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터-733화 (733/1,064)

733화

"뭐냐!"

잔카라스 데반은 와락 인상을 일그러뜨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가 이렇게까지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었다. 그만큼 지금 뒤에서 들려온 호각 소리가 그의 신경을 거슬렀다는 뜻이다.

'뭐지? 어떻게……'

최소 오천, 저만한 군세가 이렇게 접근해올 때까지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그는 포위를 구축한 후 멍청하게 손가락만 빨고 있지 않았다. 인근 지역을 점령하고, 중간지점마다 봉화를 설치했다. 유사시에 대한 대비는 충분히 해두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어찌 저런 병력이 등 뒤에서 나타날 수가 있는가. 설마하니 봉화에 불을 놓을 틈도 없이 차례로 다 당해버렸다는 말인가?

'말도 안 되는 소리지.

말도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괜히 한번 의심하게 될 정도로, 그는 지금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어찌한다.

현재 진영에 남아있는 병력은 4천가량. 이 정도면 후방의 적에 맞서 싸우지 못할 것은 없지만, 영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수도 수지만, 이렇게 쥐도 새도 모르게 접근할 정도면 평범한 군대는 아닐 테니까 말이다.

'그렇다고 병력을 빼자니……'

고지가 목전이다. 조금만, 조금만 더 있으면 드디어 저 지긋지긋한 성벽을 넘을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상황에서 병력을 뺀다면? 자칫 적이 기세를 회복할지도 모른다. 이미 호각 소리가 들린 순간부터 적의 기세가 조금씩 들썩거리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낭패로군. 낭패야.'

왜 하필 지금일까. 조금만 더 늦게, 아니면 차라리 조금 더 일찍 당도했었다면 미련 없이 병력을 뺐을 텐데.

입이 바짝 말랐다. 짧은 시간 동안 잔카라스 데반은 몇 번이나 생각을 바꾸었다.

"장군! 어찌할까요?!"

몇 번이나 답을 촉구한 수하에게 마침내 고개를 돌렸을 때. 그의 얼굴은 흉악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3군에 퇴각 명령을 내려라."

"예, 옛!"

곧 전고가 울렸다.

둥! 둥!

퇴각의 북소리. 3군에게만 향한 신호였지만 잔카라스 데반은 앞에서 한창 싸우고 있는 병사들까지 동요할 것을 우려했다. 이제 그들도 뒤쪽에서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테니, 어쩔 수 없이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할 터.

"빌어먹을."

사납게 눈을 치뜬 잔카라스 데반이 낯선 군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저놈들 때문에 코앞까지 다가온 승리가 다시 멀어져 버렸다. 손만 뻗으면 쥘 수 있었던 것이!!

이런 상황에서는 아무리 그라도 냉정을 유지하기가 어려웠다. 당장 돌격 명령을 내리지 않는 것만 해도 충분히 침착하려 노력하고 있는 것이었다.

"어떤 놈들이냐."

차갑게 가라앉은 눈에 섬뜩한 살기가 넘실거렸다.

***

"이거…정말 괜찮겠습니까?"

"왜. 이제 와 걱정이 되나?"

프란시스 티브리악의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묻어 있었다. 아니, 어쩌면 착각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믿고 싶어서 그리 들린 것일지도.

"걱정이 안 된다면 거짓이겠지요. 우리의 상태는…이런 말을 하기는 뭐하지만, 최악 아닙니까."

보리스가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얼굴이 말이 아닌 병사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병사들보다는 조금 나았지만, 장교들도 상태가 영 아니었다.

"자네 작품 아닌가? 그런데 자네가 그런 말을 하다니."

"면박 주는 것은 그쯤 하시지요. 제 경솔함에 대해서는 충분히 반성하고 있으니까 말입니다."

"정말인가?"

"장군."

"하하. 알겠네. 알겠어. 그만하지."

보리스는 두어 번 입을 달싹거리다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적은 우리의 상태를 모르네. 수천의 병력이 후방에서 나타났으니 거슬린다고만 여기겠지. 필시 도시를 공략 중인 군을 일부라도 빼내서 우리를 칠 걸세."

"하지만, 후방에 남아있는 병력이 있지 않습니까?"

"저건 필시 지휘관이 이끄는 본군일 것이야. 즉, 움직이지 않는 병력이지."

움직이는 것은 팔과 다리다. 피치 못할 경우가 아니고서야, 전장에서 머리가 먼저 움직이는 일은 극히 드물다.

물론 아주 가끔, 본분을 망각하고 선봉장이라도 된 것처럼 앞장서서 움직이는 '머리'도 있다. 하지만 이곳까지 오면서 적장 잔카라스 데반에 대해 알아본 바에 따르면, 그는 그런 극히 드문 부류가 아니었다.

"놈들이 우리를 친다면, 맞서기 어렵지 않겠습니까."

어지간하면 약한 소리를 하지 않는 보리스였지만 지금만큼은 예외였다. 과장이 아니라, 지금 병사들은 서 있는 것만 해도 다행일 정도로 심각하게 지친 상태였다. 그리고 그것은 보리스 자신이 무리한 행군을 강요해온 탓이었고.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늦고 말았을 거야.'

연기가 솟고 있는 성벽이 보였다. 만약 한나절, 아니 반나절만 더 늦었어도 어찌 됐을지 모른다. 막무가내로 고집을 부렸지만, 이제 와 보니 그것이 최선이었다.

"그렇지. 하지만 이대로 꽁무니를 뺄 수도 없지 않은가."

"그야 그렇지요. 허면……?"

"우리는 여기까지 갖은 고생을 하면서 왔지. 덕분에 체력은 바닥이 났지만, 그래도 적의 눈을 피할 수 있었네. 즉, 적은 우리에 대한 정보가 없어. 그러니…허세를 한번 부려보세나."

"허세…말입니까?"

"싸움이 꼭 치고받는 것만 싸움은 아니지 않나. 눈싸움이라는 것도 있지."

그것은 적어도 보리스에게는 매우 적절한 비유였다. 눈싸움이라는 말 한마디에, 보리스는 프란시스 티브리악의 의중을 짐작했다.

***

적장의 머리를 세로로 쪼개버린 순간, 전투는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단순히 지휘관이 죽어서가 아니라, 그렇게 되기까지의 과정이 적병들의 사기를 완전히 앗아갔다.

무슨 기책을 부린 것도 아니었다. 그저 우직하게 정면으로 달려들어 막아서는 족족 돌파하고, 끝내 장군의 목을 치지 않았나.

그 순간을 목격한 이들이 적지 않았다.

"으으……"

그리고 그들이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한 순간. 두려움은 전염병처럼 순식간에 퍼져 나갔다. 소수의 장교가 병사들에게 물러서지 말라고 다그쳤지만 그들의 목소리는 이미 몸을 돌리고 달아나는 병사들에게는 닿지 않았다.

와아아아!

사기가 땅에 떨어진 쪽과 하늘을 뚫은 듯 치솟은 쪽. 얼핏 생각하면 상대가 되지 않을 것 같고, 이미 승패가 정해진 것 같았지만 막상 군터가 적장의 머리를 쪼갠 뒤에도 전투는 한동안 계속 이어졌다. 일찌감치 도망치는 이들도 있었지만, 끝까지 결사항전을 벌이는 이들도 적지 않았던 탓이다.

이미 승기가 기울었음을 알면서도 끝까지 싸우는 적들을 보며, 군터는 혀를 찼다.

혹시 했지만, 역시 쭉정이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도망치지 않고 덤벼드는 이들이야말로 진정한 바라눔 트라소프의 병사들일 것이다. 제국 서부를 평정한 정예 말이다.

숨이 끊기기 전까지 달려드는 적을 쓰러뜨리기는 쉽지 않았다. 전투가 끝났을 때는 군터와 병사들 모두 진이빠져 있었다. 1만이 훌쩍 넘는 적을 패퇴시킨 것치고 피해는 적었지만, 깔끔한 기분은 아니었다. 키파의 성벽에서 연기가 피어오른 지 오래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일까.

"시간이 지체됐군."

고개를 떨구거나, 아직도 숨을 헐떡이는 병사들은 말없이 휴식을 갈구하고 있었다. 하지만 군터는 그들의 바람을 들어줄 수 없었다.

"돌아간다."

조금 더 일찍 이곳의 상황을 마무리 지었다면 왔던 길로 돌아가는 대신 서쪽이나 동쪽의 적을 측면에서 들이쳤을 것이다. 하지만 예상보다 시간을 너무 지체했고, 성벽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는 갈수록 심해지고 있었다.

'버려라.'

시어문드를 비롯한 수하들의 얼굴이 순간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불안한 마음은 전혀 없었다. 지금 그의 마음은 이상하리만치 평온했다. 군터는 그 스스로도 그것이 의아하여 땀과 피로 흠뻑 젖은 손을 슬쩍 들어 올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잘게 경련이 일 정도로 힘이 빠져 있던 손이다. 그런데 지금은 떨림은 온데간데없고, 당장이라도 창칼을 마음껏 휘두를 수 있을 것처럼 힘이 흘렀다.

'영문을 모르겠군.'

이런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었기에 이제는 새삼스럽지도 않다. 어찌 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좋은 일 아닌가.

"장군! 남문이 위태롭습니다!"

북문에 다다를 즈음, 얼굴에 검댕을 잔뜩 묻힌 장교가 달려와 상황이 급함을 고했다.

남문이라면 시어문드가 맡은 쪽이었다. 시어문드가 최선을 다해 버티고는 있지만, 적의 본군이 전력으로 들이받고 있는 통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했다.

"지금 곧바로 가겠……"

군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뿌우우!

남쪽에서 긴 호각 소리가 들려왔다. 군터는 그것이 이제껏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소리라는 것을 곧바로 알아차렸다.

'또 다른 적인가?'

눈살을 찌푸린 그가 빠르게 말을 몰았다. 최고 지휘관이 혼자 툭 튀어나가자 아드리안이 다급히 병사들을 지휘하여 그 뒤를 따랐다.

***

'뭐지?'

잔카라스 데반은 꼼짝도 하지 않는 적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요란하게 뿔 나팔을 불어대며 존재감을 드러내더니, 그 후에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있다. 먼저 움직일 생각은 없다는 것일까?

'들어와라, 이거냐?'

진을 치고 있는 상대에게 덤비기보다는 적이 공격해오게끔 유도하는 것이 상책이기는 하다. 하지만 지금은 공성이 진행 중이지 않나. 성벽이 불타오르고 있고, 이미 일부 병력은 성벽을 넘었다. 이제 곧 성문도 열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사정을 저들도 짐작하고 있을 테니 다급해질 법도 한데, 꽤 침착하지 않은가.

'아니. 어쩌면 그게 아니라……''

의미 없이 전열의 기병만 왔다 갔다 하는 꼴을 보아하니, 들어올 테면 들어오라고 말하는 듯했다. 도발이라면 도발이다.

'저 정도 병력이 여기까지 오는 데 한 번도 보고가 올라오지 않았단 말이지.'

다시 생각해봐도 말이 안 되는 일이다. 하지만 그런 말이 안 되는 일이 실제로 일어나버렸으니,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는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

'그 많은 초병이 갑자기 맹인이 되었을 리는 없다. 그렇다면 뭔가, 어떤 방법으로 그들의 눈을 피했다? 어떻게?'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히고 하나하나 따져보니 생각보다. 쉽게 답이 나왔다.

'눈이 닿지 않는 곳으로 이동한 거겠지. 그런 곳으로 이동할 리 없다고 생각할 법한 험지로.'

그렇다면 말이 된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이렇게 아무런 낌새도 없이 전장의 한복판에 불쑥 나타나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그렇게 은밀히, 그리고 신속하게 움직였다는 뜻 밖에 되지 않는다.

'무리하게. 그래. 무리를 해가면서 어떻게든 시간을 맞춘 거다.'

억측일 수도 있다. 그러나 여유를 부리는 듯하지만 묘하게 어색해 보이는 군진을 보아하니 예측이 크게 틀린 것 같지는 않았다.

'허세로군.'

잔카라스 데반의 입가에 비릿한 웃음이 떠올랐다.

"오지 않겠다면 이쪽에서 가줘야 하지 않겠는가! 3군에게 진군 명령을 내려라! 뒤쪽에서 어슬렁거리는 쥐새끼들을 쳐라!"

그때였다.

쿵!

잔카라스 데반이 검을 뽑아 들고 호령함과 동시에, 굳건하게 닫혀 있던 키파의 성문이 열렸다.

"음?"

명령을 내리다 말고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잔카라스 데반은 곧 눈을 부릅떴다.

성문이 활짝 열렸다. 그러나 그것은 아군의 충차가 힘으로 열어젖힌 것이 아니었다. 성문을 연 것은, 이제껏 악착같이 버티던 적군이었다.

"무슨 …"

활짝 열린 성문에서 일단의 기마가 쏟아져 나왔다. 그 선두에 선 자의 얼굴을, 그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