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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741화 (741/1,064)

741화

"경하드립니다. 장군."

"내 공이 아니오. 놈들이 과욕을 부린 탓이지."

치켜세워주는 말에 겸양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꿈틀대는 입꼬리만 봐도 짐작할 수 있듯, 그의 속내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말을 꺼낸 자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달콤한 말을 멈추지 않았다.

"전장의 일은 결과가 전부입니다. 결과는 명확하니까요. 그리고 이 명확한 결과를 이끄신 분이 장군이라는 것 역시 명확하지요."

"하하. 알겠소. 알겠어. 허나 자그마한 승리일 뿐이오.. 놈들은 여전히 키파에서 웅크리고 있고, 우리에게는 어려움이 남아있지. 잔카라스 데반도 끝내 넘어서지 못했던……"

"잔카라스 장군은 개인으로서는 뛰어난 인물이었지만, 사람을 이끄는 도량은 부족했습니다. 반면 장군께서는 그에게는 없었던 도량까지 갖추셨으니, 그가 하지 못했던 일도 해내실 수 있을 겁니다. 그를 위해 저희가 힘껏 장군을 돕겠습니다."

기를 살려주려고, 혹은 자신에게 좋은 인상을 주려고 꾸며내는 말임을 알았으나 그래도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놈들이 욕심이 지나쳤던 게야. 잔카라스 데반을 이기고서 기고만장해진 게지.'

그는 적의, 군터 크렘보르의 오만함을 비웃었다. 그자가 보기 드물 정도로 용맹한 자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이번만큼은 그 용맹함이 오히려 독이 되었다.

'하긴, 그러고 보면 그런 놈들이 오히려 쉽게 무너지는 법이지.'

능력 있는 놈들은 스스로 능력이 있음을 안다. 그렇기에 자신감이 넘치고, 그 넘치는 자신감은 대개 오만함이라는 덫으로까지 발전하여 자신의 목을 조른다.

그가 보기에 군터 크렘보르가 딱 그 꼴이었다. 잔카라스 데반을 상대로 거둔 승리는 분명 객관적으로 봐도 놀라운 것이 맞지만, 그 놀라운 승리가 도리어 독이 된 것이다.

어찌 됐든, 그에게 있어 더 없이 기분 좋은 일임은 분명했다. 승리를 거뒀고, 덕분에 크게 저하됐던 병사들의 사기도 다시 올라왔다. 반면 적은 사기도 꺾였고, 여러 곳에서 패퇴하면서 병력도 줄었을 테니 잔카라스 데반이 거뒀던 패전의 피해도 복구한 셈이다.

'그러고 보면 패하긴 했어도 병력 손해는 그리 크지 않았지.'

포위는 길었으나 교전은 몇 차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나마 몇 번 있었던 교전도 본격적이라 할 만한 것은 첫 번째와 마지막 전투가 전부였고, 다만 그 마지막 전투에서 당시 북문을 공략하던 병력이 크게 상한 것이 다소 유감스러운 일이었다.

"놈들이 손을 뻗었던 지역은 이제 다 수복했소. 남은 것은 키파뿐."

부담되지 않는다면 거짓이다. 그러나 이번 승리로 깨달았다. 두려움은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쉬운 적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그동안 잔카라스 데반이라는 이름에 과하게 짓눌려 있었던 것 역시 분명하다. 그러나 이번에 거둔 승리가 그 불필요하게 무거운 짐을 덜어주었으니, 그의 마음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차올랐다.

"진군하라."

흐르트리 파오가 힘 있는 목소리로 명했다.

하지만 얼마 후,

"보고드립니다! 장군! 적이 데오프라드 인근에 집결하고 있습니다!"

전령이 전한 전혀 예상치 못했던 한 마디에, 흐르트리 파오의 눈썹이 크게 꿈틀거렸다.

***

병력의 차이를 논하기 전에, 이쪽은 이제껏 공세를 취한 적이 없었다. 줄곧 도시에 틀어박혀서 성벽을 방패 삼아 버티는 싸움만을 해왔다. 잔카라스 데반을 실각하게 했던 마지막 전투는 조금 예외적이었으나, 그 역시 성벽을 방패 삼고 싸웠다는 점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엔 다르다. 1만이 넘는 군대를 이끌고 도시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그들이 멈춰선 곳은 데오프라드. 흐르트리 파오가 키파로 오기 위해 지나야 할 길목.

이는 키파의 성벽 뒤에 숨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그리고 흐르트리 파오도 바보가 아닌 이상 그것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잔카라스 데반을 상대할 때는 잔뜩 웅크리고 있던 상대가 자신을 상대로는 이렇게 대담하게 나온다.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역시도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것은 도발이다. 주사위를 던졌으니, 이제 남은 것은 상대가 어떻게 나오느냐 뿐.

"조금도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군."

"피할 이유가 없으니까."

떡하니 길목에 버티고 선, 그것도 아군보다 훨씬 적은 적을 못 본 척한다는 것은 겁을 먹었다고 자기 입으로 떠들어대는 것과 마찬가지. 물론 일군을 이끄는 지휘관이라면 상황에 따라 개인의 자존심 따위는 얼마든지 버릴 수 있어야 하지만, 이번은 경우가 다르다. 흐르트리 파오는 그의 위엄이 꺾이는 것을 바라지 않을 테니까. 비록 그 위엄이라는 것이 고작 자잘한 승리 몇 번으로 세운 것이기는 해도 말이다.

또한, 그는 휘하 귀족들이나 병사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감에 차 있지 않겠나. 어쩌면 본인이 잔카라스 데반보다 나은 것이 아닌가 하고 진심으로 고민하고 있을지도 몰라."

"우습기 짝이 없어. 하지만 나는 그 잔카라스 데반이라는 자도 그리 대단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네.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패퇴하여 실각까지 하지 않았나."

"결과만 놓고 보면 그렇지. 하지만 일의 성패만 놓고 사람을 판단할 수는 없어. 여러 상황에 영향이 받기 마련이니까."

"그 상황을 이용하거나, 극복하는 것 또한 능력 아닌가."

"그것도 맞는 말이기는 해. 음…그럼 상대가 안 좋았다고 해두지. 잔카라스 데반이 괜찮은 인물이기는 했으나 우리 장군에는 미치지 못했다. 정도로."

"자네는 머리 쓰는 것만큼이나 말재주도 뛰어나군."

뜬금없는 칭찬에 시어문드는 힐끗 할렌을 쳐다보았다. 반백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의, 푸석푸석한 머리카락이 잔잔한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후회하지는 않나?"

이제 알 사람은 다 알았다. 할렌이 금술을 사용했으며, 그 대가를 치르고 있다는 사실을, 누군가는 미련하다고 혀를 찼고, 누군가는 침묵했다. 시어문드는 굳이 따지자면 후자 쪽이었다. 그는 할렌의 선택을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존중했다.

"내겐 자네와 같은 재주가 없네. 내가 장군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이 칼을 한 번이라도 더 휘두르는 것 정도지. 처음 그분을 따라 전장에 나갔을 때부터 줄곧 그랬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인가, 몸이 말을 듣지 않더군. 나만큼, 아니 나보다 더 오랫동안 장군을 따랐던 살라스님은 여전히 정정하신데 말이야. 그리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하고 화가 나더군. 나 자신이 한심해서일까, 아니면 유치한 질투였을까. 모르겠지만, 어쨌든…쇠락해가는 나 자신이 도저히 용납되지 않았다네."

"사람이 나이가 들면서 몸이 삐걱거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세."

"하지만 살라스님은 그렇지 않았지. 장군님은 말할 필요도 없고, 오직 나만 뒤처지는 것 같은……자네는 그게 무슨 느낌인지 아나?"

"아니. 나름대로 짐작은 가지만, 자네 앞에서 입을 놀릴 정도는 아닌 것 같군."

"끔찍한 기분이라네. 아무짝에도 쓸모없어진 것 같지. 참을 수 없을 만큼 굴욕적이야."

주름진 입가가 슬쩍 올라갔다. 그때 시어문드는 할렌이 웃는 것을 보는 게 오랜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왜 자네에게 이런 말을 주절대고 있는지 모르겠어. 꼴사나운 모습을 보여서 미안하네."

"아니.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네."

"뭐가 말인가?"

"꼴사납다는 것 말이네.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누구에게나 저마다의 가치관이라는 것이 있지. 누군가에게는 이상해 보일지 몰라도, 당사자에게는 절대 굽힐 수 없는… 그런 것이 누구에게나 있는 법 아니겠나."

"자네에게도 그런 것이 있나?"

"물론, 왜 없겠나."

할렌은 그게 뭐냐고 묻지 않았다. 그는 그런 소소한 비밀 따위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어 보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의 시선은 저 먼 곳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라모트는?"

"군무에 대해 논할 일이 있다고 했네. 그러고도 떼어놓느라 고생했지."

"지극정성이야. 자네 아들 하나는 참 잘 키웠어."

"많이 놀란 것 같긴 하더군."

"어찌 안 놀라겠나? 자네 안사람이 이곳에 없는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게."

"이미 그러고 있네."

겨울바람을 맞아 누운 풀처럼 메말라 있던 할렌의 얼굴에 한 가닥 감정의 편린이 떠올랐다. 특정할 수는 없었지만, 그것과 가장 가까운 감정을 꼽으라면 그건 아마도 미안함이리라.

"이만 들어가게나. 자네 아들이 기다리겠군."

"자네는?"

"장군을 뵈어야겠어. 앞으로의 전투에 대해 드릴 말씀이 있거든."

할렌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

"어리석은 놈들. 한번 요행이 따라주었다고 간이 배 밖으로 나온 모양입니다."

요행이라……흐르트리 파오는 그 대목에서 내심 고개를 갸우뚱했으나 굳이 정정하지는 않았다. 그 역시 기가 찬 것은 마찬가지였기에.

보고 대로였다. 적은 이 데오프라드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아니, 자리를 잡은 정도가 아니라 아예 본격적으로 진을 쳤다. 고지를 선점한 채, 이쪽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잘 되었습니다. 이참에 끝을 내시지요. 이곳에서 놈들을 섬멸한다면 키파에서의 공성은 한층 더 손쉬워질 것입니다."

일전을 갈망하는 이들의 뜨거운 시선 때문이 아니더라도, 흐르트리 파오는 그리 할 생각이었다. 이렇게 대놓고 도발을 하는데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나.

'나를 무시해도 정도가 있지.'

적이 고지를 선점하여 치러 들어가기가 쉽지 않지만, 그 때문에 반대로 적도 버티기는 쉬울지언정 물러나기는 어려웠다. 정말 이곳에서 결착을 볼 생각이라도 했다는 말인가? 병력차가 세 배에 가까운데?

'잔카라스 데반이 나를 위해 큰 선물을 해주는구나.'

잔카라스 데반을 상대로 거둔 승리가 군터 크렘보르에게 있어 독이 되어버렸다는, 그런 생각까지 들었다.

"길게 포진하여 포위하라. 퇴로는 열어두되, 최대한 압박하는 거다."

자신감에 차 명령을 내리는데, 한쪽에서 불쑥 달갑지 않은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장군. 재고해주십시오. 병력을 흐트러뜨려서는 안 됩니다. 놈들의 기병은 그 돌파력이 상상 이상이니, 흩어지기보다는 밀집하여 상대해야 합니다."

흐르트리 파오는 순간적으로 눈살을 찌푸릴 뻔하였으나 애써 표정 관리를 하며 상대를 쳐다보았다.

준수한 외모의 젊은 무관이고, 귀족이었다. 틸레노어 가문의 후계자. 또한 잔카라스 데반의 몇 안 되는 추종자.

"놈들이 기병으로 밀고 들어 온다면 두 팔 벌려 환영할 일이 아니겠소? 보시오. 저 정도의 경사에서 말을 달린다면 보병은 보조를 맞출 수가 없소. 그렇다면 기병만이 덩그러니 남는 셈이지. 가뜩이나 적은 병력이 둘로 나뉜다면 그것도 좋은 일일 테고."

일리 있는 말이다. 흐르트리 파오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틸레노어의 후계자는 쉽게 물러설 생각이 없는지, 반박하려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흐르트리 파오가 손을 들었다.

"그만, 생각이야 다 다를 수 있으나, 이 군대를 이끄는 것은 나요. 그리고 내가 보기에, 설령 그대의 말처럼 적이 밀고 내려온다고 해도 크게 위협적일 것 같지는 않소. 그러니 그 말은 못 들은 것으로 하겠소이다."

단단한 고집이 느껴지는 한 마디에, 젊은 무관은 몇 번 입술을 달싹이는가 싶더니 곧 고개를 푹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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