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터-737화 (737/1,064)

737화

시어문드의 계책은 효과적이었다. 적어도 겉으로는 그렇게 보였다.

"장군! 적이…"

군터는 병사의 다급한 목소리를 듣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성벽 위에 올라, 멀리서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는 적을 바라보았다. 다시 공격을 준비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이 향하는 방향은 도시의 성벽과는 정반대였으니까.

"놈들이 물러난다!"

아직은 이른 외침이었다. 근처에 있던 장교가 경솔하게 입을 놀린 병사를 찾기 위해 눈을 부라렸지만, 그때는 이미 특정할 수도 없을 만큼 여러 곳에서 환호가 터져 나온 뒤였다.

와아아아~!

이겼다!

그들은 전투가, 전쟁이 끝나기라도 한 것처럼 날뛰었다. 당장 눈에 보이는 게 그렇게 보이기도 했지만, 실은 그렇게 믿고 싶은 것이리라. 시작부터 포위된 채로 오랫동안 이어진 전투는 도시 내에 있는 모든 이들의 몸과 마음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시민들도 시민들이지만, 적과 직접 싸워야 하는 병사들이야 오죽했겠는가.

병사들에게 험한 말을 하며 진정시키는 장교들도 사실 속내는 병사들과 다르지 않았다. 물론 그들은 적이 느닷없이 물러나는 이유가 단순히 일전의 전투에서 패한 것 때문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정말로 적이 물러나는 것이 맞다면, 분명 그럴만한 이유가 있으리라 짐작했다.

"정말 이대로 물러나는 걸까."

병사들이 환호를 지르던 순간. 할렌도 성벽 위에 있었다. 그는 점점 멀어지는 적의 깃발을 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글쎄."

말을 받은 것은 토어릭이었다. 그는 팔짱을 낀 채 먼 곳을 응시했다.

"계책일 수도 있지. 아니면 잠시 물러났다가 정비한 후 다시 쳐들어올지도 모르고."

"추격해야 하지 않겠나?"

"추격? 진심은 아니겠지?"

물론 아니다. 그냥 해본 말이었다. 속이 답답해져서 말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끌려다니기만 하는군."

"어쩔 수 없지 않나. 우리는 최선을 다했어."

토어릭의 말이 옳다. 하지만 할렌은 그 대답이 전혀 만족스럽지 않았다. 토어릭은 불퉁한 할렌의 표정을 보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자네는 불만이겠지. 사실 뭐…나도 할 수만 있다면 당장 저놈들을 쫓아가서 모조리 도륙해버리고 싶네. 허나 어쩌겠나. 현실이 이런 것을."

할렌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훤히 들여다보였다. 토어릭은 이 알기 쉬운 친우의 뿔난 마음을 달래주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웃으며 농담을 건네려던 순간, 그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할렌. 자네…흰 머리가 생겼군."

"새삼스럽게 무슨 소리인가. 나도 이제 나이가 있는데, 흰머리가 좀 생긴다 해서 이상할 게 뭐라고."

"아니. 그건 그렇지만……"

말처럼 많은 나이인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마냥 젊은 나이도 아닌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것을 고려한다고 쳐도 할렌의 머리는 과했다. 흰 머리가 드문드문 보이는 것이 아니라, 머리의 어딜 봐도 흰색이 눈에 띄는 수준이었으니까 말이다.

'왜 이제 알았지?'

아주 오랜만에 본 것이 아니다. 어제도 봤고, 그제도 봤다. 하지만 그때는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왜일까?

'그때는…이렇게 많지 않았으니까.'

스스로 묻고 스스로 답하면서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때는 이렇지 않았다고? 고작 하루 이틀 전인데?

"자네."

"장군을 뵈러 가세. 어차피 곧 우리를 찾으실 테니 우리가 먼저 찾아가 뵙는 것이 낫겠지."

"응? 아아……"

할렌이 절묘하게 화제를 전환했기에 토어릭은 하고픈 말을 도로 삼키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앞장서 걷는 할렌을 따라 걸음을 옮기면서도 찝찝한 기분을 쉬이 가라앉히지 못했다.

***

"정찰병들이 적이 폰니슈까지 물러난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곳에 주둔할 생각인지, 아니면 잠시 숨을 돌리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어쨌든 아군으로서는 한숨 돌려도 될 것 같습니다."

적이 모습을 감춘 지 엿새째 되던 날, 꾀죄죄한 몰골을 한 정찰병이 전한 소식은 키파의 무관들에게 안도와 기쁨을 주었다.

기쁜 와중에도 불안한 마음으로 혹시,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으나 이것으로 확실해졌다. 적은 물러난 것이 맞았다.

"완전하지는 않으나, 틀림없는 아군의 승리로군요. 경하드립니다. 장군."

프란시스 티브리악이 웃으며 말했다. 그의 입에서 나온 소리였기에, 군터는 쓸데없는 소리 말라며 일축할 수가 없었다. 그 대신 말을 아끼며 다른 수하들, 특히 시어문드에게 시선을 돌렸다.

"네 생각대로 됐구나."

"생각대로…라기보다는, 기대했던 대로 된 것이지요. 어쨌든 잘 됐습니다. 잔카라스 데반은 그에게 가해지는 안팎의 압박을 더는 견디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나저나 대단하군요. 이제 와 이런 식으로 발을 뺀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을 터인데 말입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군터도 동감이었다.

실수하기는 쉬우나 실수를 인정하기는 어려운 법.

그런 면에서 잔카라스 데반의 꾀나 통솔력, 그리고 특히 그 무너지지 않는 정신력과 과감한 결단력은 적이라도 인정할 만했다.

"그러나 적은 완전히 물러난 것이 아닙니다. 얼마간의 숨돌리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군도 그에 맞추어 대비해야겠지요."

이어진 시어문드의 말에도 한 번 풀린 분위기는 가라앉지 않았다. 적이 다시 저 평야에 진을 친다고 해도, 지금은 일단 지금의 기쁨을 누려야 하지 않겠는가.

이러한 분위기는 곧 회의실 밖, 나아가 도시 전체에 번졌다. 숨죽이고 있던 시민들은 그제야 억눌린 기쁨과 안도를 드러냈고, 진작부터 얼굴이 풀어져 있던 병사들은 마음을 놓고서 서로 웃고 떠들었다.

시체들의 도시 같았던 키파에, 아주 오랜만에 활기가 감돌았다.

***

"장군. 아무래도 그 친구들이 불만이 꽤 많은 모양입니다."

"그렇겠지. 그러나 그게 비단 이번 일 때문이겠나. 겉으로는 복종하는 척했을지언정 속으로는 하나만 걸리라고 저주를 퍼부었을 터."

쥬드 포트락은 손에 들고 있던 서신, 정확히는 서신의 가면을 쓴 탄원서를 내려놓고 눈두덩을 문질렀다. 길게 이어지는 한숨과 함께..

'이렇게 될 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인선부터가 문제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지만…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조금 더 강하게 주장할 것을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이 탄원서에 적힌 내용을 믿지 않았고, 동의하지도 않았다. 그는 잔카라스 데반에 대해 알고 있었으며, 그가 전장에서 사감을 앞세워 실수할 사내가 아니라는 것도 잘 알았다. 사감은 오히려 잔카라스 데반이 아니라 이 탄원서를 쓴 자들이…

"장군."

쥬드 포트락은 바깥에서 아들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턱짓으로 수하를 내보냈다. 곧 그의 아들, 시온 포트락은 들어서자마자 그의 손에 들린 탄원서를 보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키파 쪽에서 온……?"

"맞다."

"뻔하군요. 자기들은 어떻게든 책임을 회피하고, 데반 장군에게 모든 것을 덮어씌우려 했겠지요."

"비슷하다."

"비슷하다고요? 분명."

"내 마음도 너와 비슷하다. 하지만 잔카라스 데반이 할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야."

이 구질구질한 탄원서를 못 본 척하고 싶은 마음이 그라고 어찌 없겠는가. 하지만 객관적으로 봤을 때, 잔카라스 데반에게도 분명 책임이 있었다. 아니, 있는 정도가 아니라 그의 책임이 가장 컸다. 그가 군을 이끈 대장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잔카라스 데반 본인도 인정했다. 따로 보낸 서신에서 말이다.

'제게 엄히 책임을 물으셔야 군의 기강이 설 겁니다.'

서신의 내용은 길지 않았고, 요지는 간단했다. 잔카라스 데반은 그와의 정에 기대지 않았다. 그마저도 그답다고 해야 할까. 그래서 더욱 안타까웠다. 쥬드 포트락은 내심 다음 세대의 인재 중 잔카라스 데반에게 기대를 걸고 있었던 만큼, 그의 실패에 더욱 속이 쓰렸다.

"어찌 처결할 생각이십니까."

"공무를 다루는 데 있어 예외는 없다. 특혜도 없지. 잔카라스 데반은 그의 실패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될 것이다.

"그 작자들은요?"

"예외는 없다고 했다. 그들도 역시 마찬가지지."

잔뜩 일그러졌던 시온 포트락의 얼굴이 그 말에 조금 풀어졌다. 그러나 쥬드 포트락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아직 전쟁이 한창이지. 그쪽의 전선도 불안한 상태고, 그런 상황에서는 약간의 융통성을 발휘할 필요가 있지."

그쪽의 귀족들이 허튼 생각을 하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다. 전시에 군사를 거느린 귀족들은 불씨와도 같아서, 바람이 어느 방향으로 얼마나 부느냐에 따라 느닷없이 활활 타오를 수도 있다. 실제로 과거의 역사를 보면 수도에 있는 가족들을 외면하고 홀로 적에게 투항해버린 귀족들도 여럿 있었다. 물론 그 경우에는 정치적으로 입지가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는 사정이 있었다지만…

'지금도 비슷하지.'

잔카라스 데반을 끌어안거나, 그에게 관대한 태도를 보인다면 그쪽의 귀족들은 불만을 가질 것이다. 나아가 불안해하기도 하겠지. 이미 잔카라스 데반과 그들은 갈라선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잔카라스 데반을 옹호한다면 자신들을 적대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지금 이 탄원서만 봐도 그렇다. 쥬드 포트락이라는 이름값 때문에 최대한 신중하고, 공손하게 표현하고 있지만…실상 그 내용은 잔카라스 데반을 쳐달라는 청탁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것을 잔카라스 데반도 알고 있다. 그래서 자신을 엄히 벌해달라 청한 것일 테지. 자신을 위해 귀족들과 척을 지지 말라고 말이다.

'안타깝군.'

잔카라스 데반은 황제의 총신이다. 지금의 젊은 세대 중 그만한 총애를 얻은 자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 그만큼 유망한 사내였고, 그런 만큼 적도 많았다. 이번에 그가 휘청거린다면 그의 적들은 기다렸다는 듯 달려들어 그를 물어뜯을 것이다. 어쩌면 이대로 날개가 꺾여, 영영 재기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잔카라스'

문득, 연회장에서 만났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자신에 대한 존경을 표하며 환히 웃던 그 모습은 전도유망한 장수라기보다는 우상을 만난 소년에 가까웠다.

'자네의 그 웃음을 다시 볼 수 있었으면 좋겠군.'

그에게 바라는 바이자, 스스로에게 바라는 바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