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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730화 (730/1,064)

730화

"보십시오. 제가 말씀드린 대로이지 않습니까."

기뻐해야 할까, 난처해 해야 할까.

이성적으로 생각해보면 전자일 텐데, 몰드 키라카는 자신의 마음이 자꾸 후자 쪽으로 향하고 있음을 느꼈다. 그 까닭이 무엇일까 잠시 고민해보았는데, 답은 간단하게 나왔다. 지금 주절대고 있는 저놈이 못마땅하기 때문이다.

'상관을 배신한 놈치고는 과할 정도로 태연하군.'

배신이라고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이놈은 메일러 오챈의 부관이지만 동시에 바라눔 트라소프 황자의 신하다. 즉, 작게 보면 배신이지만 크게 보면 충의를 지킨 셈이 되는 것이다.

몰드 키라카는 그렇게 이해하려고 노력하면서 계속해서 주절대는 놈의 말을 잘랐다.

"네가 병사들을 수습하여 전열에 서라."

"예?"

당황한 기색이었다. 동시에 두려움과 분노도 느껴졌다.

"사특한 마음을 먹은 것은 메일러 오챈입니다. 소관은 대의를 위해서 상관의 ……"

"오해하지 마라. 난 네게 기회를 준 것이다."

"기회……?"

기회라는 말에 곧바로 눈을 굴려대는 꼴이 우스웠으나, 그는 내색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메일러 오챈이 다른 마음을 먹었었고, 반역 행위로 처벌당했다는 사실은 곧 알려질 것이다. 막으려고 해도 퍼져나갈 것이고, 막을 이유도 없으니까. 그렇게 되면 안 그래도 입지가 좁았던 투항병들의 처지가 어찌 될지는… 말하지 않아도 잘 알겠지."

"과는 공으로 덮는 법. 평시였다면 어려운 일이나, 전시에는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지. 공을 세워라. 그럼으로써 자네는 안정적으로 메일러 오챈의 뒤를 이을 수 있을 테고, 동시에 병사들의 지지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조금만 머리가 돌아가는 자라면 이게 다 입에 발린 소리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인간은 어리석기에, 때때로 아는 것조차 모르는 채 넘기는 경우가 있다. 욕심이라는 것에 눈이 멀어버린다면 그런 경우는 더욱 흔하다.

"장군. 소관을 믿고 지원해주신다면, 소관은 장군의 은혜를 평생 잊지 않을 것입니다."

눈이 먼 와중에도 이런 말을 하는 것은, 그런 와중에도 제 목숨이 아까운 줄은 알아서일까.

몰드 키라카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가벼운 대답에서 무엇을 느꼈는지, 불안과 희열이 뒤섞여 있던 놈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뭔가 제대로 착각을 한 것 같았지만, 몰드 키라카는 굳이 그 착각을 지적해주지 않았다.

'인간은 각기 쓰임새가 있는 법이라 했던가.'

바로 얼마 전에 들은 말이다. 그 말을 들었을 당시에는 반신반의 했었지만, 지금 이렇게 보고 있자니 그 말이 꽤 그럴 듯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하의 혜안이 놀랍구나.'

솔직히, 잔카라스 데반에 대해 깔보는 마음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나이도 나이지만, 경험이 부족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가 나이에 비해 출중한 능력을 지녔으며 역시 나이에 비해 상당한 활약을 해온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도 수만 대군을 이끌만한 인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와서 돌이켜보니 그것은 편견이며 질투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잔카라스 대반은 특별한 인재다. 그의 시간은 평범한 이들과는 다르게 흐른다. 그리고 황자는 그것을 알아보았기에, 그를 수만 대군을 이끄는 상장으로 삼았다.

"장군. 저놈들이 버틸 수 있을까요?"

욕심에 눈이 뒤집힌 놈이 사라진 후, 그의 수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에 몰드 키라카는 단호히 답했다.

"그럴 리 없지."

"그렇다면…"

"먼지구름을 봐라. 기병이다. 기병이 길을 열고 뒤따르는 보병으로 찢어놓겠다는 뜻이겠지."

밀고 들어오는 대규모 중장기병과 부딪친다면 그 결과는 뻔하다. 정면에서 상대한다면 살을 내주는 수밖에 없는데, 저들이 할 역할이 바로 그것이다.

"전투가 시작되면 거리를 벌려라. 기병이 발을 멈추면 그때 바로 압박한다."

"옛!"

인간은 각기 쓰임새가 있다. 그 말이 참으로 옳다. 아무리 쓸모없는 족속 같아도, 이렇게라도 쓸 곳이 있지 않은가.

***

군터는 말을 달리는 도중, 그러니까 적과 맞닥뜨리기 전에 이상을 감지했다.

성문을 열리고, 먼지구름이 피어오르는 것을 봤을 터인데도 적진의 반응이 생각보다 미적지근했다. 이말은 대응이 침착했다는 것과 같은 뜻이었다.

또한, 군터는 초인적인 시력으로 적이 두 무리로 나뉘어 움직이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는 사전에 약속했던 것과 명백히 다른 움직임이었다. 본래 계획은 메일러 오챈이 적진 내부에서 혼란을 유도하며 안에서부터 호응하는 것이었다.

'틀어졌군.'

메일러 오챈의 배신일까, 아니면 발각된 것일까. 뭐가 됐든 낭패인 것은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둘 중 하나라면 후자가 낫다.

'돌아가야 하는가.'

일이 틀어진 것을 확신한 순간, 군터는 갈등했다. 지금이라도 말머리를 돌려야 할까? 하지만 이미 너무 많이 나왔다. 이제와 말머리를 돌려봐야 추격만 당할 뿐. 또한.

'안일하군.'

적은 알고 있었다. 메일러 오챈이 배신한 것이라면 말할 것도 없고, 발각당한 것이라도 사전에 알아차렸을 터.. 그렇다면 미리 병력을 증원해야 했다. 그러나 지금 눈에 보이는 북군의 병력은 사흘 전과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고작해야 1만 3, 4천 정도? 설마 저 정도로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한 걸까.

오산, 혹은 오만. 뭐가 됐든 저들은 오판에 대한 대가를 치를 것이다.

"장군! 뭔가 이상합니다!"

바짝 따라붙어 있던 아드리안이 고래고래 소리쳤다. 늦기는 했지만, 그 역시 적의 움직임에서 위화감을 느낀 모양이었다.

"메일러 오챈은 실패했다. 아니면 우리를 속였거나."

"옛?! 그럼 …"

"그래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그러니 함구해라. 동요하는 자들이 없도록."

"아, 알겠습니다!"

메일러 오챈에 관한 일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회의에 참석했던 수십 명이 전부였으니까. 그리고 그 중 삼분지일 정도가 지금 그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그들은 어리석지 않으니, 전투에 돌입한 후에 뭔가 이상함을 느낀다 하더라도 입을 다물 터였다.

"거창!"

적과의 거리가 어느 정도 가까워졌다. 군터는 전열의 기병들에게 창을 들 것을 명했다. 일반적인 창이 아닌, 들고 있는 것조차 버거울 것 같이 긴 창이었다. 일반적인 중장기병이 사용하는 마상창.

본래 군터는 이 단순무식한 무기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이것은 패용하기도 힘들뿐더러, 충돌할 때 한 번 사용하고 나면 끝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는 이런 마상창은 물론, 중장기병이라는 병종 자체에 그리 우호적이지 않았다. 예전에는 말이다.

'한 번 밖에 쓸 수 없지만, 그 한 번만은 유용하지.'

어쩌면 중장기병과, 그들의 긴 창에 대한 생각은 편견이었을지도 모른다. 고도의 훈련이 없이도 상당한 효율을 낼 수 있다는 점에서, 중장기병과 그들의 단순한 돌격은 나름 쓸모가 있었다.

그것을 인정한 후, 군터는 그의 군대에서 중장기병을 활용하기 위해 나름대로 이런저런 시도를 해보았다. 그리고 그렇게 고민하여 얻은 결론이 이것이었다.

콰앙!

전열에 넓게 퍼진 중장기병이 적을 들이받았다. 방패와 창으로 쌓은 벽이 육중한 기병의 돌격에 흔들리고, 군데군데 무너졌다. 전신에 철갑을 걸친 기병은 마찬가지로 갑옷을 입은 말과 함께 틈을 만들고, 그 틈을 억지로 벌려가며 전진했다.

그들의 역할은 거기서 끝이었다.

"돌격!"

전열의 중장기병이 돌입한 후, 거리를 벌리고 따라오던 후열의 기병이 그 뒤를 받친다. 충분한 거리를 질주한 터라 돌파력이 살아있는 그들은 이미 한 번 흔들린 적진을 보다 수월하게 휘저을 수 있다.

물론 이것은 모든 것이 이상적으로 딱딱 맞아떨어졌을 경우다. 실제로 이런 그림이 완벽하게 그려지는 것은 힘들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완벽하지는 않아도 그에 가깝게 그림이 그려졌다.

"흡!"

군터는 창을 길게 잡고 휘둘렀다. 검은 선이 길게 한 번 그어질 때마다 어김없이 피가 튀었다.

'엉성하군.'

처음 한번 창을 휘두르면서부터 쉽다는 생각이 든 것은 착각이 아니었다. 실제로 적은 엉성했다.

한눈에 알아봤다. 이들은 메일러 오챈 휘하의 병사들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정도의 엉성함은 설명이 되지 않는다.

대열은 그럭저럭 갖췄으나, 군기는 바닥이었다. 군터는 그것이 이들이 투항병이기 때문이거나, 아니면 이들이 화살받이라는 자신들의 처지를 알아차렸기 때문이라고 짐작했다.

그리고 동시에 확신했다.

'배신은 아니로군.'

메일러 오챈이 살아있다면, 그리고 제정신이라면 제 목숨줄이나 마찬가지인 병사들을 이런 식으로 내팽개치지는 않을 터였다.

"돌파한다!"

전장의 한복판에서, 군터는 저 멀리서 여유롭게 움직이고 있는 또 하나의 적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것을 본 순간, 즉시 소리치며 말을 달렸다.

***

"장군! 적이 빠져나왔습니다!"

다급한 보고가 들렸을 때, 잔카라스 데반은 환히 웃었다.

"드디어 움직였는가!"

메일러 오챈에게 감사해야겠군, 그는 순간적으로 떠올린 생각을 웃으며 지워버렸다. 그 얼간이에게 감사하더라도 지금은 아니다. 이제부터는 속도가 생명이다.

"전력의 상당수가 빠져나왔다. 북군을 제외한 삼군은 즉시 공격을 개시한다. 삼면에서 일제공격하여 단숨에 성벽을 넘는다."

그의 지시가 떨어지자마자 요란한 호각 소리와 함께 동서남의 삼군이 공격을 개시했다. 갑작스러운 명령에 병사들은 당황했지만, 그들을 지휘하는 장교들은 호령을 망설이지 않았다.

"오늘, 저 지긋지긋한 도시를 함락시키는 거다."

가능하지 않을까 싶었었다.

메일러 오챈은 똑똑한 자다. 동시에 어느정도 욕심도 있는 자였다. 잔카라스 데반은 그를 처음 봤을 때부터 그것을 알아보았다.

처음에는 그런 것도 가능할 수 있겠다, 정도였다. 하지만 전투가 예상했던 것보다 길어지고, 조바심이라는 놈이 어쩔 수 없이 슬슬 고개를 들면서 처음엔 가능성을 엿본 것에 불과했던 계획에 점점 눈이 가기 시작했다.

의도적으로 메일러 오챈을 고립시켰다. 겉으로는 달래는 척하면서 계속해서 그를 심적으로 몰아붙였다.

휘하 병사들의 인망을 잃어가는 항장. 군영에서 고립된 항장. 그런 자가 할 수 있는 선택이 달리 뭐가 있을까. 제 목숨 하나 외에는 세상 모든 것을 돌로 보는 겁쟁이거나 타개책을 떠올리지 못하는 얼간이라면 모르지만, 다행스럽게도 메일러 오챈은 둘 다 아니었다.

유일한 걱정은 키파의 적이 의심병에 걸리거나 몸을 사리는 것이었지만, 인내심을 가지고 지켜보니 결국 미끼를 물었다.

'뱀이 굴을 나왔으니, 이후는 쉽지.'

뱀을 상대할 때 주의해야 할 것은 대가리에 달린 독니다. 땅을 기는 것밖에 못하는 몸뚱이나 꼬리야 안중에도 없다.

'직접 나섰겠지.'

추측이 아니라 확신이다. 군터 크렘보르라는 자에 대해 들은 이야기와, 직접 보고 겪은 바로 판단한 결론이다. 그자는 북문을 나섰을 테고, 다시는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와아아아!

그는 많이 참았지만, 병사들 역시 많이 참았다. 그 억눌린 열기가 내지르는 함성에 묻어났다.

까만 물결이 도시를 향해 밀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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