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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735화 (735/1,064)

735화

"뒤쪽에서 적이!"

병사들이 흔들리는 것이야 그럴 수 있다.

"장군! 이대로라면 앞뒤로 둘러싸입니다!"

그러나 명색이 장교라는 자들까지 이렇게 호들갑을 떠니, 잔카라스 데반은 표정관리를 하기가 힘들었다.

"동요하지 마라!"

후방의 적이 움직이려 했다면 바로 얼마 전에 지금보다. 훨씬 더 좋은 기회가 있었다. 성벽에 가까이 붙어서 교전을 치르던 때, 성내에서 뛰쳐나오는 적과 호응하여 들이켰다면 훨씬 더 큰 이득을 취할 수 있었을 터. 그럴진대, 그때 움직이지 않고 이제 와 뒤늦게 움직이는 것은 무슨 이유에서인가.

"눈속임일 뿐이다!"

시늉뿐이다. 후방의 적은 움직이지 않는다. 필시 싸울 수 없는 상태이거나, 저 수천의 병력이 어설프게 무장만 시켰을 뿐인 농민병이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뭐가 됐든, 이쪽에서는 전혀 염려할 필요가 없는 상대라는 뜻.

물론 이런식의 단정은 위험하다. 그러나 잔카라스 데반에게는 확신이 있었다. 그리고 그 확신은 바로 지금 얻었다.

'우리의 발을 묶으려는 얄팍한 수작임을 어찌 모르는가!'

의외의 일격을 얻어맞기는 했지만, 여전히 전력은 이쪽이 우세하다. 적의 주력이 쏟아져 나온 지금도 그렇다는 뜻이고, 어찌 되었는지 모를 북군을 제외한 서군과 동군이 건재한 와중에도 그렇다는 뜻이다.

'놈들을 격퇴할 필요도 없어. 밖으로 끌어내서 시간만 끌면 된다.'

그런데 이놈들은 어찌 이리도 어리석단 말인가. 이 간단한 것을 몇 번이나 설명해야 하는가.

처음엔 답답했고, 그 다음엔 화가 났으며, 마지막엔 아차 싶었다.

'이런 …!

잔카라스 데반은 적의 머릿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훤히 볼 수 있었다. 그는 어떻게 해야 이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는지 명확하게 꿰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휘하 장교들은, 무엇보다 병사들은 그것을 알지 못했다. 장교들이야 언성을 몇 번 높이면 된다지만, 병사들은 어찌 한단 말인가.

그들은 눈에 보이는 것만을 생각하고 믿는다. 그리고 지금 그들의 눈에 보이는 것은 앞 뒤로 덮쳐오고 있는 적군이었다. 이미 성문 앞에서 기선제압을 당한 상태에서 후방의 적까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움직이기 시작하니, 그들의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이다. 약간. 아주 약간의 시간만 있으면 병사들의 혼란을 가라앉히는 것은 일도 아니다. 하지만,

"크아악!"

"막아!"

전면의 적은 가만히 있어주지 않았다. 시간을 주지 않겠다는 듯, 다시금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그 선두에는 커다란 말에 올라 검은 창을 휘두르는 적장, 군터 크렘보르가 있었다.

잔카라스 데반은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잔뜩 일그러져 있던 그의 얼굴이 풀어졌다. 실소를 새어 나왔다. 상황에 맞지는 않지만, 이 순간 그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대단하군.'

인정할 수밖에 없다. 저 음험한 힘은 둘째 치고, 어떻게 저리도 겁이 없을 수 있는 것인가 싶었다.

총대장의 목은 단순히 그 한 사람의 목숨이 아니다. 전투의 승패, 나아가 전군의 생사까지도 얹혀 있다. 그런 것을 저리 함부로 다루다니, 아무리 좋게 봐도 저건 용맹함이 아니라 만용이다.

그러나 그런 만용을 따끔하게 징치하지 못하고 있는 입장에서 그런 말을 한들 무슨 설득력이 있겠는가. 저따위 만용에 이렇게나 휘둘리고 있는 처지에 말이다.

'어쩔 수 없군.

인정할 것은 인정한다. 그렇게 마음 먹고나니 열이 올랐던 머리가 조금은 식는 기분이었다.

***

뿌우 우우!

이번의 호각 소리는 전과 달랐다. 그러나 처음 듣는 소리임에도 군터는 저 소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었다.

"장군! 적이 물러나고 있습니다!"

새삼스러운 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들이 성문을 열고 뛰쳐나온 이후로 적은 줄곧 물러나기만 해왔으니까.

하지만 이번에 적이 물러나는 방식은 이제까지와 달랐다. 일단 느릿느릿하지 않았으며, 대열에 약간의 흐트러짐이 보였다.

"추격하시지요!"

성질 급한 아드리안이 추격을 요청했다. 그러자 할렌이 기다렸다는 뜻 받아쳤다.

"병사들이 지쳤습니다. 게다가 추격을 한다면 도시로부터 너무 멀어지게 될 겁니다. 키파는 지금도 동서 양쪽에서 공격받고 있습니다."

아드리안은 곧바로 입을 달싹거렸지만, 그뿐이었다. 그 역시 할렌의 말이 옳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저 전투의 흥분이 가라앉지 않아 감정적으로 추격을 요청했을 뿐이었다.

"그나저나, 후방의 군대는 무엇일까요. 아군인 것은 확실합니다만……"

"보리스다."

"예?"

할렌은 잘못 들었나 싶어 고개를 돌렸지만, 군터는 더 말하지 않았다.

그의 눈에는 똑똑히 보였다. 저 정체 모를 군대가 들고 있는 깃발 중에는 크렘보르 가문의 문장기가 있었다. 저 동쪽에 자리한 신생 가문의 깃발을 굳이 거짓으로 휘날릴 필요는 없을 테니, 저 깃발 아래 어딘가에는 보리스가 있을 터였다.

'녀석에게 도움을 받는 날이 올 줄이야.'

색다르고, 조금 묘한 기분이었다. 기쁘고, 또 한편으로는 대견한 와중에도 뭐랄까…말로 표현하기 힘든 무언가가 마음 한구석을 두드렸다. 아주 오랜만에 느껴보는, 제법 진한 감정이었다.

"추격은 하지 않는다. 적을 몰아내는 데 집중하겠다. 전령을 보내 동벽과 서벽의 상황을 계속 보고하라 전해라."

"옛!"

적을 몰아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안 그래도 물러나고 있는 적의 등을 떠밀어주는 정도였다. 그 과정은 약속이라도 한 듯, 서로간에 큰 교전과 피해 없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어느 정도 상황이 정리된 후, 군터는 할렌과 아드리안 등에게 서벽과 동벽으로 지원을 가게 했다. 그리고 몇 명의 호위병만을 거느린 채 낯선 아군에게 다가갔다. 그때 즈음, 그들도 키파를 향해 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선두에는 짐작했던 낯익은 얼굴과 낯선 얼굴이 나란히 서 있었다.

"아버지."

"보리스, 여기서 보게될 줄은 몰랐다."

"저 또한 그렇습니다. 무사하실 줄 알고 있었습니다만… 그래도 무사하셔서 다행이군요."

조금 전에 느꼈던 생소한 감정이 또 한번 고개를 들었다. 가슴 깊숙한 곳을 간질거리는 것 같은 느낌. 그러나 그런 감정도 처음에만 그랬을 뿐, 곧 사그라져 아무런 감흥도 남기지 못했다.

"이쪽 분은…"

보리스가 소개를 하려던 찰나, 프란시스 티브리악이 가볍게 웃으며 앞으로 나섰다.

"됐네. 소개는 직접 해야지. 프란시스 티브리악이라 합니다. 무명이 자자하신 크렘보르 장군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구면이군."

"아주 잠깐, 먼 발치에서 스치듯 했었지요. 기억하고 계십니까?"

"얼굴과 이름 정도는."

보리스에게 들은 몇가지 자잘한 이야기들도 그렇고, 잠깐이나마 먼 발치에서 살피며 받았던 인상도 그렇고, 군터 크렘보르라는 사내는 섬세한 사내인 것 같지 않았다. 오히려 상당히 투박하다는 느낌이랄까. 그런데 그런 그가 자신을 기억하고 있다니, 프란시스 티브리악은 살짝 기분이 좋아졌다.

"원군인가?"

"예. 하지만 원군이라고 해봐야 저희가 전부입니다. 이마저도 이쪽의 보리스 공이 강력하게 주장하여 이루어질 수 있었지요."

"소식을 듣고 급한 마음에 고집을 피웠을 뿐입니다. 티브리악 장군이 힘을 빌려주시지 않았더라면 이곳에 올 수 없었을 겁니다."

두 젊은 무장이 주거니 받거니 하는 모습을 보며, 군터는 그들이 제법 긍정적인 관계를 맺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전에 듣기로는 보리스가 프란시스 티브리악에게 경쟁의식을 느끼고 있다 했는데 이런 모습을 보여주니 조금은 뜻밖이었다. 뭐, 혈기왕성한 젊은이들이니 마음만 맞는다면 얼마든지 지기가 될 수도 있겠지만……

"먼길을 와줘서 고맙다는 말부터 해야겠군."

"별말씀을당연히 와야 했습니다. 장군께서 이 요충지를 지키기 위해 얼마나 고생을 하고 계시는지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다만 여건이 여의치 않아 장군께 과한 짐을 안겨드릴 수밖에 없었음을 이해해주십시오."

"치사는 됐다. 그보다…먼길을 달려왔다고 했나. 그래서 그런지 다들 지친 것 같군."

군터의 시선이 그들의 뒤편에 늘어선 병사들에게 향했다. 그의 시선은 잠깐 스쳐지나갔을 뿐이지만, 군터는 그들이 상당히 지쳐있음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아니, 지쳐있는 정도가 아니라 녹초 수준이라는 것을 말이다. 저런 상태의 병사들을 데리고 전장에 나섰다는 것이 의아할 정도였다.

"하하. 알아보셨습니까."

프란시스 티브리악은 군터의 눈썰미에 감탄했다. 그리고 군터는 프란시스 티브리악의, 그리고 보리스의 배짱에 약간이나마 감탄했다. 이제 그는 이 젊은이들이 무슨 짓을 벌인 것인지 알아차렸다.

그들은 허세를 부린 것이다. 마치 허수아비에 갑옷을 씌워두고서 용맹한 군사를 거느린 것마냥 배를 내밀며, 싸워보겠느냐 한껏 소리쳐댄 것이다.

'대단하군.'

설령 만용이라고 해도 이 정도면 인정할 만하지 않은가. 실력있는 이는 드물지만, 배짱있는 이도 만만치 않게 드물다. 그런 면에서 이 티브리악의 젊은 후계자는 상당한 인물임이 분명했다.

'명성이라는 것이 완전히 헛되기만한 것은 아니란 말이군.'

군터는 꼬질꼬질한 얼굴로 여유로운 웃음을 짓고 있는 프란시스 티브리악과 보리스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패기 넘치는 젊은이들의 모습에서 무언가가 비쳐 보였다. 낯설면서도 눈에 익은 그것은 과거 자신의 모습이었다. 과거의 자신. 그리고 그 옆에 있었던 막시밀리언.

물론 막시밀리언과 프란시스 티브리악은 조금 다른 것 같았지만, 둘의 모습에서 그때가 겹쳐 보였다. 이제는 흐릿하게만 남은, 빛이 다 바랜 기억이 말이다.

"장군! 이제 어느 정도 다 수습 됐습니다!"

상념은 잠깐이었다. 군터는 두 사람을 보며 말했다.

"들어가서 마저 이야기하도록 하지."

먼 길을 달려온 원군을 계속 세워두는 것도 경우가 아니고, 슬슬 그의 몸도 삐걱거리고 있었다. 힘은 여전히 남다 못해 넘쳐 흐르고 있는데, 몸뚱이가 그 힘을 견디지 못한다. 그의 몸은 지금 휴식이 필요하다고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

프란시스 티브리악은 말솜씨가 썩 좋은 사내였다. 그는 보리스가 어떻게 억지, 아니 고집을 부렸는지를 재미있고 실감나게 설명했다. 당사자인 보리스가 겸연쩍게 웃으면서도 달리 말을 하지 않는 것을 보면 약간의 과장은 있을지라도 대부분 사실인 듯했다.

"…장군을 생각하는 마음이 그만큼 컸던 게지요. 조금도 망설이지 않더군요. 유인책을 제안한 제가 다 미안해질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결국 다 잘 풀리지 않았습니까. 장군. 낯간지러운 이야기는 그쯤 해두시지요."

"하하. 알겠네. 알겠어."

농담이 오가는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거기까지였다. 프란시스 티브리악은 반쯤 남은 차를 홀짝이고는 자연스럽게 화제를 바꿨다.

"짐작하였고, 직접 보기도 했습니다만…전황이 녹록지 않은 모양이더군요."

그 말대로다. 비록 이번에 자그마한 승리를 거두었다고는 하지만, 유의미한 성과를 낸 것은 전투 초기 북쪽에서 적을 패퇴시킨 것이 전부. 그마저도 패퇴시킨 후에 추격을 하지 못하였으니 반쪽짜리 성과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여전히 병력은 이쪽의 열세. 그래도 이번의 승리로 인해 사기가 많이 오르기는 했지만, 그뿐이다. 적의 포위망은 여전히 건재하다. 결국 또 다시 답답해지는 것은 시간 문제라는 뜻이다.

"장군, 북쪽에서 내려오는 원군은 저희가 끝이라고 보셔도 됩니다. 그런데 듣자하니 남쪽의 상황도 상당히 어려운 모양이더군요."

즉, 추가적인 원군을 기대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시간은 저들의 편입니다. 장군께서도 아시겠지요. 치고 나가는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리고 지금이 적기다. 이 말인가?"

"모든 것이 열세이나, 사기 하나만큼은 아군이 적을 앞서고 있습니다. 뭐라도 걸어볼 만한 것이 있을 때 걸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귀족가의 후계자가 도박판의 도수처럼 이야기하는군."

"송구합니다."

말은 송구하다 하지만, 전혀 송구한 기색이며 표정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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