리고, 진군의 북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소리는 아군을 위한 것이었으며, 동시에 적군을 위한 것이었다. 정확히는, 적군을 향한 것이었다.
***
둥! 둥! 둥!
흐르트리 파오는 고지에서 들려오는 북소리에 당황하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오히려 코웃음 쳤다. 그는 적의 본대가 이제야 움직이기 시작한 것을 적이 그만큼 위기에 몰렸다는 신호로 받아들였다.
'극적인 반전을 노렸나? 하지만 늦었어.'
뭘 기대했을까. 일전에 키파 공성전에서 그랬던 것처럼 대장이 직접 나서서 용맹을 떨치고, 사기가 오른 아군이 다수의 적을 밀어내는…그런 기적 같은 일을 재현하고자 한 것일까? 아니면 지금 측면에서 돌아오고 있는 별동대를 위해 틈을 만들어주고자 한 것일까?
"장군! 측면의 적이 속도를 높이고 있습니다!"
"동요하지 마라! 벽은 두껍다! 고작 저 정도로 뭘 할 수 있다는 것이냐!"
수하에게 그리 일갈하면서, 흐르트리 파오는 자신이 전쟁사에 이름을 올린 명장이 된 것 같다고 생각했다. 흔들림 없이 군을 지휘하며 승리를 일구는, 용맹과 지혜를 고루 갖춘 그런 명장 말이다.
자연스럽게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자신감이 피어올랐다. 다시 거리를 벌리고 있는, 아니 등을 보이며 달아나고 있는 적장이 우습게 느껴졌다.
'잔카라스 데반. 내가 당신을 너무 크게 보고 있었던 모양이오. 아니면 나 자신을 너무 작게 보았던 것일까.'
줄곧 언덕 위에서 엉덩이를 붙이고 있던 적이 뒤늦게 움직이기 시작했으나 전혀 위협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들이 내려오기 전에 상황은 끝날 것이며, 설령 그게 아니라고 해도 충분히 대처할 수 있다.
'네놈들이 거기서 내려오는 순간이 이 전투가 끝나는 순간이 될 것이다.'
그는 승리를 의심치 않았다. 그의 눈이 향한 곳은 조금씩 멀어지고 있는 적장의 뒤꽁무니였으나, 그가 바라보고 있는 것은 당당히 황자의 앞에 무릎 꿇고 있는 미래의 자신이었다.
비단 그뿐만이 아니었다. 아니, 지금 이 순간 승리를 의심하고 있는 이는 오직 한 사람뿐이었다.
***
"장군! 놈들이 방향을 틀었습니다!"
당연하지! 코르디 틸레노어는 그리 외치고 싶었으나 입을 꾹 다물었다. 지금은 그 한 마디를 외치는 데 쓰는 힘마저 비축하고 싶었다. 그는 필사적으로 말의 배를 찼다. 그의 애마도 주인의 그런 마음을 알았는지, 연신 거친 숨을 토하면서도 힘껏 다리를 움직였다.
"8군에게, 운시크 장군에게 알려라! 군량고가 위험하다고, 지금 당장 회군하라고 해!"
부지런히 움직이고는 있지만, 안타깝게도 코르디 틸레노어가 거느린 병사는 이백 정도를 제외하면 모두 보병이었다. 반면 지금 침투하고 있는 적은 모두 기병. 최단거리로 이동한다고 해도 속도에서 밀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반면 8군은 거느린 기병만 이천에 달하니, 그들이 움직인다면 적을 막을 수는 없다고 해도 발을 늦출 수는 있을 터. 그 정도만 해준다면 이쪽도 어떻게든 시간을 맞출 수 있을 것이다.
"움직여라! 어서!"
"옛!"
전령이 출발하고 잠시 후, 전방으로 움직이던 8군이 방향을 틀었다. 8군을 이끄는 바마 운시크가 기대했던 대로 움직여준 것이다. 평소 그와 친분이 있었고, 그만큼 서로에 대한 신뢰가 있었기에 요청한 대로 해줄 것이라 기대했었는데 다행히 그 기대가 어긋나지 않은 듯했다.
'좋아. 이걸로 급한 불은 끈 셈인가.'
바마 운시크는 그가 거느린 기병을 모두 움직였다. 이천여 기병이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후방으로 향했다.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코르디 틸레노어는 잠깐이나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아버지! 적이 따라붙고 있습니다!"
"당황하지 말라고 했다!"
당황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할렌은 고심했다. 결국 적이 따라붙을 것은 예상했던 바였으나, 그 시기가 너무 빨랐다. 상대의 기민한 반응은 예상 밖이었고, 그렇기에 할렌은 미리 생각해둔 바가 있었음에도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무시하느냐, 아니면 빠르게 정리하느냐.
얼핏 생각하면 전자가 옳은 듯했다. 따라붙고 있는 적의 수는 아무리 적게 잡아도 천 이상. 그렇다면 아무리 서두른다고 해도 적잖은 시간을 잡아먹힐 텐데, 이미 적진에 들어선 상황에 시간을 끌린다면 좋을 게 없다. 하지만,
"조금씩 속도를 줄여라! 적이 따라붙을 수 있도록!"
"옛!"
오랫동안 호흡을 맞춰온 수하, 아니 동료들은 이상하게 들릴 수 있는 명령에도 토를 달지 않았다. 감히 입을 열지는 못했지만, 눈빛으로나마 당혹스러움을 표하는 것은 바로 뒤의 아들이 유일했다.
"놈들이 따라붙으면, 그 즉시 산개하여 포위 섬멸이다."
할렌의 창백한 얼굴에 힘줄이 하나둘씩 돋아났다. 은은하게 흘러나오는 숨결이 뜨거워지고, 눈에는 핏발이 서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