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6화
프란시스 티브리악이 제안한 것은 계책이랄 것도 없는 간단한 것이었다.
"성문을 열고 나아가 적을 치시지요. 아군의 사기는 높아졌고, 적의 사기는 꺾였지요. 지금이 아니라면 기회는 없을 겁니다."
조금 전 전투에서 보여줬던 '허세'에서도 느낄 수 있었지만, 이 티브리악의 귀한 후계자께서는 잃을 게 없는 사람처럼 대담했다. 비록 오늘 적을 물리쳤다지만 여전히 적의 군세는 강대하다. 또한 이쪽 병사들이 사기를 얻었다지만, 격렬했던 전투로 피해를 입은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므로 추스를 시간이 필요한데, 티브리악의 후계자는 지금 당장이라도 적을 치자고 이야기하고 있다. 뭣 모르고 곱게 자란 도련님이 철없이 지껄이는 소리가 아니었다. 보리스의 소개나 부연설명이 아니더라도, 군터는 그가 곱게 자란 화초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그가 언뜻 비치는 기질을 보면 프란시스 티브리악은 화초보다는 잡초에 가까웠다. 몇 번이고 시련을 맞고, 그것을 극복해온 자만이 보일 수 있는 독기와 여유로움이 엿보였다.
"티브리악 장군의 말씀이 일리가 있습니다만, 소관의 생각은 다릅니다."
군터가 프란시스 티브리악의 제안에 조금씩 흥미를 느끼기 시작할 즈음, 처음 동석한 이후 줄곧 조용히 듣고만 있던 시어문드가 입을 열었다.
"오늘, 아군은 상당한 위기를 겪었습니다. 남문은 반파됐고, 성벽에서는 아직도 연기가 피어 오르고 있지요. 그런 경험을 한 아군 병사들은 육체적으로나 심적으로나 크게 지쳐 있습니다. 티브리악 장군과 보리스 공자께서 끌고 오신 병력은 말할 필요도 없을 테지요. 그런 병사들을 이끌고 적을 친다는 것은 위험부담이 너무 큽니다. 무엇보다…다른 방도가 없으면 모를까, 그게 아닌 이상 굳이 그런 부담을 질 필요는 없지요."
"그대에게 좋은 생각이 있는 모양이군."
프란시스 티브리악은 자신의 의견이 정면에서 반박을 당했음에도 전혀 불쾌해하지 않았다. 정말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연기인지는 몰라도, 역시 범상하지 않은 면모였다. 전자라면 그만큼 대범하다는 뜻이고, 후자라면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는 데 있어 완숙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뜻일 테니까 말이다.
"예."
프란시스 티브리악에게 살짝 고개를 숙임으로써 예를 표한 시어문드는 군터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장군. 짐작하시겠지만, 메일러 오챈은 함정에 빠진 듯합니다. 그 혼자 당한 것인지, 아니면 그가 거느린 병사들까지 함께 제물로 쓰인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쯤 저쪽의 분위기가 상당히 흉흉하다는 것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메일러 오챈? 그가 누구입니까?"
시어문드는 프란시스 티브리악에게 메일러 오챈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했다. 그의 이야기를 들은 프란시스 티브리악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일단 시어문드의 이야기를 계속 들어보겠다는 심산인 듯했다.
"바라눔 트라소프의 신임을 얻고 있고, 지닌 능력이 출중하여 가려져 있지만 잔카라스 데반은 경력이 그리 길지 않은 자입니다. 필시 이번의 실패로 인해 잔카라스 데반은 군대에 대한 통제력을 일정부분 상실했을 테지요. 그런 데다, 내부에서도 흉흉한 공기가 돌고 있을 테니 그는 안팎으로 적을 마주한 셈입니다."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었다. 이전에도 비슷한 이야기를 하곤 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시어문드가 하는 말은 그때의 이야기에서 조금 더 진행이 되어 있었다.
"잔카라스 데반은 약탈을 허용했습니다. 병사들의 불만을 다스리기 위해서였겠지요. 하지만 그 선택의 결과로, 그는 군심을 얻는 대신 민심을 잃었습니다. 지금까지는 군대의 힘과 두려움을 이용해서 그 불만을 억누르고 있었으나, 그런 방식은 계기만 생기다면 한계를 드러내기 마련."
"점령지의 민심을 자극하자는 말이로군."
프란시스 티브리악이었다. 시어문드는 그를 힐끗 보며 긍정했다.
"그렇습니다. 골칫거리를 하나 더 던져주는 거지요. 나아가 그의 군대에 속해 있는 투항병들도 자극하고 말입니다."
"넓게 볼 줄도 알고 자세하게 볼 줄도 아는군. 한 수 배웠네."
"별말씀을 궁하다 보니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을 뿐입니다."
누구도 생각하지 못할 기가 막힌 묘책은 아니었다. 다만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계책임은 분명했다. 그리고 이 시어문드의 계책은 군터의 귀에도 그럴듯하게 들렸다. 위험부담을 지는 일 없이 적에게 골칫거리를 던져주는 일이다. 밑져야 본전이라는 뜻.
"괜찮겠군."
"그럼, 바로 시행하겠습니다."
잔카라스 데반은 평소에도 유흥을 즐기지 않는 편이었다. 그와 같은 고위 귀족들이 흔히 사치와 향락을 일상으로 삼는 것에 비하면 그는 금욕적이라고 봐도 될 정도였다.
그런 그의 면모가 특히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것은 군중에서였다. 군대를 이끌고 나섰을 때의 그는 술 한 모금 입에 대지 않았다. 병사들에게 하는 것 이상으로 스스로에게 엄격하게 대했다.
그는 매번 벼랑 끝으로 스스로를 내몰았다. 그럼으로써 항상 절박함과 냉철함을 동시에 유지하려 노력했다. 이런 그의 노력은 그를 배신하지 않았고, 그를 지금의 이 자리까지 올려주었다.
"후우."
그러나 그런 그조차 지금의 상황을 이겨내기는 쉽지 않았다. 가슴은 답답하고, 머리는 그 이상으로 괴로웠다. 온갖 생각과 감정들이 복잡하게 뒤엉켜서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마음처럼 안 되는군.'
쉽다고 생각했던 적은 없다. 결과적으로 대승, 아니 낙승을 거두었던 전투에서조차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은 없다. 밖에서는 손쉽게 보였을 그 승리가, 실은 드러나지 않은 각고의 노력 끝에 쟁취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패한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아. 문제는 군심이다.'
투항병들이 동요하고 있다. 점령지에 대한 약탈을 일부 허했을 때부터 그랬던 것이니 새삼스러울 게 뭐가 있겠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번에는 그 정도가 다르다. 메일러 오챈의 죽음 때문이다.
대외적으로는 또 한 번의 배반을 획책하다가 그 수하에게 발각되어 즉결처분 당한 것으로 알려졌고, 그런 만큼 논란의 여지가 없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명분 따지기 좋아하는 이들의 생각이고, 병사들의 생각은 달랐다. 정확히는 그들의 마음이..
그들은 두려워하고 있다. 점령지에 대한 약탈은 멀찍이서 느끼는 불만이었다면 메일러 오챈의 죽음은 피부에 닿는 두려움이다. 그들이 동요하는 것은 당연하다. 만약 일이 잘 풀렸다면 차차 시간을 두고 그 불만과 두려움을 어루만져주었겠지만, 일이 꼬일 대로 꼬여버린 상황에서 그들을 다독일 여유는 없다.
'일을 맡길 사람이 없군.'
명령을 따르는 수하들은 많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명목상의 수하일 뿐. 진정으로 그를 따르는 심복이라 할 수 있는 자들은 몇 없다. 하나같이 어디 가문의 주인이거나, 직계이거나, 유력자들이라서 그런 것일까. 그들의 자부심은 명목상의 지위 따위로 휘두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일단…방비를 해야겠지.'
잔카라스 데반은 오늘 낮의 전투를 떠올렸다. 성문을 열고 뛰쳐나오던 적장을.
그 정도 대담함이라면 무슨 짓을 벌여도 놀랍지 않다. 예를 들면, 큰 전투를 막 치른 밤에 야습을 가해온다든지.
"오늘 밤 야습이 있을 수도 있소. 초병을 늘리고, 병사들을 진지 후방에 몰아서 배치하도록 하시오."
"알겠습니다."
알겠다며 순순히 따르고 있지만, 잔카라스 데반은 그 목소리 깊숙한 곳에 숨어있는 의심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도 그는 내색하지 않고 담담히 회의를 끝냈다.
회의가 끝난 후, 막사에 홀로 남은 그는 어디선가 불러온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문득, 외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번도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될 거라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 불현듯, 그는 저 멀리에 있을 한 사내를 떠올렸다.
'이 부족한 몸을 믿고 대임을 맡겨주셨습니다. 소장이 두려워하는 것은 패하거나 죽는 것이 아니라, 그 믿음에 보답하지 못하는 것뿐입니다.'
끌려 나온 군졸들을 제외하고, 이곳에 있는 모두는 각자의 생각과 마음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대부분은 공명심일 테고, 보다 저열한 이익에 목매는 자들도 있겠지. 잔카라스 데반은 그들을 탓하거나 멸시하지 않았다. 다만, 자신이 품은 열망이 그들이 갖고 있는 각각의 욕망보다 더 숭고하고 가치 있다고 자부했다.
그렇기 때문이다. 매 순간 철저해지려고 절박하리만치 매달리는 것은.
'놈들은 북쪽에서 나타났다. 돌아왔을 가능성도 있지만, 일단은 리바스트라에서 온 원군이라고 봐야겠지. 하지만 급히 온 데다, 수도 얼마 되지 않으니 북쪽의 전선에 대해 크게 우려할 필요는 없겠지.'
쥬드 포트락이 그의 아들을 앞세워 단단히 이름값을 하고 있다는 소식은 어제도 들었고 오늘도 들었다. 황자가 그러하듯, 잔카라스 데반 역시 그쪽에 대한 믿음은 흔들림이 없었다.
'신경 쓸 것은 여전히 하나.'
바람도 쉴 겸 막사 밖으로 나섰다. 서서히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했지만 높은 성벽은 멀리서도 잘 보였다.
'욕심이었나.'
충분히 할만하다고 생각했다. 함정을 파놓고 기다린 것은 이쪽이고, 상대는 분명 함정에 걸렸다. 하지만 그 함정을 힘으로 뚫고 나와, 역으로 이쪽에 일격을 가했다. 이는 누구라도 예상치 못할 일이었다.
'여차하면 물러날 생각도 해야겠군.'
중의적인 의미다. 하나는 키파의 포위를 풀고 전선을 뒤로 물리는 것.
적의 저항이 격렬하긴 하지만 아직까지는 이쪽의 우위가 확실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해가 안 가는 결정일 테지만, 잔카라스 데반은 생각이 달랐다.
'이미 두 번을 패했다. 한번 더 반복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지.'
물론 첫 번째 패배는 의도한 바였다. 그러나 오늘 겪은 패배는 그로서도 충격이었다. 머리를 잃고 패퇴한 북군은 완전히 기세가 꺾여버렸고, 나머지 역시 정도만 다를 뿐 마찬가지였다.
'한번 더 패한다면, 그때는 물러나고 싶어도 무사히 물러나지 못할 터.'
키파를 포위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이점과 포위를 지속했을 때 져야 할 위험부담. 두 가지를 놓고 고려했을 때, 무엇이 더 중한가를 판단해야 한다. 그리고 잔카라스 데반의 판단은 점점 더 물러나는 쪽으로 기울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포위를 풀고 물러난다면 분명히 말이 나올 거라는 점이다. 이게 또 하나의 의미였다.
어쩌면, 그는 패전의 책임을 지고 자리에서 물러나야 할지도 모른다. 아무리 황자가 그를 총애하고 있다 한들, 명백한 잘못마저 감싸줄 수는 없으니. 개인의 안위와 영달을 살핀다면, 여기서 물러나서는 안 된다. 그러나 잔카라스 데반은 그런 것에 연연하지 않았다. 그가 연연하는 것은 오직 한 가지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