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3화
흐르트리 파오는 고양감에 가득 찼다. 얼마 안 되는 기병을 이끌고 뛰쳐나오는 군터 크렘보르의 얼굴을 본 순간, 그는 승리를 예감했다.
저 건방진 놈만 잡는다면 단번에 승리할 수 있다. 그리고 그놈은 지금 손만 뻗으면 닿는 곳에서 알짱거리고 있는 상황.
뭘 망설이겠나. 그가 진군 명령을 내린 것은 거의 발작에 가까웠다.
군터 크렘보르의 목을 가져오는 자에게 금화 오백 개의 포상을 약속하겠다!"
그가 내건 포상이 마음을 홀렸는지, 명령을 들은 병사들이 용맹한 함성을 지르며 앞으로 달려나갔다.
마치 거대한 숲이 다가오는 듯한, 장엄하게까지 느껴지는 광경.
"기대 이상이군요."
먼지구름 아래 까만 선을 보며 아드리안이 피식 웃었다. 군터는 대꾸하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그가 이끄는 기병이 경사를 다 내려오는 사이, 본대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고지에서 내려오지는 않으면서 아래로 내려온 병력을 원호하는 모양새.
"너무 뻔한 것이 아닌가 걱정했습니다만, 보아하니 괜한 걱정이었던 모양이군요."
"알더라도 물 수밖에 없는 미끼라고 하지 않았더냐."
"그러게 말입니다. 참 신기하군요."
적장의 머릿속이 궁금하다며 깔보듯 말하지만, 군터는 막상 같은 상황에 놓인다면 자신도 아드리안도 적장과 비슷하게 반응했으리라 생각했다. 물 수밖에 없는 미끼라는 것은 그런 게 아니겠는가.
"자, 그럼 이제 저희는 아등바등 살아남기만 하면 되는 거로군요. 지금 움직입니까?"
"아니. 아직이다."
아직이라는 말에 아드리안이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먼지구름은 한층 더 커져 있었다. 출렁이는 검은 선 역시도. 그런데 아직이라?
"너무 끌어들이려다 자칫 발이 묶이기라도 하면 낭패입니다."
"아직이다."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한 번이면 족하다. 아드리안은 내심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입을 다물었다. 그의 상관이 아직이라면 아직인 것이다. 조금 불안한 것은 사실이지만, 군터 크렘보르라는 사내에 대한 그의 믿음은 그 이상이다.
"음?"
아드리안은 적의 움직임을 주시하는 와중에 상관의 기색도 살피고 있었다. 그렇기에 아주 약간이지만 미묘하게 변한 표정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무슨……"
짧은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시야가 새하얗게 변하는 듯하더니 무지막지한 굉음이 귓전을 울렸다.
***
콰앙!
화려하게 비산하는 '불씨'를 보며, 흐르트리 파오는 비릿하게 웃었다.
'설마하니 내가 직접 거기까지 다가가줄 거라고 기대한 것은 아니겠지?'
눈앞에 아른거리는 군터 크렘보르의 목에 혹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는 감정적으로 군을 움직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코르디 틸레노어의 경고를 잊지 않았다.
'놈들의 입장에서 봤을 때, 이 싸움을 승리로 이끄는 가자 좋은 방법은 내 목을 치는 것이다.'
그러니 저건 유인책임이 분명하다. 저런 뻔히 보이는 함정에 무턱대고 발을 들이미는 바보가 어디 있을까.
알면서도 손을 댈 수밖에 없는 탐스러운 미끼라지만, 손을 뻗기 전에 막대기로 한 번 두들겨 볼 수는 있지 않겠나.
"한 번 더 할 수 있겠나?"
"불씨는 충분합니다만, 바람이 부족합니다."
그 말에 슬쩍 시선을 돌리니 바람을 일으켰던 술사들이 반쯤 몸을 숙인 채 숨을 헐떡이고 있는 것이 보였다.
'고작 그거 하나 했다고 저렇게 빌빌댄단 말인가. 허약하기는.'
머릿속에서만 머문 생각이었다. 어지간한 술사들은 기본적으로 준 귀족 대우를 받기에, 일군의 총사령관인 그라고 해도 함부로 대할 수는 없다.
"제대로 먹힌 것 같군. 놈들은 필시 크게 당황하고 있을 것이니, 즉시 공격을 재개하라."
"옛!"
갑작스럽게 터진 불꽃의 향연에 아군 병사들의 발걸음도 멈춘 상태였다. 그러나 다시 공격 명령을 내리자 그들은 더욱 기세를 올리며 달려나갔다. 병사들은 바보가 아니었다. 아군의 위력적인 술법에 적이 한 방 먹었다는 것을 그들도 알아차렸다. 물론 사그라진 불씨가 다시 피어오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보다는 바로 근처에서 다그치는 장교들의 호령이 더 두려웠기에 그들은 달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
'한 방 먹었군.'
군터는 창을 휘둘렀다. 창의 궤적을 따라 세찬 바람이 일며 자욱한 연기를 밀어냈다.
"콜록콜록! 이게 뭔 …"
군터가 연기를 걷어내는 사이 아드리안이 기침을 해대며 몸을 일으켰다. 말이 놀라 난리를 친 탓에 낙마하기는 했으나 일단은 멀쩡해 보였다. 주변의 병사들 역시 마찬가지.
"그렇게 요란했던 것치고는 별 것 없군요."
낙마했던 것이 부끄러웠는지, 아드리안은 과할 정도로 노기를 드러냈다. 자신을 떨어뜨렸던 말의 고삐를 단단히 진 채, 그는 주변 상황을 살폈다.
"서둘러 병사들을 집결시켜라. 놈들이 오고 있다."
"예."
그렇게 명령을 내린 후, 군터는 앞으로 나섰다. 다가오는 적의 모습이 점점 걷히고 있는 연기 사이로 보였다.
"정신 차려라! 유치한 불놀이였을 뿐이다! 날 봐라! 놈들이 지른 불에 직격당했는데도 멀쩡하지 않나! 적이 오고 있다! 지금 당장 일어나지 않으면 계속 못 일어나게 될 거다!! 그러니 엄살은 그만 피우고 당장 모두 모여!"
요란했던 것에 비해 실속은 부족했지만, 그렇다고 아예 타격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운 나쁘게 불꽃에 직격당한 병사들은 아직도 땅을 뒹굴고 있었다. 혹은 이미 숨이 끊겨 조용히 누워있거나.
'아주 맹탕은 아니로군.
조금은 얕잡아봤다. 여기까지 모든 것이 계획대로 진행됐기 때문에, 이미 손에 쥔 사냥감처럼 여겼었다.
잠시 후, 병사들이 그의 곁으로 집결했다. 그 수는 2천 남짓. 당장 저 앞에서 몰려오고 있는 적은 대강 헤아려도 1만가량 되어 보이니 이 정도 병력으로 적에 맞선다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 그것을 병사들도 알고 있기에 그들의 표정은 돌처럼 굳어 있었다.
"얼어있을 것 없다! 너희에게 저쪽으로 돌격하라고는 명하지 않을 테니!"
이 병사들을 거느리고 적과 싸운다는 선택지는 처음부터 없었다. 이쪽의 역할은 어디까지나 미끼. 주공(主攻)은 다른 쪽이다.
미끼의 역할은 상대의 시선을 끄는 것.
"장군! 놈들이 곧 당도합니다!"
적의 선봉은 역시나 기병이었다. 혼란을 수습할 시간을 주지 않겠다는 것인지, 3천 정도 되어 보이는 기병은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고 들어왔다.
"지금 움직여야 합니다. 아니면 발목을 잡힐 겁니다."
"발목 정도는 내줘도 괜찮다."
군터는 퇴각을 결정했다. 그러나 등을 보이기도 전에 적 기병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떨쳐내고 가야겠지요?"
아드리안이 씩 웃으며 물었고, 군터는 말없이 살짝 고개만 끄덕였다.
***
"시작됐군."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달아오른 공기가 그에게 속삭여주었다.
할렌은 그의 바로 뒤에 자리한 기수에게 눈짓으로 명령했다. 그러자 기수가 아무 문양도 없는 회색 깃발을 흔들었고, 그 신호는 대열의 중간중간에 자리한 또 다른 기수들에게 전달되었다.
"명심해라. 우리를 위해 장군께서 직접 위험을 무릅쓰고 계신다. 조금의 실수도 용납할 수 없다. 모두, 이곳에서 뼈를 묻을 각오를 해라."
"다들 알고 있으니 그렇게 무섭게 말씀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얼굴에 칼자국이 여럿 있는 장교가 너스레를 떨었다. 상급자에게 이런 식으로 농 섞인 말을 한다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이런 상황에 이런 태도를 보인다는 것은 더더욱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할렌은 한번 혀를 찰 뿐, 그를 나무라거나 하지는 않았다. 지금이야 상급자와 하급자의 관계가 되었으나, 그들은 본래 동료였다. 지금으로부터 이십여 년 전에 처음 만났고, 같은 전장에서 나란히 말을 달렸었다.
이곳에는 그와 같은, 옛적부터 함께 해온 동료가 여럿이었다. 본래라면 이들은 군터의 곁을 지켜야 했으나, 지금은 할렌과 함께 하고 있었다. 모두 이제부터 해야 할 일을 위해서였다. 조금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 이 전투의 향방을 가를 순간을 위해서.
"동쪽으로 움직입니까?"
"그래야지. 장군에게 놈들의 모든 시선이 쏠린 지금이 기회다."
적은 아군을 포위하듯 넓게 포진했지만, 완전히 포위하지는 못했다. 대충 반쯤 둘러싼 모양새였는데, 서북쪽부터 남쪽까지에 걸쳐 있었다. 그러니 할렌은 상대적으로 적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동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아버지. 본대와 보조를 맞춰야 하지 않겠습니까?"
"전령이 오가고 나면 이미 늦다. 시어문드는 똑똑한 자이니 알아서 대응할 것이야. 우리는 우리가 할 일만 신경 쓰면 된다."
할렌은 그라모트의 우려를 일축했다. 그라모트는 불안한 기색을 지우지 못하면서도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
아군 기병이 적의 뒤를 잡았다. 적은 떨쳐버리려는 듯 방향을 틀었으나 아군은 사냥감에 이빨을 박아넣은 늑대처럼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그러자 곧 적도 떨쳐내기를 포기한 듯, 다시 한번 방향을 틀었다. 이번엔 도망치려는 것이 아니었다. 따라붙은 아군을 요격하기 위함이었다.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졌다. 말과 말, 사람과 사람이 뒤엉켰다. 그 모습이 자그마한 점 정도로 보일 만큼 멀리 있음에도 현장의 치열함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시선을 끌기 위함인가.'
코르디 틸레노어는 눈을 가늘게 좁혔다.
그가 보기에 적은 조금 더 일찍 반응할 수 있었다. 퇴각을 서두를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아니, 그보다 애초에 뭘 해보지도 않고 퇴각할 것이었다면 왜 기껏 점한 고지에서 기어 내려왔단 말인가. 아군 술사들의 솜씨에 적이 당황했다고 보는 것은 지나치게 낙관적인 시각일 것이다.
'뭘 노리고 있지?'
당장 생각나는 것은 하나뿐이다. 흐르트리 파오의 목. 그것 외에는 떠오르는 것이 없다. 전력의 열세를 뒤엎을 만한 한 수는 대장의 목을 노리는 것뿐이다.
그렇기에 코르디 틸레노어는 아직까지 고지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는 적의 본대를 주시했다.
흐르트리 파오는 이미 충분히 앞으로 나가 있다. 그런 상황에서 적이 그를 노리고 움직이기 시작한다면, 자칫 불상사가 일어날 수도 있다.
"앞으로 움직인다. 4군이 있는 곳까지."
"예? 하오나 장군. 아직 명령이…"
"일이 벌어지고 난 후에 움직이면 늦다. 한발 앞서서… 음?"
반문하는 수하를 다그치던 중, 코르디 틸레노어는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동쪽에서 어렴풋이, 한 무리의 점을 발견함과 동시였다.
"이런!"
벌써 움직였나.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수하를 무시하고 다급히 걸음을 옮겼다. 직접 기수와 고수에게 명령을 해서라도 당장 군을 움직일 작정이었다.
"어?"
그러나 몇 걸음을 채 떼기도 전에, 그는 다시 한번 멈춰섰다.
'아니, 방향이……?'
착각일지도 모른다. 아마 그럴 것이다. 거리가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데다, 단순히 울퉁불퉁한 땅을 피하기 위해 살짝 방향을 튼 것일 수도 있으니.
하지만 코르디 틸레노어는 강한 위화감을 느꼈다. 그렇기에 머리로는 착각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하면서도, 몸은 생각과 다르게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