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2화
몰드 키라카는 황당한 표정으로 혀를 찼다. 그는 자신이 오판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 하지만 사실, 이런 일은 아주 가끔씩 일어나곤 한다. 왜 있지 않은가. 거창한 영웅담, 혹은 호사가들이 떠들어대는 믿기 어려운 이야기들. 그 속에 등장하는 초인적인 인물들의 활약. 현실이 아니라 이야기 속에서만 일어날 수 있을 법한 내용.
그러나 그는 알고 있었다. 그렇게 떠도는 이야기들의 대부분은 거짓이지만, 간혹 사실인 것들이 있음을.
멀리 갈 필요도 없다. 당장 제국의 군주 중 하나인 아간투스베록은 한 전투에서 홀로 수백의 적을 으깨버리기도 했다. 과장된 이야기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몰드 키라카는 그것이 사실임을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것은 이야기에 감칠맛을 더하기 위해 온갖 거짓을 더하는 재담꾼이 아니라 그의 부친에게서 직접 들은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그 이야기를 들을 당시, 그 역시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진지한 얼굴로 사실임을 강조하는 부친을 보며, 그 이야기에 과장이나 거짓이 섞여있지 않음을 알았다.
그리고 그 후, 군문에 들어서고 온갖 경험을 하면서 세상에는 이해하기 힘든 것들이 상당히 많다는 것을 몸과 머리로 이해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런 그조차, 저 앞에서 검은 창을 휘두르며 다가오는 적장을 보고 있자니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힐 지경이었다.
누구도 그의 앞을 제대로 막아서지 못했다. 여럿이 달라붙어 조금 막는다 싶으면 여지없이 뒤따르던 적병들이 가세한다.
'강할뿐 아니라, 영리하기까지 하군.'
그래서 더욱 곤란하다. 적장은 자신의 무력을 효율적으로 사용할 줄 알았다. 단순히 힘만 믿고 마구잡이로 들이미는 것이 아니라, 뒤따르는 부하들과 보조를 맞추며 움직이고 있다. 자신이 창끝이 되어 찌르고, 부하들로 하여금 그뒤를 받치게 하면서 무리를 피한다. 그 덕에 벌써 몇 번이나 인의 장막을 지났음에도 여전히 돌파력이 살아있다.
"길을 열어라."
"옛?"
"정면에서 부딪쳐서는 놈들을 제압하기 어렵다. 길을 내어주고, 측면에서 친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무엇을 우려하는지 안다. 전면에 병력을 집중시켜서 막아도 밀리고 있는 판인데, 괜히 길을 연답시고 병력을 분산시켰다가 완전히 뚫려버리면 측면을 노리고 뭐고 할 틈도 없이 당할 수도 있다.
'그래. 그럴 수도 있지.'
안다. 하지만 달리 방도가 없다.
처음에 뿌리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적당히 시간을 끌면서 아군이 키파를 함락시킬 때까지 버틸 수 있을 거라 여겼다.
하지만 그건 너무 안일한 생각이었다. 그런 어중간한 마음가짐과 계산으로 대적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그걸 조금만 더 일찍 깨달았더라면 이렇게까지 몰리지는 않았을 것을.
"깊게 끌어들여서 허리를 끊는다."
길을 여는 것은 기병. 보군이 뒤따르고는 있지만 점점 힘에 부치고 있을 터. 이럴 때 적에게 길을 터주면 기병의 속도는 빨라질 테고, 뒤쪽의 보군이 곧장 뒤따르기는 힘들어질 것이다.
적의 진형이 최대로 길어지는 순간. 그 순간이 기회다.
몰드 키라카는 손에 든 검을 고쳐 쥐었다. 손바닥에 땀이 흥건했다. 손바닥을 거친 천으로 감쌌음에도 그천이 축축하게 젖을 정도였다.
그가 몇 번 숨을 고르는 사이, 병사들은 그의 지시에 따라 움직였다. 전면에 집중되어 있던 병력이 양옆으로 일부 분산되고, 적은 얕아진 벽을 뚫으며 빠르게 접근해왔다. 그와 동시에 넓게 펼쳐진 아군 병사들이 조금씩 적을 둘러싸기 시작했다.
'눈치챘나?'
근거는 없지만, 왠지 모르게 그럴 것 같았다. 일부러 길을 열어주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밀고 들어오고 있는 것 같다는, 그런 느낌이 들었다.
거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이제는 창칼이 부딪치는 소리, 고함과 비명이 바로 앞에서 터져나오는 것처럼 선명하게 들렸다.
가장 앞에서 달려오고 있는 적장의 모습도 뚜렷하게 보였다. 커다란 말에 올라, 창을 찌르고 휘두르며 길을 열고 있는,
"지금이다!"
명령을 내리고, 칼을 들었다. 직접 일선에서 적과 드잡이질을 하는 취향은 없었지만, 그 역시 힘들게 단련해온 실력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다. 그렇기에 억센 동료, 수하 무관들 틈바구니에서도 어깨를 펼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는 평소처럼 눈에 힘을 줄 수가 없었다. 아주 오랫동안 느끼지 못했던, 두려움이라는 녀석이 슬그머니 눈을 떴다.
땅을 울리는 말발굽 소리가 천둥처럼 귀에 메아리쳤다. 조금씩, 조금씩 커져가던 적장의 모습이 어느 순간 말도 안 될 정도로 거대해졌다. 시야에 가득 찬 거대한 형체를 보면서, 몰드 키라카는 그것이 착각이거나 환영이거나 둘 중 하나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고, 혀를 깨물었음에도 눈에 보이는 것은 그대로였다.
'피할 수 없다.'
막을 수도 없다.
거무튀튀한 창이 머리높이보다 높이 올라갔을 때, 이제 곧 내려치리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는 직감했다.
그 순간 칼을 들어올린 것은, 생각해서 나온 것이 아닌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콰앙!
***
"후우…후우……"
선봉에서 몇 번, 아니 몇십 번이나 적을 돌파하는 것은 군터로서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는 어느 순간부터 몸이 조금씩 삐걱거리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다만 못 견딜 정도는 아니었기에 그럭저럭 참으면서 계속 창을 휘둘렀고, 결국 마지막 목표를 발견할 수 있었다.
눈에 띄는 무장이 아니더라도, 수십이 넘는 호위병에 둘러싸인 모습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저자가 이 군대를 이끄는 지휘관이라는 것을.
그를 발견한 순간 힘조절이고 뭐고 집어치운 채 앞만 보고 달렸다.
막아서는 벽이 느슨해졌다는 것은 바로 알아차렸다. 적 최고 지휘관에게 다가가고 있는데 저항이 역해지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니, 적에게 무언가 꿍꿍이가 있음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함정일 가능성이 크다.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럼에도 주저하지 않았다. 몸은 충분히 달아올랐고, 머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성공하는 실패하든, 여기서 끝을 봐야한다는 생각이었다.
"후우 …"
그렇게 우직하게 말을 달리던 중. 군터는 기이한 감각을 느꼈다.
점점 힘이 고갈되어가고 있던 몸에, 어느 순간부터 또다른 힘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낯설지만, 한편으로는 익숙한 느낌이었다.
군터는 그것이 그가 이제껏 숱하게 다뤄온 기운, 사기임을 알아차렸다. 주변에 널린 시체들, 그들이 뿌린 피에서 흘러나온 죽음의 향기가 어느새 그의 몸 주변에 몰려들고 있었다.
"하!"
어찌된 영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 그에게 도움이 되는 현상임은 확실했기에, 군터는 거부감 없이 그 힘을 받아들였다. 그러자 그 힘은 순식간에 그의 몸을 가득 채웠고, 곧 그의 몸은 처음 성문을 열고 나설 때보다 더 팔팔해졌다.
몇 번이고 거듭해서 창을 찌르고 휘두르는 사이, 적장과의 거리는 이제 금방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좁혀졌다.
군터가 창을 들어올렸다. 단 한번으로 끝낼 생각이었다.
지쳐가는 말이 마지막 힘을 짜내어 앞으로 도약했을 때, 군터는 온 힘을 실어 창을 휘둘렀다.
콰앙!
부서진 칼의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그러고도 힘이 남은 창은 계속해서 아래로 내려가 적장의 투구를, 그리고 그 안에 있던 머리를 갈랐다.
"장군!"
군터는 적장의 머리를 쪼갬과 동시에 멈춰섰다. 뒤따르는 병사들에게 시간을 주기 위함도 있었고, 급속도로 기운이 빠지는 몸에 휴식을 주기 위함도 있었다.
조금 전까지 뭐든 할 수 있을 것처럼 기운이 넘쳤던 몸은 언제 그랬냐는 듯 휴식을 갈구했다. 긴장이 풀려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적장의 머리를 쪼개는 데 너무 힘을 썼던 것일까.
알 수 없지만, 일단 군터는 머리가 쪼개져 쓰러진 적장을 내려다보며 숨을 골랐다.
"장군!"
그래서 바로 듣지 못했다. 한 번 더 아드리안이, 조금 더 크게 소리치고서야 그는 고개를 돌렸다.
"적이 양측면에서 공격해오고 있습니다. 아군의 허리가 끊겼습니다! 보군은 고립됐고……"
거기까지 들었을 때, 군터는 다시 창을 들었다. 여전히 몸에 힘이 없었지만, 그래도 말머리를 돌렸다.
"가자."
***
시어문드는 피와 검댕이 묻은 손으로 슬쩍 볼을 쓸었다. 손 끝에 액체가 묻는 느낌이 났다. 피했다고 생각했는데, 스쳤던 모양이다. 그것도 꽤나 깊게..
"하아…하아……"
직접 칼을 휘두른 적은 없다. 그저 바쁘게 뛰어다니기만 했을 뿐. 그런데도 숨이 턱끝까지 차올라 있으니, 이는 그의 체력이 저질이라서가 아니라 그만큼 정신없이 뛰어다녔기 때문이었다.
"쯧."
방패를 들고 그를 쫓아다니던 병사는 옆머리에 화살을 맞고 쓰러져 일어나지 못했다. 시어문드는 병사가 마지막 순간까지도 꼭 쥐고 있던 방패를 힐끔 보고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와아아아!
함성은 여전하다. 문제가 있다면, 그 함성이 저 아래가 아니라 멀지 않은 옆에서 들려오고 있다는 점일까.
"크윽! 밀어내! 전부 밀어내서 저 아래로 떨궈버려!"
"이 새끼들! 이제 너희 모두 끝이다!"
최대한 노력했다. 하지만 개미처럼 끝도 없이 기어오르는 적을 언제까지 저지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조금씩 조금씩, 성벽 위에 다른 복장을 한 병사들의 수가 늘어났다. 그리고 이제는 그 비율이 거의 반반이었다.
"병사들을 모아라. 적을 밀어내는 것은 포기한다. 계단쪽만 사수하면서 최대한 버틴다."
"…알겠습니다."
대꾸하는 부관의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몸이 지쳐서든, 아니면 승기가 기울었음을 짐작해서든, 시어문드는 수하의 심정을 십분 이해했다.
'아직입니까. 장군.'
이제는 정말 시간이 별로 없다. 외성벽을 내주더라도 안쪽에서 조금 더 버틸 수 있겠지만, 그것도 그리 오래 가지는 못할 것이다. 무엇보다 외성벽을 내주는 순간, 북쪽의 본군이 성공적으로 일을 마치고 돌아온다고 해도 크게 힘을 쓸 수 없게 된다. 적이 성벽에서 버티며 내성을 고립시킨다면…승산은 희박해진다.
그것을 알기에, 시어문드는 최대한 버티고자 했다. 그러나.
'하는 수 없군.'
더 버티다가는 병력이 모조리 갈려나갈 판이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병사들을 물리기로 결정했다.
"전군……"
그가 뒤이어 '퇴각' 이라는 말을 입밖에 꺼내려던 순간.
뿌-우우우!
이제껏 질리게 들었던, 하지만 그것과는 조금 다른 호각 소리가 길게 울려퍼졌다. 그것도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뭐지?'
시어문드가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주시했다. 처음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으나, 눈에 힘을 주고 조금 기다리니 무언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군대였다. 그러나 낯선 군대였다.
'아니. 잠깐.
그런데 그 낯선 군대가 들고 있는 깃발이, 정확히는 그 중 하나가 눈에 익었다.
'저건 …'
잘못봤나 싶어 몇 번이고 눈에 힘을 주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보이는 것은 똑같았다. 즉, 잘못 본 게 아니라는 뜻이다.
'대체.'
그것은 분명 크렘보르의 문장기였다. 이 도시에 수십 개 가 넘게 꽂혀 있는 깃발과 같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