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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740화 (740/1,064)

740화

남다른 기개가 있거나, 혹은 속에 품은 야심이 있거나.

지금 눈앞에 있는 사내가 어느 쪽일지는 굳이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이글거리는 눈만 봐도 어느 쪽인지는 명확했으니.

"두렵지는 않았나? 자칫 잘못했으면 자네는 물론, 자네 가족과 친지들까지 모조리 목이 날아갔을 터인데."

"어차피 그대로 목숨줄을 조금 더 붙들고 있었더라도 그 끝은 비참했을 겁니다. 엊그제는 식량을 내놓으라더니 어제는 냄비며 식기를 내놓으라더군요. 오늘 놈들이 살아있었다면 이제 갓 열 살이 된 아들 녀석을 내놓으라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 꼴을 눈 뜨고 보느니 차라리 목숨을 걸 수 있을 때 걸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용감하군."

"용감하다고요? 아니요. 아닙니다. 전 이 성에서 가장 형편없는 겁쟁이입니다. 품에 쥔 것을 잃기 싫어 나머지를 내주고 내주다가, 결국 마지막 남은 것마저 빼앗길 지경에 이르러 겨우 발악 한번 해본 겁쟁이일 뿐입니다."

말솜씨도 꽤 괜찮다.

"뭐, 자네는 스스로 그리 생각할지 몰라도 내 생각은 조금 다르네. 어쨌든 좋아. 자네의 이름은?"

"비드라라고 합니다."

무엇보다 마음에 든 것은 당당함이었다. 입으로는 자신을 낮추고 있는데, 어깨는 조금도 움츠러들지 않았으며 눈빛은 형형했다. 그리고 잘 단련된 몸을 보아하니 주먹이나 칼도 꽤 쓸 것 같았다.

"좋아. 비드라. 난 돌려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날 따를 마음이 있나?"

"장군을 따른다면 저는 무엇을 얻을 수 있습니까?"

"이곳에 남는 것보다는 더 나은 삶. 그 이상은 자네에게 달렸지."

"따르겠습니다."

보리스는 비드라와 그의 가족을 모두 거두었다. 비드라는 자신과 함께한 이들이라며 성의 장정 십여 명을 소개했는데, 보리스는 그들도 모두 받아들였다. 그들의 눈에 서린, 비드라와 비슷한 독기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생각보다 쉽게 끝났군요."

로우렌의 말에 보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지. 남은 곳들도 이렇게 순조로웠으면 좋겠다만…"

"아마도 그렇지 않겠습니까? 역적 놈들의 전횡이 보통이 아닌 듯합니다. 이곳의 백성들은 모두 불만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누군가 등 떠밀어주기를 기다리고 있었지요. 다른 곳이라고 사정이 다를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래. 그렇겠지."

좋아해야 하는가, 화를 내야 하는가. 굳이 고르라면 전자겠지만, 마음이 썩 편안하지 않았다. 그건 아마도 그가 태생부터 귀족이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날 때부터 귀족이었던 자들은 신분이 낮은 이들을 위해 감정을 소모하지 않으니까.

그의 절친한 벗이자 이제는 가족이기도 한 자밀은 그에게 익숙해져야 할 것이라 말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그때는 그러려니 했지만…시간이 지날수록 정말 그럴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귀족이라고 다 같으라는 법은 없지 않은가. 어차피 억지로 그들 사이에 끼어들 생각도 없고.'

멀리 갈 것도 없이 그의 부친만 해도 전혀 귀족적이지 않지만, 지극히 귀족적인 귀족들에게 부족함 없이 존중받고 있다. 혹은 경계심을 사거나.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은 힘이라는 거지.'

아직 많이 보고 겪었다고 할 수는 없어도, 보리스는 자신이 어느 정도 귀족 사회의 본질을 깨달았다고 자부했다. 그건 그의 눈치나 머리가 비상해서가 아니라, 귀족들의 생리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너무나 간단명료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교묘하게, 그럴듯하게 꾸민다고 해도 결국 모든 것은 힘의 논리에 의해 돌아간다. 보리스는 주도이자 왕도이며, 어떤 이들은 새로운 황도라고까지 떠들어대는 테리브란에 있으면서 그 간단한 이치를 확실히 깨달았다.

'나만이 쓸 수 있는, 나만의 수하들이 필요해.'

지금 그를 따르고 있는 병사들은 그가 훈련 시킨 병사들이었지만, 엄밀히 따지면 그의 병사가 아니라 테리브란의 병사들이었다. 언제든 그의 보직이 변경되면 잃게 되는 병사들이란 말이다.

보리스는 그만의 수하, 그만의 병사를 원했다. 귀족들이 거느린 사병과 비슷하지만, 그보다 더 충직하며 용맹스러운 이들을..

'더 잃을 것도 없이 악만 남은 자들이다. 내가 이들의 빛이 되어준다면 이들은 나를 위해 목숨 바쳐 싸우겠지.'

로우렌의 조언은 그럴듯했다. 보리스는 그의 조언에 귀를 기울이면서도 동시에 경계했다.

'이롭지만, 동시에 내게 해로울 수도 있는 꾀다.

로우렌은 그의 형제인 그라모트보다는 물론이고, 여느 머리 좀 쓴다는 이들과 비교해도 특히 꾀가 많았다. 그러나 그의 꾀는 종종 선을 넘나드는 면이 있어, 적절히 가려서 쓰지 않는다면 자칫 돌이킬 수 없는 길로 빠져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기에 보리스는 로우렌을 신임하면서도 동시에 경계했다.

"그라모트는 아직인가?"

"예. 지극정성입니다. 제 형님이 그렇게 효자였을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뭐가 그렇게 꼬인 거냐."

"꼬이다니요? 그저 놀란 것뿐입니다. 아주 감탄했지요. 같은 배에서 나고, 같은 부모 밑에서 자랐는데도 형과 동생이 어찌 이리도 다를까요."

보리스가 조용히 눈살을 찌푸렸다.

뒤에 덧붙인 말은 그라모트와 로우렌을, 그들 형제를 아는 이들이 종종 그들 형제를 비교하고, 동생인 로우렌이 형인 그라모트만 못하다며 혀를 차며 하는 말이었다.

그런데 그 말을 당사자인 로우렌이 입에 담는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그의 비틀린 심사는 타인들은 물론이고, 이제는 제 형에게까지 향하고 있었다.

"네가 할렌님과 사이가 원만하지 못하다는 것은 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네 부친이 아니냐."

"공자님까지 그리 말씀하십니까."

"호칭에 유의해라. 이곳은 전장이다."

"하지만 방금 그 말씀은 전장에서 하실만한 말은 아니었지요."

로우렌이 삐딱하게 나오자 이제 보리스도 대놓고 인상을 찌푸렸다.

"뭐가 그리 불만이냐."

"불만은 제가 아니라 공자님께서 갖고 계신 듯합니다. 제가 제 형처럼 온종일 아버지의 곁에 머물기를 바라십니까? 허나 제가 그리 하고 싶어도 제 아버지께서 그것을 원치 않으실 겁니다. 능글거리는 제 얼굴을 보면 속이 답답해지실 테니까요. 그러니 제가 진정 아버지의 건강을 위한다면 눈치껏 눈길이 닿지 않는 곳으로 피해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로우렌이 이렇게까지 나오니 보리스도 더는 이야기 하지 않았다. 가족처럼 가까운 사이라고 해도 가족은 아니었다. 이 이상 참견하는 것은 누구에게도 득이 되지 않을 것이다.

"이번에 거둔 이들 말이다. 네가 보기에는 어떻더냐."

화제를 돌리자 로우렌의 목소리도 다시 평소대로 돌아왔다. 꼬인 심사는 여전히 표정에서 드러났지만, 그래도 일 이야기로 돌아오자 감정을 추스르려고 노력하는 듯했다.

"쓸만해 보입니다. 체격도 그럭저럭 괜찮고, 무엇보다 눈에 독기가 가득한 것이 아주 마음에 듭니다. 부디 그 독기가 오래도록 유지되었으면 좋겠습니다만…."

"이상한 생각은 하지 마라. 그들이 내게 충성한다면, 난 그들을 중히 쓸 것이다."

"좋은 말씀입니다만, 그들이 진정 장군께 충성하는지 어떤지를 어찌 알겠습니까? 끊임없는 시험이야말로 그들의 충성을 확인할 유일한 방법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눈으로 바라보고 계시지만, 장군께서도 제 말이 옳다는 것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네 그 건방진 주둥이를 한번 뭉개놔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을 뿐이다."

보리스가 낮게 으르렁거리자 능글거리던 로우렌도 찔끔하며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어렸을 적부터 함께 자라다시피 하며 서로에게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그들이었지만, 로우렌은 아직도 가끔 보리스가 이렇게 정색을 할 때면 섬뜩한 두려움을 느끼곤 했다. 지금도 그렇다. 뒷덜미가 서늘한 것이, 여기서 더 뻗대다가는 필시 좋지 못한 꼴을 보게 될 것이 분명했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장군께서도 아시다시피, 이몸이 가끔 멋대로 날뛰는 주둥이를 주체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그 말썽 피우는 주둥이를 다스릴 생각은 없는 모양이군."

"으음. 노력하고 있습니다."

"내 눈엔 그 노력이라는 것이 보이지 않는데?"

"장군의 눈에도 보일 정도로 더 노력하겠습니다."

보리스가 혀를 찼다. 굳은 표정은 어느새 풀어진 뒤였다. 순간 욱하는 마음이 들었었지만, 이렇게 투닥거린 것이 하루 이틀이 아니기에 감정은 금방 가라앉았다.

"그나저나 참으로 잔인하지 않습니까?"

"뭐가 말이냐."

보리스는 로우렌과 함께 성내를 거닐었다. 안에서의 호응 덕에 큰 전투 없이 성을 함락시킨 터라 거리는 깔끔했다. 그리고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얼굴 또한 밝았다.

로우렌은 바로 그 밝은 얼굴로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보며 잔인을 운운했다. 보리스는 그것이 이해가 되지 않아 고개를 갸웃거렸다.

"시어문드 공 말입니다. 그가 이 계획을 세운 장본인 아닙니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

"저들은 우리를 해방군이라고, 구원자라고 여길 테지요. 일부는 맞는 말이지만, 어디까지나 일부가 아닙니까. 적들이 다시 밀고 내려오면 우리는 적당히 싸우는 시늉만 하다가 물러날 테니까요."

"희망을 모르면 절망도 모릅니다. 바꿔 말하면, 희망을 알기 때문에 절망을 아는 것이지요. 그러니 결과적으로, 시어문드 공은 이들에게 진정한 절망을 안겨준 셈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입을 조심해라."

"염려 마십시오. 이곳에서 감히 누가 장군의 이야기를 엿듣겠습니까. 그보다, 장군께서는 어찌 생각하십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제가 세상사를 다 알지는 못하지만, 대개 비극적인 일들은 어쩔 수 없는 이유로 일어나더군요."

말이 궁해진 보리스가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로우렌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답을 재촉하는 대신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이 성벽 위에 걸린 새로운 깃발을 담았다.

"아마 이들은 이전보다 더 혹독한 시련을 겪게 될 겁니다. 오만한 자들이 자존심에 상처를 입으면 더욱 사나워지는 법이니까요."

로우렌의 불길한 말은 며칠 지나지 않아 현실이 되었다. 5천이 넘는 적 병력이 북쪽 구릉에서 모습을 드러냈고, 보리스는 휘하 병력을 이끌고 적을 요격했으나 오래지 않아 패퇴하였다. 그에 승전을 기원하며 가슴을 졸이고 있던 성내의 백성들은 좌절했다. 그들을 찾아온 희망은 열흘도 되지 않아 지독한 절망으로 모습을 바꾸었고, 그들은 이전보다 더한 끝 모를 시련이 다가왔음을 직감했다.

***

"군내에 불만이 크게 일고 있소. 알고 있겠지."

"물론, 그나저나 몸은 괜찮으시오?"

"염려할 필요 없소."

시어문드는 담담히 답하는 할렌을 힐끗 쳐다보았다. 솔롬을 떠나올 때에 비해 확연히 초췌해진, 아니 초췌하다 못해 늙어버린 그의 모습이 여전히 낯설었다.

'금술이라니.

같은 군인이고 무인이지만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나 이해를 하고 못하고를 떠나, 그 정신력…혹은 집념만은 인정할 만했다.

그런 속내 때문일까. 시어문드의 목소리가 절로 조심스러워졌다.

"싸웠다 하면 연전연패. 게다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수복한 땅을 내어주고 있지. 불만이 생기지 않는 것이 이상한 일이오."

"괜찮소. 우리 측의 불만이 쌓이는 것 이상으로 적의 오만함이 늘어날 테니."

"정말 이게 최선인가?"

"최선이오."

그로서는 드물게, 시어문드는 단호하게 답했다.

"적군의 규모는 우리보다 훨씬 거대하지. 적이 전선을 늘이거나 대치국면으로 가고자 한다면 우리로서는 막을 방도가 없소. 그러니 그렇게 되기 전에 승부를 봐야 하는 거요."

"회전(會戰)."

"바로 그렇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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