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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731화 (731/1,064)

731화

시어문드는 밀려오는 적을 보며 쓰게 웃었다.

'함정이었나.'

도시 안의 병력이 대거 빠져나갔으니 그를 노리는 적의 역공은 예측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반응이 너무 빠르다. 기다렸다는 듯 움직이는 것을 보면 미리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예비대를 전부 성벽 위로 올린다! 끊는 기름을 준비해!"

버틸 수 있을까. 쉼 없이 명령을 내리면서도 시어문드는 가능성을 따져보았다.

승산이 아니다. 가능성이다. 군터가 신속하게 돌아온다는 가정하에, 그가 올 때까지 버틸 수 있을지 없을지를 계산해보는 것이다.

'어렵겠지.'

적은 준비를 철저히 했을 것이다. 최소 삼면에서 전군이 공격해올 텐데, 한 곳이라도 뚫리는 순간 끝이라고 봐야 한다.

'주공(主攻)이 어디인지가 문제로군.'

세 방향에서 들어온다고 가정하면 조공이 둘에 주공이 하나일 것이다. 이쪽의 전력을 분산시키기 위한 눈속임. 거기에 속지 않고 제대로 대응할 수만 있다면 어렵더라도 어떻게든 버틸 수 있으리라.

"지금 당장 서문과 동문으로 가서 언제든 움직일 수 있게 이천 정도를 빼놓으라고 전해라."

"옛!"

당장 눈앞에 대군이 몰려오는데 따로 병력을 빼놓는다는 것이 무리한 요구일 수도 있다. 그러나 상황이 상황인 만큼, 무리하는 수밖에 없다.

시어문드는 전령을 보낸 후, 삼천 명을 따로 빼놓았다. 여차하면 다른 쪽으로 보낼 지원병이었다. 그들을 보내고 나면 남는 건 고작 이천이 조금 넘는 병력뿐이지만, 그는 차라리 이병력을 보낼 일이 생기기를 바랐다. 만약 이들을 보내지 않는다면, 그건 적이 이 남쪽 성벽을 넘기 위해 이를 갈고 있다는 뜻일 테니.

하지만,

"하아."

가까이 다가온 재군을 보며, 시어문드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알아보기 쉽게 대장기가 휘날린다거나, 머릿수가 유난히 많다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가라앉은 듯하면서도 잘 벼린 칼날처럼 예기가 흐르고 있을 뿐.

한눈에 알아보았다.

'나로군.'

따로 빼두었던 예비대를 즉시 합류시켰다. 그리고 다시 한번 동쪽과 서쪽으로 전령을 보내 원군을 요청했다.

뿌-우우우!

첫날부터 그랬지만, 오늘은 길게 울리는 저 호각소리가 한층 더 끔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고개를 젖혀 턱밑에서 날아드는 창을 피했다. 그리고 한 손으로 창날 바로 아래를 붙잡고 힘껏 잡아당겼다. 미처 창을 놓지 못한 적병이 당황하며 끌려오는 것을 그대로 휘둘러, 밀집해 있는 적의 한복판으로 날려버렸다.

"장군을 따르라!"

군터는 길을 열었고, 뒤따르는 병사들이 그 길을 넓게 벌렸다.

처음 막아선 적을 돌파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처음 적의 진형을 뒤흔들었던 중장기병의 활약이 컸다. 군터와 병사들은 잠깐 주춤하는 듯하더니 금세 무리 없이 적진 한가운데를 돌파했다.

"쓸모없는 것들."

그를 지켜보고 있던 몰드 키라카는 못마땅한 기색을 드러내며 혀를 찼다. 기대도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설마 이렇게까지 무력하게 뚫릴 줄은 몰랐다. 정말 머릿수를 채우는 것 외에는 기대할 것이 없는, 형편없는 오합지졸들이 아닌가.

'그나저나…대놓고 무시하는군.'

쓸모없는 것들이 제 역할을 하지 못했음은 분명하지만, 적이 처음부터 제대로 싸워줄 생각이 없었음도 분명하다.

그들이 노리는 것이 무엇인지는 명확하다.

'내 목'

바보가 아니라면, 지금쯤 함정에 빠졌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터. 그럼에도 말머리를 돌리지 않고 치고 들어온다는 건, 물러나기보다는 끝을 보고자 마음먹었다는

'어리석고, 오만하구나.'

아무래도 적 지휘관은 용력에 자신이 있는 듯했다. 어쩌면 대장이, 군터 크렘보르가 직접 나섰을지도 모른다. 매 전투마다 선봉에 서기를 즐기는 자라고 했으니, 가능성이 아주 없지는 않다.

'멧돼지를 정면에서 상대할 필요는 없지.'

이쯤 되면 시건방진 적과 정면으로 교전할 생각도 들법하지만, 몰드 키라카는 냉정했다. 그는 힘싸움도 꺼리지 않는 사내였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힘싸움이 반드시 필요할 때만이었다. 매 전장, 매 전투마다 그는 가장 효율적인 방식을 택해왔다.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역할이 무엇인지 잘 알았다. 아군이 도시를 공략할 때까지 적의 발을 묶어 시간을 버는 것. 이 만약 적이 돌아가려는 낌새를 보였다면 즉시 추격하여 맞붙었겠지만, 그게 아니라 아예 정반대로 치고 들어오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굳이 적에게 어울려줘야 할 필요가 없다.

"일자방진을 짠다. 그리고 술사들에게 일러 적기병을 멈춰세우라고 해."

"옛!"

정직하게 돌격해오는 기병만큼 상대하기 쉬운 적은 없다. 그들이 돌파력을 갖기 위해서는 달릴 땅이 필요하니, 그땅을 무너뜨리거나 흔들어놓으면 돌파력은 자연히 감소하게 되고, 돌파력을 잃은 기병은 노리기 좋은 먹잇감으로 전락하고 만다.

"화살을 쏜 직후, 틈을 놓치지 마시오."

"알겠소."

화살비를 퍼부었다. 적이 속도를 높여 화살을 피하자 준비하고 있던 술사들이 일제히 손으로 땅을 짚었다.

우르르!

멀쩡하던 지반이 갈라지고, 꺼지고, 튀어올랐다. 말들이 당황하여 비명을 지르고, 균형을 잃은 병사가 말 위에 비틀대거나 떨어져 나갔다.

그때까지, 키라카 몰드는 계획대로 착착 맞아떨어지는 전황에 안도와 여유를 느꼈다.

그러나 기껏해야 이백이나 될까 싶은 기병이 갑자기 툭 튀어나왔을 때, 그리고 그들이 방진을 그대로 들이받았을 때.. 그는 우습지만 영문 모를 불안감을 느꼈다.

'왜지?'

바보같은 생각이다. 고작해야 이백 아닌가. 저 정도 수로 뭘 할 수 있을까. 무모하게 성질을 부리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럴 것이다. 분명 그럴 터인데.

"막아!"

굳건하게 버텨야 할 방패의 벽이, 왜 위태롭게 흔들리는 것인가.

***

검은 연기와 새빨간 불꽃이 넘실거린다. 덕분에 성벽 바로 앞까지 다다랐던 병력이 바로 성벽에 달라붙지 못하고 발을 굴렀다.

"제법."

대응은 신속했고, 과감했다. 잔카라스 데반은 성벽 위 어딘가에서 지휘하고 있을 적장의 재주가 상당함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쪽이 주공임을 알았던 건가? 아니면 그냥 시간을벌기 위해서? 뭐가 됐든…영리하군.'

연기는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법이고, 태울 것이 없는 불은 오래 타오르지 못한다. 그러니 적의 과감한 수는 약간의 시간벌이 밖에 되지 못하는 것이다.

허나, 그럼에도 입맛이 쓴 이유는 흐름이 끊겼기 때문이다. 기세가 오를대로 올랐던 병사들의 진격이, 어쨌거나 끊겨버렸으니까 말이다.

"방패 들어!"

검은 연기 속에서 화살이 쏟아졌으나 대비하고 있었던지라 크게 피해를 입는 일은 없었다.

"다른쪽은 어떤가?"

"공격을 개시했습니다. 그들은 장군께서 말씀하신 대로 압박에 주력하되, 틈이 보인다면 즉시 성벽을 넘을 것입니다."

"명색이 주공이 되어서 조공보다 느리다면 체면이 말이 아닐 테지. 곧 불길이 사그라지면 바로 움직인다."

공성추는 이미 성문 앞에 거의 다다랐다. 명령만 내린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성문을 두들길 수 있을 것이나, 병사들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 일부러 시간을 지체하고 있었다.

"지금이다."

잔카라스 데반의 지시가 떨어지기 무섭게 발을 멈췄던 병력이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한 번 멈췄던 만큼 멈추기 전보다 발걸음에 힘이 실리지는 않았지만, 그 기세는 여전히 매서웠다.

쿵! 쿵!

거대한 추가 앞뒤로 흔들리며 성문을 때렸다. 수십 개가 훌쩍 넘는 사다리가 성벽에 걸리고, 새까만 점들이 그 사다리를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기름을 부어라!"

병사 셋이 끓는 기름을 담은 통을 들고 다급히 달려갔다. 그러나 그들이 사다리 앞에 닿기도 전에,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이 그들 중 하나의 목을 꿰뚫었다.

"어억!"

세 명이 힘겹게 지고 다니던 중에 한 명이 쓰러지니, 나머지 두 명이 버티지 못하고 통을 놓쳐버렸다. 팔팔 끓는 기름이 주변의 병사들에게 튀는 것은 당연했다.

"아아악!"

멀찍이서 그 광경을 목격한 시어문드는 이를 갈며 고개를 돌렸다.

'침착하군. 아니, 냉정해.'

우연이 아니다. 아래에서 날아드는 화살은 몇 번이나 중요한 순간에 맥을 끊어놓고 있었다.

격렬하게 밀어붙이는 것 같지만, 그러면서도 성벽 위의 동향을 놓치지 않고 있다. 역할 분담이 철저하게 되어있는 느낌이라고 할까.

'어렵군. 어려워.'

그나마 뭔가 했다 싶었던 것은 처음 성벽 앞에 불을 질러 적의 발을 늦췄던 것뿐. 그 이후로는 시종일관 두들겨맞기만 하고 있다. 어쩔 수 없는 일이고, 이렇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입맛이 썼다.

'이렇게 계속 버티는 수밖에 없나.'

문제는 버티는 것도 쉽지 않다는 거다. 그야 적의 주공이 이쪽에 쏠렸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지만……

'너무 늦으면 곤란합니다. 장군.'

시어문드는 군터가 도중에 군을 물리리라 기대하지 않았다. 그는 얌전히 물러나기보다는, 함정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더라도 눈앞의 적을 들이받을 사람이다. 시어문드는 그런 군터를 적으로 직접 상대한 경험이 있기에 그에 대해 확신할 수 있었다.

일반적인 경우에는 자충수라고 할 수 있다. 적은 최대한 버티면서 물고 늘어질 테고, 그러면 이쪽은 주력이라고 할 수 있는 병력이 북쪽 성벽 밖에서 시간만 죽이게 되는 꼴이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말이다.

'보여주십시오. 그때처럼.'

그런데도 희망을 버리지 않고, 기대를 거는 이유는 역시 과거 군터를 적으로 상대해본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당연한 것 같은 상황을 무너뜨리는 그 말도 안 되는 힘.

본래라면 그런 것에 기대서는 안 되지만, 지금은 달리 방도가 없지 않은가.

"방패병! 더 바짝 붙어라!"

커다란 방패를 든 병사의 호위를 받으며, 시어문드는

바쁘게 걸음을 옮겼다. 그러는 사이에도 성벽 바깥쪽과 아래에서는 비명과 고함이 끊이지 않고 있었다.

***

콰앙!

방패가 찌그러지고, 그것을 들고 있던 병사는 팔이 으스러진 채 나가떨어졌다. 군터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재차 창을 휘둘렀다.

창의 궤적에 걸리는 적은 없었다. 그러나 창에서 뻗어나간 검은색 선이 창끝이 가리킨 곳에 있던 적병 넷을 덮쳤다.

"크헉!"

안도하고 있던 병사는 갑작스레 답답해지는 가슴을 부여잡고 비틀거렸다. 그의 안색이 삽시간에 창백해지고, 들고 있던 창마저 놓쳤을 때. 그는 뒤편에서 터져나온 고함을 어렴풋이 들었다.

"허억!"

뒤늦게 반응하여 고개를 들었으나, 그 순간 그가 본 것은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와 있는 거대한 인마(人馬)였다.

콰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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