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8화
잔카라스 데반이 실각했다.
그 소식은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군터의 귀에 들어왔다.
처음 그 소식을 들었을 때, 군터는 잘못된 정보가 아닌가 의심했다.
비록 잔카라스 데반이 결과적으로 패전을 한 것은 사실이었으나 그렇다 해도 그의 공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군대를 이끌고 십수 개의 성과 몇 개의 도시를 함락시켰다. 키파를 제외하고, 아록과 리바스트라의 경계를 끊어버리다시피 하기도 했다. 따지고 보면 그의 실패는 키파에서의 한번이 전부인 것이다. 이전의 공이 있는 장수를 한 번의 패전으로 실각시킨다? 그것만으로도 고개가 갸웃거려지지만, 거기까지는 이해할 수 있다고 치더라도……
"적과 마주하고 있는 일선의 장수를 해임하려면 그만한 명분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이번엔 그런 명분이 없군요."
소식을 접한 시어문드도, 프란시스 티브리악도 같은 말을 했다. 그들도 이상한 결정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프란시스 티브리악은 고개를 저으면서도 아주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라고 했다.
"아마도 그자는 정치 논리에 휩쓸린 걸 겁니다. 잘난 사람은 잘나지 않은 자들의 시기와 질투를 사는 법이니, 잔카라스 데반도 그를 싫어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을 테지요."
"고작 그런 이유로?"
"장군. 고작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정치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전쟁조차도 정치의 한 형태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프란시스 티브리악은 당신도 알지 않냐는 식으로 말을 했지만, 군터는 그의 말에 조금도 동의하지 않았다. 그러나 티브리악의 도련님께서 할 말이 꽤 있는 것 같아 일단은 잠자코 그의 말을 들었다.
"바라눔 트라소프는 뛰어난 무인이며, 흠잡을 곳 없는 군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정치적 역량에 대해서는…의문을 가지는 이들이 많습니다."
"어째서지?"
"그는 힘으로 짓누르는 것에 능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싸우고, 정복하여 쟁취하지요. 그러나 말로 사람을 대할 줄 모르며, 아랫사람들을 어루만지는 포용력이 부족하다고 합니다. 그의 밑에 있는 자들은 서로 협력할 줄 모르며, 서로 견제하고 헐뜯기에 바쁘다더군요."
서로 견제하고 헐뜯는다. 그건 테리브란의 귀족들도 마찬가지 아니던가. 군터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으나, 프란시스 티브리악이 그걸 모를 리 없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군터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안다는 듯 곧바로 말을 덧붙였다.
"그들의 음험함은…아마도 장군께서 생각하시는 그런 수준이 아닐 겁니다."
"그렇다면 바라눔 트라소프는 왜 그들을 그렇게 방치하는 거지?"
"글쎄요. 방치하는 것이 아니라, 방치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는 군인들을 휘어잡을 수 있는 통솔력과 무명을 지녔지만, 귀족들을 이끌만한 정치력은 지니지 못했다는 것이 세인들의 평입니다."
평소 군터는 세인들이 지껄여대는 말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내야 한다고 생각해왔지만, 지금 돌아가는 꼴을 보면 한 가지만은 확실한 것 같았다.
"잔카라스 데반은 바라눔 트라소프를 따르는 군인이겠지? 그렇다면 그는 그를 적대하는 귀족들에게 밀려난 것인가?"
"그럴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황제가 되려는 자가 귀족들도 휘어잡지 못한다? 우습군. 그의 휘하에 있는 자들은 어째서 그런 자를 따르는 거지?"
"군인들이야 그에게서 과거 끝없는 정복 전쟁을 벌이던 선황제 폐하의 모습을 보았을 겁니다. 그리고 귀족들의 경우는…글쎄요. 어쩔 수 없이 그를 따르는 이들도 분명 있을 테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바라눔 트라소프의 정치력이 부족하기에 그를 따르는 자들이 많을 겁니다."
"알만하군."
그 시답잖은 이유가 짐작이 갔다. 이 이야기는 더 듣고 싶지 않았다. 군터가 고개를 돌리자, 이번엔 시어문드가 입을 열었다.
"잔카라스 데반이 실각한 것은 분명한데, 누가 그의 뒤를 이었는지는 아직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아마도 그의 휘하에 있던 장수 중 하나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렇다면 걱정할 필요는 없겠군."
잔카라스 데반의 군대가 키파를 포위한 기간이 짧지 않았기에, 대략적인 적장의 면면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중에 잔카라스 데반보다 실력이 뛰어난 자가 없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방심은 금물이겠습니다만…현재까지만 놓고 보면 아군에게는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놈들의 행보가 달라질 것으로 보나?"
"대장이 바뀌었으니 방식은 달라지겠지만…놈들의 목표는 변하지 않았을 테니, 어쨌든 계속 이 도시를 노릴 테지요."
잔카라스 데반은 물러났지만, 그가 이끌던 군대는 아직 건재하다. 반면 이쪽은 승리를 거뒀다고는 해도 피해가 적지 않고, 무엇보다 적의 수중에 넘어간 인근 마을과 성들 때문에 여전히 고립된 처지였다.
"일단은 동쪽의 두 도시부터 수복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동쪽의 길이 열릴 테니, 적어도 후방의 안전은 도모할 수 있게 됩니다."
마음 같아서는 동쪽뿐 아니라 북쪽, 남쪽으로도 움직이고 싶었으나 여건이 허락하지 않았다. 지금 당장은 적이 물러갔다지만, 언제 다시 들이닥칠지 모르는 상황에 가뜩이나 부족한 병력을 밖으로 대거 돌릴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니 일단은 가장 급한 것부터 해결해야 했고, 그것이 바로 키파의 동쪽에 자리한 두 개의 도시였다. 데이븐랏지와도 이어지는 길목의 양옆에 자리한 도시들. 그곳만 수복한다면 테리브란과 소식을 주고받기도 편해질 것이고, 유사시에 지원을 바라기도 쉬워질 터.
"제게 맡겨주십시오."
군터가 시어문드에게서 시선을 돌리기 무섭게 할렌이 나섰다. 키파에 와서, 아니 오기 전부터 느꼈던 것이지만 할렌은 이전보다 상당히 정열적이었다. 일이 생겼다 싶으면 앞으로 나섰고, 전투에서도 험지를 찾아 달려갔다. 그를 잘 모르는 몇몇은 공에 눈이 멀었다고까지 이야기 할 정도였다.
군터는 그런 할렌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비슷하게 앞으로 나선 또 한 명에게 고개를 돌렸다.
"제게 맡겨주십시오. 장군을 실망케 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당당하게 어깨를 펴고 제 할 말을 다 하는 젊은 무관. 할렌은 그를 보더니 조용히 한 발자국 물러섰다. 그젊은 무관이 다름 아닌 보리스였던 까닭이다. 좀처럼 거리낄 것이 없는 그로서도 한 수 접어줄 수밖에 없는 상대였다.
하지만 할렌은 완전히 물러나지는 않았다.
"수복해야 할 도시는 둘이니, 그중 하나를 소관에게 맡겨주십시오."
***
회의가 끝난 후, 군터는 따로 할렌을 불렀다.
"장군. 찾으셨습니까."
군터가 가볍게 손짓하자 할렌은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무리를 하는구나."
할렌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두서가 없었지만, 이게 무슨 말인지 그가 어찌 모를까.
숨길 생각은 없었다. 처음부터 알고 있을 거라고도 생각했고,
"무슨 생각이냐."
"활약하고 싶을 뿐입니다. 젊었을 때처럼 말입니다."
"넌 이미 충분히 활약해왔다."
"과거일 뿐이지요."
누구에게나 빛나던 시절이 있다. 남들의 눈에는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자기 자신에게만큼은 보석처럼 빛나던 시절이.
할렌은 그 시절을 똑똑히 기억했다. 그리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 시절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믿고 있었다. 그게 착각임을 깨달았던 것은 전장 한복판에서 너무 빨리 힘이 빠져버리는 손을 느꼈을 때였고, 인정할 수 없었다…기보다는, 그저 아쉬움과 분함이 컸다. 다양한 방식으로 여전히 제 역할을 하는 오랜 동료들을 보면서 상대적인 박탈감을 느꼈을 때는 분해서 밤잠을 설칠 정도였다.
그래서다. 소위 금술이라는 것에까지 손을 대가며 억지로 힘을 낸 것은.
"네 몰골이 어떤지 알고 있느냐."
"알고 있습니다. 많이 흉해졌지요. 원래도 잘나지는 않았으니 그나마 다행이 아닙니까."
처음 부름을 받고 자리에 앉을 때만 해도 불편한 마음이 한가득이었는데, 한순간에 그런 느낌이 싹 사라졌다. 마치 거짓말을 고백한 어린아이처럼.
"후회하지 않습니다. 어떤 노랫말에 이르기를, 삶이란 불이라더군요. 미약한 불씨에서부터 피어나 때로는 거세게 타고, 때로는 꺼질 듯 위태롭게 흔들리고, 그러다가 종국에는 처음 피어날 때처럼 미약하게 타오르다 결국 사그라지는."
"저는 선택을 한 겁니다. 미약하게, 서서히 사그라지기보다 한 번에 원 없이 타오르기로 말입니다. 그 정도는 선택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누군가는 어리석다 말할 것이다. 아니, 분명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리 말할 것이다.
하지만 할렌은 그저 오래 사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에게는 얼마나 사느냐보다 어떻게 사느냐가 더 중요했다.
거대한 제국의 주인이 가려지는 최고의 무대가 아닌가. 이런 곳에서 활약할 기회는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돌아가고 싶었던 겁니다. 그때처럼 말입니다.'
젊다는 말조차도 어색한, 그야말로 어렸던 시절. 맹목적으로 추종하던 은인의 뒤를 따라 말을 달렸었다. 하루건너 하루꼴로 몸에 피를 묻히며 적들과 싸웠고, 승리했었다.
고됐지만, 그때 그 매 순간순간 살아있음을 실감했었다. 그 감정, 그 흥분은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억누르고 있었다. 짊어진 것이 있었기에, 그것들을 책임져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그 짐은 그의 어깨를 벗어났다. 이제 비로소 자유로워졌건만, 쇠약해진 몸이 말썽을 피웠다. 그러니 어찌할까.
머리카락 한 가닥이 손가락 사이에 잡혔다.
"장군. 전 괜찮습니다. 전 지금 근 10년 동안 가장 의욕에 차 있습니다. 부디 심려치 마십시오."
"심려치 않는다. 그리고…네가 그리 말한다면 그런 거겠지."
군터는 빙긋 웃고 있는 할렌을 보았다. 군데군데 흰 머리에, 얼굴엔 못보던 주름이 졌다. 그 낯설다면 낯선 모습에서, 군터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았다. 하나는 선배 병사의 가벼운 농담에 얼굴을 붉히던 초원 출신 소년. 다른 하나는 잔병을 달고 살면서도 매일 유흥을 즐기고, 그러면서도 일을 처리할 땐 얼음처럼 냉정하게 변하던 못생긴 얼굴의 사내.
"좋을 대로 해라."
모든 것은 그들의 선택이다. 군터는 그를 위해 헌신했던 수하들의 선택과 부탁을 저버릴 마음이 없었다. 비록 그끝이 훤히 보인다고 해도 말이다.
'너무나 짧군.'
그들의 삶은 너무나도 짧다. 그들은 흡사 불빛을 보고 날아드는 부나방 같았다. 제 몸이 탈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밝은 불을 향해 돌진하는 부나방.
사흘 후,
할렌과 보리스가 나란히 군사를 이끌고 키파의 동문을 나섰다.
군터는 성벽 위에서 그들의 뒷모습을, 할렌의 뒷모습을 눈에 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