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화
전투 없는 전투가 이어졌다. 이제는 간간이 찔러보던 것조차 없어졌다. 한가한, 그러나 여전히 긴장감이 감도는 도시에서 군터는 한가함을 넘어 무료함마저 느끼고 있었다.
어제도, 오늘도 변함이 없다. 물론 상황은 계속 달라지고, 있다. 느리지만 꾸준하게, 여러 곳에서 소식이 들려온다. 그 대부분이 긍정적인 소식이 아니라는 점은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대부분이 그럴 뿐이지 전부 그런 것은 아니다. 들어줄 만한 소식도 있었다. 예를 들면.
"잔카라스 데반과 메일러 오챈이 언쟁을 벌였다고 합니다."
"언쟁이라."
메일러 오챈은 항장이다. 항장이 기존 세력의 장수와, 그것도 군대를 이끄는 대장과 말싸움을 벌인다는 것은 상상하기도 힘든 일.
"별일이군요. 드러내놓고 불만을 표하는 것만 해도 목을 건 셈인데, 거기서 더 나아가 직접 언쟁을 벌이다니. 그럴 이유라도 있었던 걸까요."
시어문드의 말처럼, 그런데도 메일러 오챈이 잔카라스 데반에게 목소리를 높였다면 그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였을 것이다. 그 이유가 궁금했지만, 안타깝게도 포위당해 있는 쪽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에는 한계가 있다. 그러니 적진에 잠입해 있는 눈과 귀들에게 최대한 알아보라고 하는 것이 할 수 있는 전부다.
"그 메일러 오챈이라는 놈 말입니다. 이쪽으로 회유할 수는 없을까요?"
토어릭이 툭하고 던진 한마디는 갑작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메일러 오챈과 잔카라스 데반, 정확히는 기존 적 세력과의 불화가 보고될 때마다 모두가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같은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머릿속 생각에만 그쳤을 뿐, 그걸 직접 입밖에 낸 것은 토어릭이 처음이었다.
그 말에, 누구도 말도 안 된다고 즉답하지는 않았다. 다만 긍정도 부정도 하지 못한 채, 입을 다물고 답을 미뤘다.
"가능하겠나? 이미 한번 배신한 놈 아닌가."
할렌의 말은 모두의 머릿속에 맴돌던 바로 그것이었다.
메일러 오챈은 이미 한번 배신을 한 자다. 그런 자를 다시 끌어들인다는 것이 가능할까? 그리고 그렇게 끌어들인다. 한들, 전적이 있는 자를 과연 믿을 수 있을까?
"아주 불가능할 것 같지는 않소."
"음?"
시어문드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메일러 오챈은 일단 제쳐둡시다. 사람보다는 상황을 보자는 이야기요."
"그게 무슨 뜻인가?"
할렌은 아직 시어문드와 다소 서먹서먹했다. 그뿐만 아니라, 솔롬에서 온 대다수 군관들이 그러했다. 시어문드가 비교적 최근에 굴러들어온 돌인 데다, 성격도 특별히 사교적이지가 않아 토어릭을 비롯한 몇몇을 빼고는 그와 가까이 교류하는 이가 없었다.
그러나 가깝지 않다고 해도, 할렌은 시어문드의 능력을 인정하는 편이었다. 특히, 간혹 발휘하는 그의 꾀에는 옛날의 야스메티와 다르면서도 비슷한 느낌까지 받았다.
"메일러 오챈은 배신자지만, 당시 그의 상황은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봐도 좋을 거요."
"버림받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반쯤은 사실 아닌가."
아드리안의 빈정거림에 시어문드가 감정 없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에 아드리안도 다시 딴지를 걸지는 못하고 못마땅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시어문드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메일러 오챈과 그의 병사들에게 죽으라고 등을 떠민 것은 아니지만, 죽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알면서도 가라고 한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동기는 단순해, 거창한 뭔가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는 단지 죽기 싫어서 배신한 거요. 자신의 한목숨이든, 아니면 따르는 이들의 목숨까지 생각해서든 . 어쨌거나 명분은 확실했소."
"그래서?"
"그때의 상황과, 지금의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말이지. 메일러 오챈은 난처한 상황에 놓여있소. 그는 지금 위에서, 옆에서, 심지어 아래에서도 압박을 받고 있지. 점점 그가 설 곳이 없어지고 있는 거요. 일전의 일을 추궁하지 않겠다는 보장만 해준다면, 그가 이쪽으로 다시 넘어오지 말라는 법은 없소. 다만……"
"다만?"
토어릭은 시어문드가 자신의 의견에 동조하는 줄 알고 내심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런데 시어문드가 잘 말을 이어가다가 갑자기 말끝을 흐리니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조금…공교롭다는 생각이 드는군."
"적의 함정일 수도 있다는 말이로군."
"그렇네. 메일러 오챈이 어떤 자인지는 직접 보지 못해 알지 못하나, 적어도 들리는 얘기만 보면 바보는 아니야. 그런 그가, 적에게 성과 병사들을 통째로 바치면서 항복을 했다면 그 후의 처신에도 신경을 쓰지 않을 리 없어."
"하지만, 조금 전 자네 입으로 그가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고 하지 않았나."
"드러난 것만 보면 그렇지.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도록 조심을 하는 게 처신 아닌가."
"어쩔 수 없었던 것이 아닐까? 자네 말처럼,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게지."
"물론 그럴 수도 있네. 그러나 신중해야 할 일 아닌가. 만에 하나 이것이 함정이라면, 그때는 그냥 곤란한 정도로는 끝나지 않을 테니까."
군터는 가만히 그들의 대화를 들었다. 토어릭이 문을 열고, 시어문드와 할렌이 의견을 보태자 그 후로는 모두가 한 마디씩 더하기 시작했다. 군터가 듣기에는 그들의 말이 모두 일리가 있었다. 언제나 그랬듯, 가능성의 문제고 확률의 문제였다.
메일러 오챈의 현 상황이 함정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함정이라면 그에게 접촉하는 것은 위험을 자초하는 꼴이 될 것이다. 하지만 함정이 아니라면, 메일러 오챈을 끌어들임으로써 현 전황을 통째로 흔들어놓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의심을 드러낸 시어문드도 자신의 의심에 확신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하긴, 확신을 가진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다.
수하들의 토론 아닌 토론이 줄기차게 이어졌으나 결론은 나지 않았다. 애초 결론을 내릴 수 있는 문제이기는 했을까?
"너희가 말한 것처럼…신중해야 할 일이니, 더 지켜보도록 하지."
메일러 오챈이 고립되고 있다고는 하지만, 아직 막다른 곳까지 몰린 것은 아닐 것이다. 신중을 기하는 것도 기하는 것이지만, 상황이 조금 더 무르익기를 기다려도 나쁘지 않으리라.
군터가 그리 결정을 내리자 그것으로 이야기는 끝났다. 토어릭은 첩자에게 메일러 오챈의 동향을 더 주의 깊게 살피도록 하겠다고 했고, 군터는 그를 허락했다.
***
"후우."
메일러 오챈은 긴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부여잡았다. 그의 시선이 어둠에 반쯤 먹힌 막사 안에서 위태롭게 흔들리는 촛불에 머물렀다.
'정말…힘들군.'
살기로 마음먹었을 때부터 어려움이 뒤따를 거란 걸 예상했었다. 그러나 각오를 했음에도 몸과 마음이 이렇게나 피폐해졌다. 더 큰 문제는, 이게 끝이 아니라는 점이다. 상황은 앞으로도 점점 더 나빠졌으면 나빠졌지, 좋아질 리는 없었다.
'가시밭길도 이런 가시밭길이 없어.'
영문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저들의 눈에 불평불만만 늘어놓는 겁쟁이들로 보이겠지.'
자신 하나만 모욕당하고, 괄시받는 것이라면 얼마든지 참을 수 있다. 처음부터 그만한 각오도 없이 백기를 든 것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문제는 수하들, 특히 병사들이다. 작을 때는 별 것 아닌 것 같아도, 그들의 불만이 쌓이고 또 쌓이면 그때는 누구라고 해도 쉽게 그들의 분노를 잠재울 수 없다.
그리고 메일러 오챈이 거느린 병사들은, 이미 참을 만큼 참았다. 메일러 오챈은 차마 그의 병사들에게 더 참으라고 할 수가 없었다. 참으라고 한들 그들이 말을 들을지도 의문이지만,
'위험해.'
이곳 장수들의 원한이나 괄시를 사는 것보다 더 두려운 것은 병사들의 마음을 잃는 것이다. 그를 따르는 수천 병사야말로 메일러 오챈이 자리를 보전할 수 있는 유일한 이유였다. 그들의 지지가 없다면, 그는 이곳에서 언제 사라져도 상관없는 존재가 되어버린다.
메일러 오챈은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병사들의 마음을 잃지 않기 위해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 직접 초라한 막사 앞을 지나며 그들을 위로하고, 때때로 그들과 함께 땅바닥에 앉아 식사하기도 했다. 전투가 끝나면 집으로 돌아가 가족들을 볼 수 있을 거라는 등의, 입에 발린 소리를 해대면서 말이다.
그러나 그렇게 달래는 것도 이제는 한계였다. 병사들은 그들의 고향이 짓밟히고, 불타고 있음을 알고 있다. 당장 들고 일어나지 않는 것은 주변의 더 많은 병사들이 두려워서지, 마음 속의 불이 꺼져서가 아니다.
'이 상황에 군심을 잃으면 끝장이다.'
아예 처음부터 자존심이고 뭐고 다 버리고 잔카라스 데반의 하수인 노릇을 했으면 모를까, 거느린 병사들의 대변인 노릇을 하며 나름대로 존재감을 피력해온 그다. 그런데 이제 와 거느린 병사들이 등을 돌린다면…
'무슨 수라도 써야 한다. 무슨 수라도.'
하지만 뭔가 수를 떠올리려 해도 전혀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마치 머릿속에 짙은 안개가 낀 것 같았다.
"장군."
"누구냐."
메일러 오챈은 반사적으로 옆에 풀어둔 칼에 손을 가져갔다.
낯설었다. 막사 밖에 세워둔 보초병이나, 이 시간에 그를 찾아올 만한 수하들의 목소리가 아니었다는 뜻이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칼을 뽑아 든 채로 막사 입구를 노려보았다. 어둑한 형체가 천천히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손에 짧은 칼을 들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병기는 아니었다.
"암살자인가?"
"아닙니다. 그저 모시는 분의 말씀을 전하러 왔을 뿐입니다."
"누구의 말을?"
"크렘보르 장군. 그분께서 장군께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뭐?"
메일러 오챈은 군터 크렘보르의 첩자가 군중 한복판까지 숨어들었다는 사실보다는, 그가 보낸 자가 자신을 찾아온 이유에 대해 궁금해졌다. 물론 저 말이 거짓일 수도 있지만, 그럴 가능성은 일단 배제했다.
'날 암살하려고 했다면 더 은밀하게 처리할 수 있었겠지.
상대는 막사의 입구로 들어왔다. 그렇다는 말은, 입구를 지키던 보초병을 어떤 식으로는 제압했다는 뜻. 그러나 메일러 오챈은 아무런 소리도 듣지 못했고, 기척을 느끼지도 못했다. 그것만 봐도 상대의 솜씨는 보통이 아니었다. 만약 그가 암살자였다면, 그 솜씨를 발휘해서 보다 효과적인 방법으로 자신을 노릴 수 있었으리라. 굳이 암살 대상의 앞에 나타나 거짓을 입에 담을 필요도 없었을 테고,
"요즘 장군의 처지가 상당히 궁한 것으로 압니다."
"헛소리."
"뭐라고 말씀하셔도 좋습니다. 아무튼…크렘보르 장군께서는 그리 생각하고 계시고, 장군께 곤궁한 처지를 탈출할 기회를 주고자 하십니다."
"투항하라는 말인가?"
"예. 그것만이 장군께서 자리와 목숨을 보전할 수 있는 길입니다."
"난 이미 한번 항장이 된 적이 있다."
"한번이 어렵지, 두 번이 어렵습니까? 크렘보르 장군께서는 과거의 일을 불문에 부치겠다 하셨습니다. 아시다시피, 이쪽도 상황이 썩 좋은 것은 아니라서 말이지요."
메일러 오챈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