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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739화 (739/1,064)

739화

흐르트리 파오는 자신에게 향한 시선들에 부담감을 느꼈다.

분명 그는 상석에 앉아있었음에도, 좌우에 늘어 앉아있는 그들의 눈빛에서는 조금의 존중도 보이지 않았다.

'하아. 내가 어쩌다 이런 꼴이.'

앉고 싶어서 앉은 자리가 아니다. 등 떠밀렸다는 표현이 정확할 것이다. 누군가는 앉아야 하나, 책임과 위험이 막중한 자리. 물론 그런 만큼 잘 되었을 때는 달콤하다는 말로도 부족할 과실을 손에 쥐게 되겠지만…

'그게 쉽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서로 발을 빼기 바빴던 게지.'

잔카라스 데반을 실각시키는 것까지는 모두가 한마음이었다. 그러나 그 후의 일에 대해서는 뜻이 갈리고, 치열한 눈치싸움이 벌어졌다. 그리고 그 싸움의 결과가 이것이다.

'원해서 앉은 자리는 아니지만, 이왕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지 않은가.'

결과를 낸다. 그리고 잔카라스 데반의, 아니 그보다 더 큰 명성을 얻는다. 잔카라스 데반은 실패했으나 자신은 성공한다면 자연히 흐르트리 파오라는 이름이 널리 알려지지 않겠는가.

바라마지 않던 기회다. 생에 다시 오지 않을 기회일 것이다. 하지만 흐르트리 파오는 가슴 뛰는 와중에도 이성을 유지했다.

'저들의 생각처럼, 쉽지 않은 일이다. 어쨌든 그 잔카라스 데반도 실패하지 않았는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던 그자를 별로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그 능력만큼은 인정했다. 그렇기에 그 잔카라스 데반이 실패한 일을 자신이 이어받았다는 것에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부담감에 짓눌리기만 하지는 않았다. 어려운 일임은 분명하지만, 그래도 충분히 할만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와 달라. 놓인 상황도 다르지.'

잔카라스 데반은 휘하 귀족들의 견제 속에서 적과 싸워야 했다. 반면, 그는 귀족들의 지원을 등에 업고 싸울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커다란 짐 하나를 덜고, 반대로 강력한 우군을 얻고 시작하는 셈이다.

'할 수 있다.'

또한, 흐르트리 파오는 잔카라스 데반이 재능있는 지휘관이었음은 인정했으나 자신 역시 그에게 크게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잔카라스 데반은 일찍이 기회를 얻어 그의 능력을 보였으나 자신은 아직 그럴 기회를 맞이하지 못했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부족한 몸이지만, 이렇게 된 이상 최선을 다하겠소."

그는 가까운 자리에 앉은 이들부터 멀찍이 떨어져 앉은 이들까지 하나하나 눈을 마주쳤다.

"그대들도 모두 알고 있을 거요. 이제 우리에게는 뒤가 없소. 패배를 명분으로 잔카라스 데반을 축출했으나, 그것은 급한 불을 끄는 정도에 불과했소. 즉, 패전의 멍에는 우리도 지고 있다는 말이외다."

가장 크게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은 군을 이끈 잔카라스 데반이다. 그러나 그 휘하의 장수들, 특히 귀족들도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흐르트리 파오는 그들에게 그것을 상기시켰다. 몇몇 귀족들이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으나, 흐르트리 파오는 눈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이 자리가 내가 원해서 앉은 자리가 아니라는 것은 여러분들도 잘 알 거요. 물론 그렇다고 0도 나는 내 책무를 회피하거나, 소홀히 할 생각은 조금도 없소. 다만 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여러분들도 이제는 모든 힘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 우리 모두를 위해서."

잔잔한 압박에 불쾌해하는 이들도 있었으나, 반수 이상은 동조하는 기색을 보였다. 그들도 아는 것이다. 이번이 두 번째이자 마지막 기회라는 것을.

잔카라스 데반은 황자의 총신이었다. 쥬드 포트락과도 좋은 관계에 있다는 소문이 돌았고, 그런데 그런 자를, 명분이야 있었다지만 어쨌거나 쳐냈으니 눈치가 보일 수밖에 없다. 그런 상황에 다시 한번 실패를 겪는다면, 그때는 후환을 감당하기가 쉽지 않을 터. 그런 곤란한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이들은 승리를 위해 적극적으로 협조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

"흐르트리 파오?"

군터는 조금 전 들은 생소한 이름을 되뇌었다. 그의 수하들 역시 그와 비슷한 반응이었다. 여기 모인 이들 가운데 그런 쪽으로 귀가 제일 밝은 시어문드조차도 그런 이름은 처음 듣는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이름이 난 자는 아닌 것 같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무능한 자일 거라는 뜻은 아닙니다만, 어째 화살받이로 선택된 자일 거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군요."

"화살받이?"

"잔카라스 데반이 대표격으로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고 해도, 그들 역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한 번 정도야 그런 식으로 넘어갔을지 모르나 두 번은 힘들지요. 그러니 만약의 상황을 대비해서 방패를 내세운 거라고 보입니다."

"싸우기도 전에 질 경우부터 따지는 건가."

"본디 생각이 많은 족속 아닙니까. 아, 티브리악 장군.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프란시스 티브리악이 웃으며 손을 저었다.

"괜찮네. 나 또한 같은 생각이야. 귀족이라고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확실히 그런 자들이 많긴 하지. 그 어떤 순간에도 자신의 이득을 생각하는 자들. 그들의 탐욕은 같은 귀족인 나조차도 이해하기 어려울 때가 많아."

"대귀족의 일원이신 티브리악 장군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면 틀림없겠군요."

듣는 이에 따라서는 아슬아슬한 줄타기처럼 들릴 수 있는 농담이 가벼운 분위기 속에 오갔다. 이는 프란시스 티브리악이 대귀족치고 상당히 융통성이 있는 사내였기에, 그리고 상석에 군터가 앉아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아무리 나름 장수라고 하지만, 평민 신분인 시어문드가 대귀족 티브리악의 후계자를 앞에 두고 이런 농담을 할 수 있었겠는가.

어쨌거나 시어문드의 농담 덕에 조금 무거웠던 분위기가 풀어졌다.

"공자님과 할렌이 성공적으로 일을 마쳐준 덕에 숨통이 조금 트였습니다만, 여전히 아군이 고립된 형국입니다. 하여, 여기서 조금 더뻗어보는 것이 어떨까 싶습니다."

동쪽, 즉 후방뿐 아니라 북쪽과 남쪽, 나아가 서쪽까지도 병력을 보내자는 말이다. 키파의 권역은 물론, 잔카라스 데반이 함락시킨 영역을 회복하자는 뜻.

"그렇게 한들, 적이 다시 몰려온다면 다시 잃게 될 땅이 아닌가."

"적어도 시간 정도는 벌 수 있겠지요. 그리고, 일전에 해둔 작업 덕에 민심이 들끓고 있습니다. 조금만 자극해주면 그들의 끊는 마음을 행동으로 표출시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호오."

민심이라는 것은 참 오묘하다. 그것이 자잘하게 끓을 때는 아무런 힘도, 의미도 없는 것 같지만 그들의 끓는 마음이 일정 수준을 넘어서는 순간 양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성난 들소가 되어 사납게 들이받는다.

프란시스 티브리악은 민심이 얼마나 유용한 것인지, 그리고 한편으로는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잘 알았다.

민심은 무기와 같다. 잘 사용하면 더없이 유용하지만, 다루는 자도 스스로 베이지 않게 조심해서 다뤄야 하는 위험한 무기.

그리고 대개 그 위험한 무기를 다루는 것은 가진 것이 많은 이들, 즉 귀족이고 권력자들이다. 현명한 귀족은 거느린 백성들의 마음에 귀를 기울이고 민감하게 반응하기 마련이다.

'특이한 자로군. 시야가 넓은 건가.

보통의 무장은 이런 식견을 가지기 어렵다. 그들이 어리석어서가 아니라, 그런 쪽으로는 아예 생각 자체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간혹 민심이 어쩌고저쩌고 떠들어대는 자들은 있어도, 이렇게 직접 그것을 활용하는 자는 거의 없다. 시어문드라는 이름의, 겉보기에는 특별할 것없어 보이는 무장은 그런 면에서 상당히 독특했다. 능력이 있고 없고를 떠나, 이런 발상을 한다는 자체만으로도 프란시스 티브리악은 시어문드를 다시 보았다.

"지금 그들의 인내심은 한계에 다다라 있습니다. 이때 우리가 나서서 그들의 분노를 자극한다면, 그 분노는 곧 용기로 바뀔 겁니다. 아니, 그렇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지 않는다면 기껏 쌓인 분노가 체념과 좌절로 바뀔 것이기 때문이지요."

단순히 거론하고, 이용할 줄만 아는 것이 아니다. 민심에 대해 정확히 파악하고 있지 않은가.

"일리 있군. 좋은 생각 같습니다."

프란시스 티브리악은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을 돌렸다. 군터 크렘보르는 여전히 무뚝뚝한 표정이었다.

'도무지 속을 알 수가 없단 말이지.

이곳에 와서 그를 조금씩 관찰하면서, 그가 감정이 없는 괴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 의심 아닌 의심을 거둔 것은 보리스 크렘보르 때문이었는데, 하나뿐인 아들은 저 군터 크렘보르가 유일하게 감정을 드러내는 상대였다. 피부가 돌로 된 것 같은 사내도 제 새끼는 아낀다는 걸까.

"정해진 것 같군."

거창하게 설명하기는 했지만, 사실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적군은 여전히 서쪽 펑겐 부근에 주둔하고 있다. 했으니 키파 인근, 최소 닷새 거리 내의 지역을 수복하는 것은 마음만 먹으면 당장이라도 할 수 있었다.

***

그리 높지 않은, 견고함과는 거리가 있어 보이는 성벽 위에 일단의 병사들이 서 있었다. 그들은 저 멀리 구릉 쪽을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그곳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점점 가까워지고 있는 적을.

"두려워 마라! 이미 이틀 전에 전령이 움직였다! 한나절. 딱 한나절만 버티면 원군이 당도할 것인즉! 버티기만 하면 우리는 승리할 것이다!"

아까부터 계속 반복하고 있는 저 말이 별로 위안이 되지는 않았지만, 그나마 믿을 구석이라고는 한나절 뒤에 당도한다는 원군뿐이었다.

그리 미덥잖은 희망. 그들은 그것으로 두려움을 이겨냈다. 그것은 그들이 잘 훈련받은 정예병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저, 장군."

"음? 뭐냐?"

남쪽 성벽의 수비를 맡고 있던 장교는 그를 찾는 젊은 사내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사내는 이 성의 주민이었다. 일개 주민이 지금 같은 순간 그를 찾아올 수 있는 까닭은 그가 이 성에서 특별 대우를 받는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이기 때문이었다. 처음 이 성을 점령했을 때부터 앞장서서 순종하는 모습을 눈여겨보았고, 그렇기에 이성의 주민을 대표하는 인사 중 하나로 삼았다.

이제껏 그는 마치 입안의 혀처럼, 조금도 거슬리는 구석 없이 잘 따라왔다.

하지만 지금, 처음으로 그가 거슬렸다. 분위기를 읽지 못하는 걸까? 눈치 없이……

"그, 그것이…저희도 뭔가 도울 일이 없을까 싶어……"

까칠한 반응에 움찔한 사내가 말끝을 흐렸다.

"너희가 할 일이 생기면 그때 가서 명할 것이다. 지금은 일단 돌아가 자리를 지켜라."

"아, 예. 하, 하옵고 장군. 소인 장군께 드릴 것이 있습니다."

"내게?"

사내가 조심스럽게 앞으로 다가왔다. 장교는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사내가 품속에 손을 넣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푸욱!

반응하지 못했던 것은 방심한 탓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세 걸음을 단숨에 좁히며 품안으로 파고든 사내의 움직임이 놀라울 만큼 빨랐기 때문이었다.

"너, 너 …!"

조금 전까지 비굴하게 고개 숙이던 사내는 언제 그랬냐는 듯 서늘한 눈빛을 빛냈다.

"너무 억울해 마라. 곧 네 동료, 부하들 모두 네 뒤를 따를 테니."

사내는 씹어뱉듯 한 마디 한 마디를 뱉으며, 양손으로 쥔 작은 칼을 힘주어 밀어 넣고 비틀었다. 그러자 컥! 하는 소리와 함께 장교의 몸이 무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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