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9화
메일러 오챈에게 접근한 것은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적이 도시를 포위한 지 벌써 세달째였다. 도시 내 비축한 군량은 아직 여유가 있었지만, 도시 내의 분위기는 점점 흉흉하게 변해가고 있었다. 병사들보다는 도시에 남아있던 시민들 때문이었다.
군터는 일찍이 적이 당도하기 전에 그들에게 도시를 빠져나가라고 권고했었다. 정확히는 도망칠 사람은 도망치라고 한마디를 한 것뿐이지만, 어쨌든 그는 그들에게 기회를 줬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도시에 남았다. 침략자들로부터 고향을, 혹은 집을 지키기 위한 각오가 섰기 때문이었을까? 그랬으면 좋겠지만, 그게 아니었다. 그들은, 그저 도망치는 것조차 두려웠던 것뿐이다.
처음 적이 도시 밖 평야에 당도하고 몇 번의 전투가 벌어질 때까지, 그들은 조용히 숨죽이고 있었다.
하지만 전투가 벌어지지 않고 한 달이 지나고, 또 보름이 지나자 그들은 슬슬 배부른 소리를 해대기 시작했다. 군터는 그들에게 손을 쓰고 싶었으나, 그럴 수는 없었다. 그들 중 상당수가 병사들의 가족이며 친지이기 때문이었다.
"억지로라도 그들을 내보내야 했습니다."
시어문드가 혀를 찼다. 군터도 그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이미 때는 늦었고, 후회해봐야 소용도 없는 것을.
"저들은 어리석지만, 동시에 어리석지 않습니다. 도시 내에 비축된 물자가 지금도 꾸준히 소모되고 있음을 알고 있겠지요. 저들이 기대고 있는 것은 원군에 대한 희망이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 희망에 대해서도 회의적으로 생각하게 될 겁니다."
그리고 그 희망이 완전히 꺾이게 되는 순간. 저들은 더는 참지 않을 것이다. 성문을 열어젖힐지, 아니면 관청으로 뛰어들지, 어쨌거나 긍정적인 반응은 나오지 않을 터.
"인내심이 강한 쪽이 승리하리라 생각했었다."
적의 사정도 좋지 않다. 잔카라스 데반이 처음부터 거느렸던 병력과 이곳으로 오면서 복속시킨 병력이 대립하고 있고, 거듭된 약탈로 인해 후자의 군심이 흔들리고 있는 상황. 그 갈등은 봉합되지 않고, 앞으로 그럴 것이 확실하니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이쪽에게 유리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군터 자신의 인내심은 충분할지라도, 도시 안에 갇혀 있는 이들은 그러지 못했다. 군터는 그것을 간과했다.
"이 분위기를 한번은 환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제안한 것은 시어문드였다. 나날이 우중충해지고 있는 도시의 분위기를 바꿔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번 부딪치는 것이 제일이었다. 그러나 적이 공격해주지를 않는데 무턱대고 성문을열고 뛰쳐나갈 수는 없는 노릇.
"메일러 오챈에게 접촉하시지요."
"괜찮겠나?"
군터가 고개를 슬쩍 옆으로 젖혔다. 메일러 오챈에게 접촉하자는 말을 처음 꺼낸 것은 토어릭이었고, 시어문드는 신중해야 한다고 했지만 사실상 토어릭의 의견에 반대했었다. 함정일지도 모르니, 위험부담이 너무 크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이대로 시간만 보내는 것도 부담입니다. 그리고… 들려오는 소식을 종합해보면 메일러 오챈의 상황이 거짓일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아 보입니다."
메일러 오챈은 현재 거의 막다른 곳에 몰려 있었다. 동료 무관들은 그를 대놓고 괄시하고 있었고, 그를 따르는 수하들도 그에게 대놓고 불만을 드러내고 있다고 했다. 장교들이 그 정도라면 그 밑의 병사들이야 말할 것도 없으리라.
"더 시간을 끌었다가는, 그가 완전히 실각해버릴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되면 과일이 익었는지 기다리려다가 익다 못해 상해버리는 꼴이다. 시어문드는 그런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의심을 버리지 않았지만, 호기가 될 수도 있는 것을 그냥 놓쳐버릴 생각은 없었다.
"좋다."
군터도 이 상황이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그의 마음은 사실 진작 기울어 있었다. 다만 신중해야 한다는 시어문드의 말이 옳다 여겨 묵묵히 참고 있었을 뿐.
하지만 시어문드가 직접 권하니, 군터는 그날 바로 적진에 잠입해 있는 첩자를 통해 메일러 오챈과 접촉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다음 날 이른 새벽에 그에게 전해졌다.
"고심하는 듯했지만, 결국 받아들였다…라."
"두 번이나 배신자가 된다는 것 아닙니까. 그로서도 쉬운 일은 아니겠지요."
토어릭의 말에 아드리안이 콧방귀를 뀌었다.
"흥! 어려울 건 또 뭔가.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이야 뭐……. 그놈은 그저 목을 붙여주겠다는 약속이 진짜인지 의심했을 뿐이야."
"그럴 수도 있겠지. 뭐, 어쨌거나 이걸로 한시름 덜었군."
가볍게 한숨을 내쉬는 토어릭. 그러자 이번에는 시어문드가 입을 열었다.
"안심하기에는 이르네. 그자를 믿고 안 믿고를 떠나, 그자가 우리에게 기회를 줄 수 있는지도 아직 확실하지 않으니까."
메일러 오챈은 이제 잔카라스 데반의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었다. 원래 항장인 데다, 동료 장수들과의 관계도 좋지 않고, 군사 회의에서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등 안 좋은 꼴을 제법 보였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그가 거느린 병력이 여전히 수천이니 어느 정도 대우를 해주기는 할 터.
"닷새 안에 답을 주겠다고 했으니, 기다려보시지요."
메일러 오챈은 이쪽에 가담하는 것을 긍정하면서 닷새를 이야기했다. 그 안에 어떻게든 결과를 내보겠다는, 그러니까 바꿔 말하면 쓸모를 증명하겠다는 뜻이었다.
"그래. 지켜보도록 하지."
메일러 오챈은 그가 한 말을 지켰다. 정확히 사흘 후, 그는 첩자를 통해 말을 전해왔다.
"엿새 후 북군(北軍)에 휘하 병력과 함께 배치되니, 그쪽으로 치고 나온다면 호응하겠다?"
"함정일까요?"
함정 운운한 것은 시어문드가 한 말도, 할렌이 한 말도 아니었다. 우습게도 토어릭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처음에 메일러 오챈을 끌어들이자 한 것도 그였고, 이후에도 가장 열성적으로 나섰었으나 막상 이렇게 되고 나니 긴장되는 모양이었다.
"메일러 오챈의 말에 따르면 북군의 규모는 1만 3천가량입니다. 그중 메일러 오챈의 병력이 3분의 1에 조금 못 미치지요. 또한…그의 병력은 후방에 머물 모양입니다."
이 역시 메일러 오챈이 저들 사이에서 신뢰받지 못하고 있다는 방증이었다.
"그가 호응한다면…적어도 북쪽의 적을 쓸어버리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 같습니다."
시어문드의 입에서 긍정적인 반응이 나오자 장내의 분위기가 달아올랐다. 그동안 갇혀 있으면서 답답했던 것은 저 밖의 병사나 시민들만이 아니었다.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이 자리에 있는 이들도 다를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이제야 좋은 기회가 찾아왔으니, 그들도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엿새 후다. 차질 없이 준비를 철저히 하도록."
"옛."
***
메일러 오챈은 요 며칠 동안 고생 아닌 고생을 하느라 심력이 거의 다 고갈된 상태였다.
"장군."
오늘도 아침 일찍 일어나 무장을 점검하고 있는데, 막사 밖에서 그의 부관이 들어왔다. 목소리부터 몸짓까지, 자세히 살피지 않으면 알 수 없었으나 분명 조심스러운 태도였다.
"오늘입니까?"
"그래. 오늘이다."
두서없는 말이었지만 두 사람 모두 그것으로 충분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부관은 메일러 오챈의 뒤로 가 그가 갑옷을 입는 것을 도왔다.
몇 번 철컥 소리가 난 뒤, 메일러 오챈은 마지막으로 투구를 향해 손을 뻗었다.
"과연 저들이 약속대로 움직일까요?"
"움직일 것이다."
"장군께서는 저들을 믿으십니까?"
믿냐고? 그 순진한 질문에 메일러 오챈은 순간 쓴웃음을 지었다.
"믿는다."
"어찌……"
"저들도 우리만큼이나 간절하다. 난 저들을 믿는 것이 아니라, 저들의 간절함을 믿는다."
다 이해한 얼굴은 아니었다. 그러나 메일러 오챈은 더 설명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투구를 쓰고, 고리를 채운 후 그는 천천히 막사 밖으로 향했다.
막사를 나서자마자 보이는 것은 여기저기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병사들이었다. 일찍 일어난 그보다도 더 일찍 일어난 병사들이 저마다의 임무를 바쁘게 수행하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하나같이 짙은 피로감이 묻어 있었다. 저들에게 있어 오늘의 아침은 어제의 아침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점심도, 저녁도 그렇겠지. 저들은 오늘 하루도 어제와 똑같이 무미건조하게 지나가리라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참으로 기구하구나.'
메일러 오챈은 그에게 군례를 올리는 병사들을 지나치며 상념에 잠겼다.
한때, 그는 나름대로 명망 있는 무장이었다. 주 전역에 이름을 떨치는 명장은 아니었으나, 적어도 그의 임지 인근에는 그의 이름을 모르는 이를 찾기 힘들 정도였다. 그러한 명성은 부정적인 방향으로 쌓은 것이 아니었기에, 그는 자신의 지위와 권세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어쩌다 이런 꼴이 됐단 말인가.'
객관적으로 봐도 나름 괜찮은 시절이었다. 그러나 전란이 모든 것을 휩쓸어 버렸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할 수 있는 것은 어떻게 해서든지 이 한 목숨을 건사하는 것뿐이었다.
"장군. 이곳은 어쩐 일로."
"속이 답답해서, 눈요기나 좀 하려 하네."
북군이 진을 친 군영 뒤쪽에는 야트막한 언덕이 하나 있었다. 이곳에는 눈 좋은 병사 몇과 고수(鼓手), 그리고 유사시에 움직일 전령들이 상시 대기하고 있었다.
이곳을 관리하는 장교는 메일러 오챈이 나타나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속이 답답해서 왔다는 그의 말에 곧 납득한 듯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 공손한 자세였지만, 메일러 오챈은 그를 보며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이런 곳에 있는 말단 장교조차 내 사정을 안다는 말인가.'
장교의 태도에는 흠잡을 구석이 조금도 없었다. 그러나 메일러 오챈은 그런 공손한 태도에서조차 심한 모욕감을 느꼈다.
그는 거칠어지려는 숨을 애써 가다듬으며, 저 멀리 보이는 성벽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나를 몰아세운 것은 너희들이다. 그러니 나를 원망하지는 말아라.'
잔카라스 데반을 비롯하여, 그를 이곳까지 몰아세운 자들의 얼굴이 머릿속에 빠르게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뿌우우우!
그때였다. 갑작스럽게 호각이 울리더니, 저 아래 군영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주변에 있던 장교와 병사들이 영문을 몰라 당황했으나, 메일러 오챈은 바로 이게 어찌 된 상황인지 알아차렸다.
'시작됐구나!'
그가 다시 성벽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너무 멀어서 자세히 보이지는 않지만, 성벽 한가운데 쪽에서 먼지구름이 일고 있었다. 성문이 열리고, 군대가 나온 것이다.
'좋아. 이제……'
메일러 오챈이 흥분을 가라앉히며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그가 몇 발자국 떼기도 전에, 아래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장군님! 메일러 오챈 장군님!"
급하게 그를 부르는 목소리. 고개를 돌리니 막 말에서 뛰어내리고 있는 무관이 보였다. 익숙한 얼굴이었다.
'키라카 놈의 부관 놈이었던가.'
북군을 총괄하는 몰드 키라카. 군사 회의라도 하면 그에게는 시선 한 번 주지 않던, 그 오만한 작자가 항시 옆에 두고 있던 부관이다. 그래서 이름은 몰라도 얼굴만은 눈에 익었다.
"키라카 장군께서 급히 찾으십니다!"
"그런가?"
메일러 오챈은 속으로 코웃음 쳤다.
평소에는 거들떠보지도 않더니, 일이 벌어지니까 꼬랑지에 불붙은 망아지 새끼마냥 입에 거품을 무는 것이 우습기 짝이 없었다.
"하옵고……"
"뭔가?"
아직 전하지 못한 말이 있는지, 부관이 숨을 헐떡이며 다가왔다. 그에 메일러 오챈은 심드렁하게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그러나 간신히 그의 앞까지 왔다 싶은 순간, 부관의 몸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였다.
푹!
그리고, 그의 가슴에 서늘한 무언가가 파고들었다.
"잔카라스 데반 장군께서 안부 전하라 하시더군요."
메일러 오챈이 눈을 부릅뜨고 그의 가슴에 파고든 자를 보았을 때, 조금 전까지 숨을 헐떡이던 부관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올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