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4화
성문이 열렸다. 그것을 알아차렸을 때, 잔카라스 데반은 기뻐하기보다는 의심했다.
이렇게 갑자기, 아니 그보다는 공교롭게 성문이 열린다고?
물론 이제껏 열심히 싸워온 병사들이 마침내 성과를 낸 것일 수도 있다. 그래. 그럴 수 있다. 그러기를 바라지만……
생각은 많았지만, 그 생각이 머릿속에 떠오르고 사라진 것은 순식간이었다.
'아니야.'
마찬가지로, 결론은 내는 것도 순식간이었고,
"3군에 회군 명령을 내려라! 당장!"
3군은 이제 막 후방의 적을 상대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던 차였다. 그리고 그 명령을 내린 이는 잔카라스 데반, 자신이었다.
"예?"
그렇기에 명령을 들은 장교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방금 적을 치라고 명령을 내려놓고서, 얼마나 지났다고 말을 뒤집는단 말인가.
"어서!"
그러나 잔카라스 데반이 거듭 다그치니, 장교는 그제야 부리나케 움직였다.
"뭐야?"
"회군?"
3군은 처음 명령을 받은 장교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당황했으나 그래도 곧 방향을 틀었다. 그들은 혹 후방의 적이 뒤를 밟지 않을까 우려했지만, 다행히 적은 그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역시.'
그를 보고 잔카라스 데반은 다시금 확신했다. 역시 후방의 적은 적어도 당장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막아!"
"물러서지 마! 거리를 주지 말란 말이다!"
후방이 잠잠했던 반면, 전방의 상황은 그가 어렴풋이 예상했던 대로 흘러갔다. 성문을 열고 등장한 일단의 기병은 성안에서부터 달려오기 시작했음이 분명했다. 성문이 열리자마자 빠르게 튀어나온 그들은 열심히 성문을 두들기고있던, 정확히 말하면 공성추를 호위하거나 조종하고 있던 병사들을 그대로 덮쳤다.
"아악!"
전열은 갑작스레 열린 성문이나, 그 안에서 튀어나온 적들에 반응할 새도 없이 쓸려나갔다. 그나마 뒤쪽에서 받치고 있던 병력은 늦게나마 제대로 반응을 할 수 있었다.
"찔러!"
질서정연하게 늘어선 방패들과 그 사이사이를 비집고 나온 긴 창들. 그 날카로운 벽을 향해 우직하게 들이받는 기병의 모습은 얼핏 보면 어리석고 무모한 듯했다.
그러나 군터는 누군가의 눈에는 그리도 단단하고, 위협적으로 보이는 벽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는 지금 자신감에 차 있었다. 눈앞의 적 따위는 별 것 아니라고 여길 만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영문 모를 이 힘이 어디서 흘러들어오는 것인지.
이 힘은 주변에 널브러진 시체들에서 나오고 있었다. 전장을 자욱하게 뒤덮은 죽음의 기운이 그에게 스며들고 있는 것이다.
조금은 꺼림칙함을 느낄 법도 하다. 군터도 달갑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거부감을 느끼는 것도 아니었지만, 어쨌든 그는 영문을 모를지라도, 그에게 주어진 힘을 거리낌 없이, 아낌없이 사용했다. 평소 몸에 돌던 활력과는 조금 많이 다른 힘이었으나 뜻대로 다루기는 어렵지 않았다.
"커윽!"
충돌 직전. 이를 악물고 창을 내지르던 병사는 순간 멈칫했다. 지극히 짧은, 거의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이었으나 그 짧은 멈칫거림이 그의 생사를 갈랐다.
촤악! 시원한, 혹은 섬뜩한 절삭음. 군터의 창은 병사의 창이 찔러오는 것보다 더 빠르게 움직여, 병사의 목을 잘랐다.
몸뚱이에서 떨어진 머리가 허공에 떠올랐다. 그 순간까지도, 병사의 눈은 부릅 뜨여 있었고, 그 시선은 군터를 향해 있었다.
확!
발작적으로 날아든 창을 고개를 살짝 뒤로 젖혀 피하고 창날 바로 아래를 낚아챘다. 손에 힘을 주니 창대가 우직! 소리를 내며 부러졌다. 군터는 끄트머리의 까칠한 나뭇조각과 함께 덩그러니 남은 창날을 비수처럼 집어 던졌다. 그리고 그것은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서 병사들을 독려하고 있던 적군 장교의 입에 틀어박혔다.
"으아아아!"
성문이 열리고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둘을 죽였다. 그것도 신기에 가까운 솜씨로, 거대한 말에 그 못지않게 큰 체구, 절제하지 않은 사나운 기세가 서릿발처럼 거세게 풍기니 누구라도 기가 죽을 법 하다.
그러나 적군은, 하다못해 병졸 하나도 움츠러들지 않았다. 아니, 순간적으로 움츠러들기는 했으되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용감하게 달려들었다. 지금 고함인지 비명인지 모를 소리를 내지르는 이병사가 바로 그랬다.
용기 있는 자다. 하나같이 호락호락해 보이지 않는 병사들 가운데에서도 유독 용감한 사내였다.
그리고 대개의 경우, 전장에서 가장 먼저 죽어 나가는 것은 이런 자들이다.
!
용감한 병사의 칼이 호선을 그리기도 전에, 검은 창이 그의 심장을 찔렀다. 앞으로 내달리던 몸이 덜컥 멈추고, 그의 몸이 경련을 일으켰다.
멀쩡하게 핏기가 돌던 피부에 주름이 졌다. 핏기가 가시고 창백해졌다가, 다시 까맣게 죽어갔다. 이 과정은 눈 한 번 깜빡하는 것보다 더 빠르게 일어났다.
군터는 이런 것을 의도하지 않았다. 그도 이렇게 될줄은 알지 못했다. 다만 그냥 그렇게 했을 뿐이다. 불이 뜨겁다는 것을 알면서도 멍한 눈으로 손을 뻗듯,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이.
그…아아.
심장을 찌른 창이 뽑혔을 때, 창날에는 피 한 방울 묻어있지 않았다. 창이 뽑혔음에도 창에 찔렸던 병사는 쓰러지지 않았다. 멀쩡히 그 자리에 멈춰 서 있다가 반대쪽으로 몸을 돌렸다. 높이 치켜들었던 칼은 어느새 아래로 내려간 후였다.
"가라."
누군가에게 하는 말이 아니었다. 그의 앞에 선 병사, 정확히는 병사였던 것에서 생기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굳이 따지자면 망자에 가까웠으나, 그것은 군터가 일으킨 것이 아니었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군터는 그것을 통제할 수 없었다. 비유하자면, 물에 손을 넣고 가볍게 움직인 셈이다. 손을 움직여 물결을 일으키기는 했지만, 그 물결을 통제할 수는 없는 것처럼 군터 역시 눈앞의 망자를 통제할 수 없었다.
다만, 처음 일으킬 때 그 방향을 정할 수 있었을 뿐.
'죽여라.'
용감했던 병사의 몸뚱이는 처음 군터가 바랐던 대로 충실하게 움직였다. 바로 뒤에 있던, 조금 전까지는 동료였던 병사의 배에 칼을 찌른 것이 시작이었다.
'죽여라. 모두.
군터의 바람은 전염병처럼 퍼져나갔다. 검은 안개를 두른 것 같은 그의 창이 한 명 한 명의 심장을 찌르고, 목을 벨 때마다 전염병에 휩쓸린 병자들의 수가 늘어났다. 고작 한 사람이 찌르면 얼마나 찌르고 베면 얼마나 베겠느냐 할 수도 있지만, 그 위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아무런 조짐도 없이, 그저 검은 창에 베이고 찔리는 것만으로 멀쩡했던 아군이 죽지도 않는 적으로 돌변하여 달려들었다. 그 위력은 직접 피부에 닿는 위협보다, 정신적인 면에서 크게 작용했다.
아무리 잘 훈련받고, 이런저런 실전도 겪어본 정예병이라지만 모든 것에 태연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들에게 있어 군터가 보이는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은 미지였으며 두려움이었다. 마치 영혼을 빼앗기는 것처럼, 저 검은 창에 닿기만 하면 살아있는 시체가 되어 날뛰게 되지 않나.
"무, 물러서지 마라!"
군터가 직접 창을 휘둘러 쓰러뜨린 숫자는 열이 조금 넘는 정도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가 열 명을 살아있는 시체로 만들었을 때, 백 명이 넘는 적병이 두려움에 질려 뒷걸음질 쳤다. 그때쯤에는 아무리 장교들이 엄하게 호령을 해도 소용이 없었다.
기세 싸움에서는 승기를 잡았다. 그렇게 판단한 군터는 더욱 앞으로 밀고 나아갔다. 그는 적어도 이곳에 몰려온 적들을 성문과 성벽에서 몰아낼 생각이었다.
우-우우우웅~! 우-우우우웅!!
때였다. 한창 기세를 올리며 적을 밀어붙이고 있는데, 갑작스레 낯선 소리가 전장에 울려 퍼졌다. 기존에 지겹도록 들었던 호각 소리와는 다른, 보다 웅혼한 울림이었다. 여유가 있었다면 가만히 감상하고 싶을 만큼 장엄한 소리였지만, 그 소리가 적진에서 나온 게 확실한 이상 그렇게 한가하게 있을 수는 없었다.
'무슨 신호지?'
의문에 대한 답은 곧 알 수 있었다. 머릿속에 의혹을 품고서도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던 중에, 뒤쪽에서 전령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장군! 서쪽과 동쪽의 적이 총공세를 펼치기 시작했습니다!"
이거로군. 군터는 잠깐 숨을 고르며 생각을 정리했다.
북쪽의 적은 패퇴시켰다. 끝까지 추격하여 완전히 섬멸한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단시간 내에 수습할 수는 없을 정도로 큰 피해를 입혔다. 하지만 동쪽과 북쪽의 적은 아직 건재하다. 하지만 그것을 알면서도 군터는 그쪽을 걱정하지는 않았다. 남쪽의 적진에 대장기가 휘날리고 있고, 유독 이쪽의 상황이 심각하다는 점을 통해 그들이 미끼라는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니었던 것일까? 이제 와 총공세라니. 그렇다면 지금까지는 살살 눈치라도 살피면서 적당히 하고 있었다는 말인가.
"장군. 하옵고……"
"뭐냐."
"시어문드 대장님은 이것이야말로 적의 술수일 거라 하셨습니다. 적이 본군의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아군의 주의를 돌리려는 것이라고요."
"그래서?"
"뒤쪽의 소란에 고개 돌리지 마시고, 그대로 나아가시라고……"
다소 시건방지긴 하지만, 마음에 쏙 드는 조언이었다. 군터는 고개를 끄덕이곤 전령을 돌려보냈다. 그러겠노라 전하라는 한 마디 말과 함께.
***
"계속 치고 들어옵니다!"
그럴 줄 알았다. 먹히기를 바랐지만, 내심 그렇게까지 호락호락할 리는 없으리라 생각했다.
"어찌할까요, 장군?"
"계속 공격하라고 해라. 성문을 부수고, 성벽을 넘으라고."
"옛!"
하지만 적은 착각하고 있으리라. 본군이 남쪽에 대거 집결한 것은 사실이나, 동쪽과 서쪽에서 교전 중인 병력 역시 정예였다. 그들이 전력을 다한다면 성벽 하나 넘지 못할까.
다만 적이 물러나기를 바랐던 것은, 후방에서 아직도 버티고 있는 또 다른 적의 존재 때문이었다. 지금까지는 잠잠하지만, 만에 하나라도 앞뒤에서 협공을 받게 되면 곤란한 상황이 벌어질 수 있으니까 말이다.
아무리 가능성이 크지 않다고 한들, 위험한 상황은 피할 수 있으면 피해야 한다는 것이 잔카라스 데반의 전술관이었다.
불확실한 위험이라도 최대한 피하고, 아무리 큰 이득이라도 불확실하다면 일단 거리를 둔다. 그는 이제껏 이런 방식으로 싸워왔다. 자잘한 실패를 겪기도 했지만, 결국은 승리로 마무리 지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그는 다시 한번 차분하게, 그리고 꼼꼼하게 현 상황을 따져보았다. 그리고 재차 확신했다.
"물러난다. 천천히, 틈을 보이지 않으면서."
잔카라스 데반은 그의 직속 병력을 조금씩 뒤로 이동시켰다. 적이 다가오는 속도에 거의 맞춰서 움직이니, 두 군세의 거리는 좁혀질 듯하면서도 좁혀지지 않았다.
'이쪽이 주력이라면, 저쪽 역시 주력이다.'
분명 신호를 받았다. 그 신호를 받자마자 공격을 명한 것이 아닌가.
그런데 군터 크렘보르는 멀쩡한 모습으로 병력을 거느리고 이곳에 나타났다. 이것만 봐도 북쪽의 상황을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모든 일이 마음처럼 되지는 않는 법이지.'
몰드 키라카의 생사여부나, 북군의 피해 정도가 궁금했지만 지금은 잠시 뒤로 미뤘다. 잔카라스 데반은 흉험한 기세를 풍기는 적군을 최대한 유인해 볼 참이었다. 이것은 노림수임과 동시에 시험이었으며, 반격이었다.
***
"밀어붙이고 있군요."
보리스는 눈이 좋았다. 눈이 좋다는 이유로 척후병으로 뽑힌 병사들보다도 더. 할렌을 비롯한 부친의 수하들은 그것이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재주 중 하나라고 이야기하곤 했다.
"그래?"
프란시스 티브리악은 그런 보리스의 재주를 알고 있는 이 중 하나였다. 그렇기에 그는, 자신의 눈에는 좀처럼 보이지 않는 것에도 의심을 가지지 않았다.
"제 부친께서 직접 군을 이끌고 나오셨습니다. 적은 계속해서 밀리고 있고…대장기까지 움직이는군요."
프란시스 티브리악은 보리스처럼 눈이 좋지 않았다. 그의 안력은 지극히 평범하여, 그가 볼 수 있는 것은 대략적인 전세뿐이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그는 보다 객관적이고 냉정하게 상황을 헤아릴 수 있었다.
'이상한데.'
성문을 나와 요격을 한다?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적의 후방에 아군으로 추정되는 군대가 나타났고, 적이 동요하기까지 했으니 호응하는 것이야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그 요격만으로, 지금까지 금방이라도 도시를 함락시킬 듯 기세를 올리던 대군이 뒤로 밀려난다? 그건 너무 희망적인 관점이다.
하지만 실제로, 적은 뒤로 물러나고 있다. 대체 왜?
짚히는 점이 몇 가지 있었지만, 그 중 무엇 하나에도 마음이 기울지 않았다.
"보리스."
"예."
"아무래도, 우리가 조금 더 힘을 써봐야 할 것 같네."
아직 본론을 꺼내지도 않았건만, 보리스의 입가는 벌써부터 씰룩이고 있었다. 무슨 말이 나올지를 짐작한 것이리라.
"좋습니다."
그렇기에, 말도 꺼내기 전에 답부터 한 것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