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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742화 (742/1,064)

742화

고지를 선점한다는 것은 장점도 있으나 단점도 있다. 장점이야 높은 곳에서 적의 움직임을 훤히 보고 대처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적이 공격해올 때 그것을 방어하기가 수월하다는 점 등이고, 단점은 군이 이동해야 할 때 발이 느려진다는 점이다. 경사가 진 땅은 오를 때도 문제지만 내려갈 때도 문제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볼 때, 군을 고지에 주둔시킨 것은 의도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결정이었다.

'버티겠다는 거지.'

키파의 성벽 뒤에 숨지 않고 여기까지 나온 것은 기껏 되찾은 인근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잃지 않겠다는 뜻일 터. 아무래도 적장은 일전의 승리로 인해 상당한 자신감을 얻은 듯했다. 뭐, 그럴 만도 하지만……

'이번엔 상대가 다르지.'

처음 잔카라스 데반의 뒤를 이었을 때 가졌던 불안감은 이제 조금도 남지 않았다.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과 곧 거머쥘 영광에 대한 열망만이 가득할 뿐.

어쩌면 머지않은 시일 내에 다가올 수도 있을 달콤한 미래를 상상하며 기분 좋게 웃던 중, 막사 밖에서 그의 흥을 깨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장군. 틸레노어 공께서 뵙기를 청합니다."

회의가 파한 지 얼마나 됐다고 독대 요청이란 말인가. 흐르트리 파오는 살짝 짜증이 일었으나 곧 들썩이는 기분을 가라앉혔다. 평범한 상대였다면 무슨 이유를 대서든지 돌려보낼 수 있겠지만, 안타깝게도 틸레노어라는 이름은 그렇게 해도 될 정도로 가볍지 않았다. 그건 저 밖에서 기다리는 '틸레노어 공'이 나이 어린 애송이에 불과하다고 해도 다르지 않다.

"장군. 피로하신 와중에도 시간을 내어주시니 감사할 뿐입니다."

"틸레노어 공이 날 만나길 원한다면 아무리 피로하다 해도 시간을 내야지. 그래. 무슨 일이오?"

틸레노어의 젊은이가 먼저 예의 바르게 숙이고 들어오자 흐르트리 파오의 언짢던 기분도 언제 그랬냐는 듯 풀렸다. 자연히 용건을 묻는 그의 목소리도 부드럽게 나갔다.

"조금 전의 회의에서도 말씀 올렸습니다만, 군의 배치에 관련한 일입니다."

"그 일에 대해서라면 이미 결론을 내지 않았던가? 이미 끝난 이야기를 다시 끌고 오려는 거요?"

그러나 상대의 용건이 무엇인지 알게 되자, 부드럽던 목소리에 순식간에 날이 섰다. 호의적이지는 않아도 적당히 풀려 있던 눈빛도 날카로워졌다.

"장군. 부디 재고해주십시오. 아시겠지만 적은 보통이 아닙니다. 키파를 포위하고 공성을 벌이던 때와는 상황이 다릅니다. 그때는 적이 도시에 묶여 있었으나, 지금은 야전입니다. 적이 어떻게 움직일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병력을 분산시킨다는 것은……"

"분산이 아니라 포위요. 아군의 병력이 적의 세 배에 가까운데, 넓게 포진하여 상대하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니겠소."

"부디 키라카 장군을 떠올리십시오. 그가 이끄는 북군은 얼마 되지 않는 적에 의해 패했습니다. 심지어 키라카 장군은 목숨까지 잃었었지요."

"나는 그와 다르오. 처해 있는 상황도 다르지. 적이, 군터 크렘보르가 내 목을 노리고 달려든다면, 그것은 오히려 바라는 바요. 내 두 팔 벌려 놈을 맞이해주리다. 놈이 나를 보고 덤벼드는 동안, 놈의 군대는 철저하게 무너질 것이고 놈 또한 결국 내 앞에 무릎 꿇게 될 거요."

반쯤은 욱해서 내뱉은 것이고, 반쯤은 진심이었다.

이전의 전투를 통해 배운 것은 단순히 적이 강하다는 것만이 아니었다. 그 강함이 어디서 나오는지, 직접 부딪치며 뼈저리게 깨달았다.

'군터 크렘보르, 놈과 놈이 이끄는 직속 부대. 분명 그 파괴력은 말이 안 되는 수준이다.

하지만 바꿔 말하면, 경계해야 할 것은 그 일부 병력이 전부라는 뜻이다.

"내 안위를 생각해주는 것은 고맙지만, 걱정할 것 없소. 몰드 키라카 장군은 실수를 저질렀소. 싸울 준비도 되지 않은 투항병들을 일선에 세운 게 바로 그것이지. 후에 듣자 하니 그놈들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겁에 질려 사분오열했다더군. 바로 앞에서 그런 혼란이 일어나니 본대마저 분위기에 휩쓸렸고, 결국 허망하게 적의 돌파를 허용한 거요. 하지만 나는 달라. 말했듯, 놈이 나를 노린다면 그것은 오히려 환영할 일이오. 난 몰드 장군과 같은 실수를 범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지."

'틸레노어 공' 이라 불린 젊은 무장은 심란한 눈빛을 숨기지 못했지만, 더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흐르트리 파오의 굳센 자신감과 고집을 느꼈기 때문이다.

'내가 무슨 말을 한다고 해도 소용이 없겠구나.'

'틸레노어 공', 코르디 틸레노어는 내심 한탄했다. 그는 잔카라스 데반이 떠나기 전, 은밀히 자신을 불러 당부했던 것을 떠올렸다.

'내가 실각한 것을 알면 적은 필시 아군의 새로운 대장을 떠보려 할 거요. 그리고 십중팔구는 적당히 그를 충동질하여 일전을 벌이려 들겠지. 누가 내 뒤를 이을지 모르겠으나, 부디 그가 폭주하지 않도록 그대가 잘 붙잡아 주시오.'

잔카라스 데반은 정말 여러모로, 속된 말로 표현하자면 여러모로 잘난 자였다. 그의 능력은 비단 병사를 부리는 데만 그치지 않았다. 사람을 보는 안목 역시 훌륭했는데, 그런 그는 현재 군내의 인사 중 인물이라 할 만한 자가 없음을 진즉에 간파하고 있었다.

'그대가 내 뒤를 이었으면 하지만, 그건 아무래도 어렵겠지.'

'과분한 말씀을 하시는군요.'

코르디 틸레노어 역시 틸레노어라는 명문 귀족가의 일원이었다. 그런 만큼 잔카라스 데반과도 우호적인 관계라고 하기는 힘들었다. 하지만 그런 정치적인 이유와는 별개로, 코르디 틸레노어는 잔카라스 데반을 상당히 높게 평가했다. 그렇기에 그가 자신을 인정하는 말을 했을 때는 조금 감동하기도 했다.

그래서였다. 점점 자신감이 과해지는 것 같은 흐르트리 파오를 어떻게 해서든 붙들고 싶었으나……

'미안합니다. 장군. 최선을 다했으나,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여기까지인 것 같군요.'

잔카라스 데반은 어쩌면 틸레노어의 일원인 자신이라면 어떤 상황이 되든 제 목소리를 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마지막에 해주었던 기분 좋은 이야기도 그를 위한, 일종의 뇌물이었을 수도 있고.

하지만 그는 잘못 생각했다. 물론 틸레노어라는 이름이 가벼운 것은 절대 아니지만, 이곳에는 자신 못지않은 고귀한 피들이 상당수 있다. 또한, 자신은 가문의 일원일 뿐 가문 전체가 아니다.

'설득은 틀린 것 같지만, 그렇다고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지.'

잔카라스 데반의 경고 때문이 아니더라도, 확실히 돌아가는 상황이 심상치 않았다. 흐르트리 파오는 대체 뭘 믿고 저러는지 모를 정도로 자심감에 차 있었고, 그만큼 상대를 경시하고 있었다. 설마하니 자기가 전임자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기라도 하는 걸까? 아니라고 믿고 싶지만, 저 우쭐거리는 얼굴을 보면 그런 것 같기도 했다.

'하아. 원신이시여. 부디……'

흐르트리 파오의 막사를 나오면서, 답답한 속을 달랠 수 없어 저 하늘 위에 있을 신을 찾아보았다. 그리고 그러다 문득, 한 가지가 궁금해졌다.

자신을 포함하여 이곳에 있는 이들 모두 원신의 신자다. 하지만 저기 있는 적들이라고 다를까? 그들 역시 지금쯤 긴장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신을 찾고 있을 텐데, 그렇다면 결전의 날에 원신은 어느 쪽의 손을 들어줄까? 신앙심이 더 깊은 쪽일까? 아니면 신자와 신자의 싸움이니 아예 눈을 뗄까?

'어처구니가 없군.'

코르디 틸레노어는 혀를 찼다. 대적과의 일전을 앞둔 중대한 시기에 이런 시시한 생각이나 하고 있다니. 아무래도 느슨해진 것은 흐르트리 파오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

둥! 둥! 둥!

선공은 흐르트리 파오가 시작했다. 고지를 점한 상대가 사흘째 꼼짝도 하지 않자, 그는 인내심을 잃었다. 서둘러 승리하고 싶은 욕심도 욕심이었지만, 적의 노림수가 시간을 끄는 데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이 컸다.

'그래. 그러면 말이 되지. 소수의 병력으로 다수의 적을 묶어둘 수 있다면, 시간만 끌어도 이득을 보는 것일 테니.'

제법 영악하지 않은가. 적장은 이쪽의 심리를, 두려움을 이용했다. 키파에서 겪었던 패배를 아직 잊지 못했음을 생각하고, 파격적인 움직임으로 혼란을 준 것이다.

"사흘을 날린 것은 아쉽지만, 이 이상 네놈의 잔꾀에 놀아나지는 않겠다."

흐르트리 파오는 깨달은 즉시 공격을 명했다. 귀족들은 그의 설명에 납득했고, 전고의 울음소리와 함께 군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전고의 울음은 모두가 들을 수 있었기에, 당연히 군터도 그 소리를 들었다. 사실 그는 전고가 울리기 전부터 전투가 일어날 것을 직감하고 있었다. 오늘 새벽에 눈을 떴을 때부터, 어제와는 공기가 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는 그 미묘한 차이를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장군! 적이 포위를 좁혀옵니다!"

일찌감치 전투준비를 마친 할렌이 뛰어 들어왔다. 그런 그의 옆에는 아들인 그라모트가 있었다.

묘한 기분이었다. 할렌이 보리스의 어린 시절을 기억하듯, 군터 역시 그라모트와 로우렌의 어렸을 적을 기억하고 있었다. 젖살이 빠지기도 전, 루시의 품에 안겨 있었던 때조차도 말이다.

어미의 젖을 바라며 시끄럽게 울어대던 녀석이 이제는 당당한 사내가 되어 아비의 곁에 있다. 그리고 아비를 따라 자신을 섬긴다. 그것은 어지간한 감정에는 다 무뎌진 군터에게도 묘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말없이 밖으로 나갔다. 병사들은 이미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당황한 기색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이곳에는 1만이 훌쩍 넘는, 거의 1만 6천에 달하는 병력이 모여 있었으나 그 많은 병사 가운데 잡병은 하나도 없었다. 본래 그의 휘하에 있던 병력은 물론이고, 프란시스 티브리악이 데리고 온 병력 역시 정예라 할만한 전력이었다. 그러니 그들은 이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 결코 동요하지 않을 터였다. 이미 요 며칠 동안 마음의 준비도 단단히 했겠고,

"준비는?"

"끝마친 지 오래입니다."

할렌의 담담한 대답을 들은 군터는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돌렸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선명하게 느껴지는, 뜨거운 시선만 아니었으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시선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찾을 필요도 없었다. 바로 앞에 있었으니까.

군터는 그를 보며 말했다.

"너도 함께 갈 테냐?"

"예."

"위험할 수도 있다."

"전장에 위험하지 않은 곳이 어디 있겠습니까. 또, 설령 제게 무슨 일이 생긴다고 해도 동생이 있으니 걱정 없습니다."

슬쩍 할렌을 보니 담담한 표정이었다. 이미 부자간에는 이야기가 끝난 듯했다.

"아들을 잘 키웠군."

"그저 안사람에게 미안할 뿐입니다."

멋쩍은 웃음. 군터는 할렌과 그라모트의 어깨를 한 번씩 두드려주고 몸을 돌렸다.

그리고 잠시 후, 다가오는 적에 맞서 군터의 군대도 행동을 개시했다.

***

"옵니다!"

코르디 틸레노어는 수하의 외침에 반응하지 않았다. 예상했던 대로, 먼저 움직인 것은 기병이었다. 경사진 땅을 평지 달리듯 내려오는 기병 사이사이로 익숙한 깃발이, 크렘보르의 문장기가 펄럭이는 것이 보였다.

'변함이 없군.'

대단한 자신감이다. 물론 저 휘날리는 깃발이 가짜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얼마 되지 않는 기병이 저렇게 대담하게 돌진해 오는 것을 보면, 저 선두에 군터 크렘보르가 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대로 들이치나? 아니면 시선을 끌면서……'

그대로 들이받을 것처럼 달려오던 적 기병은 어느 정도 거리가 좁혀지자 속도를 줄였다. 그리고 우측으로 크게 돌면서 기껏 좁혔던 거리를 다시 벌리기 시작했다.

"이런."

너무 거리가 멀어 대략적인 상황밖에 살필 수 없었지만, 코르디 틸레노어는 그것만으로도 적의 의도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저 기병의 선두에 군터 크렘보르가 있다고 한다면, 전열의 아군은 이미 그의 얼굴을 확인했을 터. 그렇다면……

'유인이다.

너무 뻔한 수작이 아닌가. 그러나 뻔히 읽힐 것을 알면서도 시도했다면, 그건 그 뻔한 수작이 먹히리라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이쪽으로서는 불운하게도, 그들의 짐작은 맞아떨어진 듯했다.

"본대가 움직입니다!"

유인책은 제대로 먹혔다. 무려 흐르트리 파오가 지휘하는 본대가 속도를 높이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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