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7화
전투는 지지부진하게 흘러갔다.
첫 전투 이후로도 몇 차례의 공격이 더 있었다. 첫 전투만큼 대대적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성벽을 넘어보겠다는 의지가 드러나는 공세였다. 하지만 그 몇 차례의 공격을 막아내자 적의 기세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그에 따라 아군의 기세는 반대로 높게 치솟았지만, 군터는 전혀 기쁘지 않았다. 이 일련의 과정에서 석연치 않은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앞뒤 분간 못하는 얼간이 같지는 않았는데.'
군터는 첫날 보았던 적장을 떠올렸다. 혹시 잘못 봤던 것이 아닌가 자문해보았으나, 그는 곧 그 물음을 부정했다. 잘못 봤을 리가 없다. 이곳에 오기 전에 보였던 모습이나, 대장인 주제에 혼자 툭 튀어나와서 도발을 해오던 것이나, 얼간이였다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노림수가 있는 거겠지.'
그게 뭘까 생각해보니, 떠오르는 것이 몇 개 정도 있었다. 그러나 군터는 그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적에 대해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아군의 사정을 살피는 것이 우선이었다.
몇 번의 전투에서 승리하여 기세가 오르긴 했지만, 그게 오래가지는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전투에서 승리했다고 해도 적은 여전히 도시를 포위한 채 끝도 보이지 않는 머릿수를 자랑하고 있었다. 게다가, 말이 승리일 뿐이지 피는 양쪽 모두 적잖이 흘렸다. 아까까지만 해도 어깨를 맞대고 싸웠던 동료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시체가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한 이들에게, 적이 입은 피해가 더 크니 어쩌니 하는 것은 위안이 되지 않는다.
병사들은, 아니 키파는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저 밖에 있는 적도 지치기는 마찬가지겠지만 그 정도는 갇혀 있는 상태에서 매일 피 냄새를 맡는 이들에 비하면 훨씬 나을 것이다.
"간밤에 탈영한 놈들이 있었습니다."
굳이 간밤이라는 말을 앞에 달 필요도 없다. 첫 전투가 있었던 후로 탈영병은 매일 나오고 있었으니까. 병사들만이 아니다. 심지어 하급이지만 장교들도 야음을 틈타 성벽을 내려가고 있었다. 발각당한 자들은 모두 공개적으로 목을 치고 있지만, 그래도 탈영을 막을 수는 없었다.
"안에서 부추기는 놈들이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합리적인 의심이었다. 적이 포위를 굳히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 기간이 그리 길지 않았다. 전투도 고작 몇 차례가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도 이렇게 꾸준히 탈영자가 나온다는 것은, 아무리 군기가 해이하다고 해도 이상한 일이었다.
할렌은 첩자를 잡아 사지를 찢어 죽이겠노라고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하지만 그 전부터 그렇게 속아내고 또 솎아냈음에도 찾아내지 못했다면 이제 와 눈에 불을 켠다고 해도 성과를 얻기는 힘들 터였다.
그리 생각한 군터는 할렌을 진정시켰다. 그리고 아무 말도 없이, 토어릭의 옆에 서 있던 사내에게 시선을 돌렸다.
"어찌 생각하나."
사내, 시어문드는 군터의 부름에 고개를 들었다.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단단한 둥지에 틀어박힌 상대를 밖에서 공격하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실제로 적은 몇 차례 시도했으나, 실패했지요. 이제는 방법을 바꿨다고 봐야 할 겁니다. 현명하지요."
"적의 칭찬은 그쯤 하면 됐다. 우리가 어찌 대응해야 하겠나."
"적은 우리를 안에서부터 흔들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의 사정상 그것을 막기는 어려우니, 그렇다면 차라리 막기보다는 이용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용한다?"
"투항병 무리에 첩자를 심자는 말입니까?"
시어문드의 말을 가장 먼저 이해한 것은 그의 바로 옆에 서 있던 토어릭이었다.
"바로 그렇습니다."
"효과가 있겠나?"
그럴듯했다. 그러나 의문이었다. 그렇게 첩자를 적진에 심는다고 해도 그 수가 얼마나 되겠나. 또한, 투항병인 만큼 감시도 철저히 받을 터인데 그런 와중에 그들이 무슨 대단한 일을 할 수 있을까.
"당장 무언가를 기대하기는 힘들겠지요. 그러나…이 싸움은 길게 봐야 하는 싸움이 아닙니까."
"당장 무언가를 바라는 것은 욕심입니다. 멀리 내다보고, 최대한 변수가 될 수 있는 요소를 만드는 데 주력해야 합니다. 소관이 생각하기에는, 그것이 현재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 아닐까 싶습니다."
시어문드가 거기까지 말했을 때, 군터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
"텔비더밋으로 갔던 병력이 돌아왔어. 짭짤하게 재미 좀 봤다던데."
"젠장! 부럽구만! 나도 어떻게든 거기 끼었어야 했는데."
주변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지만, 병사는 묵묵히 무기 손질에 열중했다. 그러나 그가 칼날을 가는 와중에도 소란스러운 병사들의 이야기는 계속됐다.
"그런데 말이야……오늘 내가 지휘부 막사 근처에서 경비를 서지 않았나?"
"그랬나? 뭐, 그렇다 치고, 왜?"
"막사 쪽에서 고함이 들리더라고. 난 제법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 내 귀에도 선명하게 들릴 정도로 큰 소리였어."
"…뭐, 높으신 분들끼리 의견 충돌이라도 있으셨나 보지."
"그래. 그랬나 봐. 고함이 들리고 얼마 안 있다가 메일러 오챈 장군이 얼굴이 완전히 빨개져서 뛰쳐나오더라고.
"하! 또 그 양반인가?"
"그 양반이라니? 이 사람, 말조심하게."
언성을 높였던 사내의 목소리가 조금 더 커졌다. 커졌을 뿐만 아니라, 한층 더 거칠어지기까지 했다. 보지 않아도 씩씩대고 있음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아니. 내가 못할 말을 했나? 그 양반은 항장이면 항장답게 적당히 찌그러져 있을 것이지, 왜 사사건건 소란을 일으키냔 말이야. 내 말이 틀린가?"
"뭐…그렇기는 하지만, 어쨌거나 그 양반은 이쪽 지역 출신이잖나. 휘하에 병사들도 죄다 이 부근 출신이고, 이번에 그…텔비더밋도 그런 거였겠지."
"그래도 그렇지. 그 양반 출신이야 뭐가 됐든, 어쨌거나 이제는 우리 쪽에 붙은 거 아닌가? 그럼 그에 맞춰서 처신해야 하지 않겠냐, 이거야 내 말은."
"모르겠고, 아무튼 목소리나 좀 낮추게. 자네가 말한 것처럼, 처신을 잘해야 하지 않겠나? 지금 자네의 그 시끄러운 목소리가 메일러 오챈 장군이나 그 휘하의 귀에라도 들어가 보게. 자네 목은 바로 이거야, 이거. "
그 뒤로는 잘 들리지 않았다. 그들의 작아진 목소리가 점점 희미해지다가 종국에는 완전히 들리지 않게 될 때까지, 병사는 묵묵히 칼 손질에 전념했다.
그러나 칼날을 가는 내내, 그의 시선은 칼에 가 있지 않았다.
***
"장군. 장군이 내게 섭섭한 마음을 갖는 것은 충분히 이해하오. 아마 나라도 그랬겠지. 그러나 동시에, 그대는 나를 이해하고 있을 거요."
"소장이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잔카라스 데반은 그를 바라보지도 않은 채 묵묵히 앞만 보며 답하는 메일러 오챈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한동안 그가 눈길을 주었음에도 메일러 오챈의 시선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나직이 한숨을 쉰 잔카라스 데반이 손으로 이마를 쓸었다.
"사람의 마음은 갈대와 같소. 바람이 부는 대로 흔들리고, 때로는 바람도 불지 않았는데 저 혼자 휘기도 하지. 연약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고, 종잡을 수조차 없소."
"전투가 시작된 이후로, 병사들의 사기는 계속해서 떨어지고 있소. 당연한 일이지. 대승을 거두지도 못했고, 저 성벽을 제대로 넘어선 적도 없었으니까. 눈에 보이는 성과도 없이 찬바람을 맞고 있으니 어찌 사기가 유지되겠소."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병사들에게는 그들의 불만과 욕구를 해소할 수 있는 수단이 필요하오. 그러니 전쟁이, 전투가 길어질수록 군대의 약탈이 빈번해지는 것도…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소."
"예. 당연한 일입니다. 허나 이 땅에서 나고 자란 소장이, 그리고 병사들이 불타는 고향과 핍박받는 고향 사람들을 보면서 마음이 아픈 것 역시 당연한 일이지요."
"장군. 소장을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억지로 이해시키려 하실 필요도 없습니다. 장군께서 아무리 노력하신들, 아마 효과를 보기는 어려울 테니까요. 장군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 워낙 종잡을 수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솔직하게라도 말해주니 내 마음이 한결 놓이는군."
"심려하시는 부분을 다 덜어드리지 못해 송구할 뿐입니다."
메일러 오챈은 공손히 군례를 취한 후 잔카라스 데반의 막사를 나섰다.
그런데 그가 막사를 나오자마자, 몇 명의 사내들이 그의 앞을 막아섰다. 아니, 막아섰다기보다는 마주쳤다는 표현이 옳으리라. 그들이 막사 안으로 들어가려던 순간 메일러 오챈이 막사를 나서면서 모양새가 이상하게 됐을 뿐.
"장군과 독대하셨소?"
"그렇소. 장군께서 이 사람을 찾으시기에."
"흐음. 장군께서는 너무 상냥하시군, 불평불만만 일삼는 종자는 그저 찍어누르시면 될 것을."
선두의 사내가 대놓고 시비를 걸어왔으나, 메일러 오챈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가볍게 고개를 숙인 후 그를 지나칠 뿐이었다.
그런데, 그가 몇 걸음 떼기도 전에 그의 등 뒤로 나직한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행실을 조심하시오. 좀스럽게 굴고 싶지는 않지만, 그대의 처지를 다시 한번 떠올려보는 것도 좋겠지. 이는 선의에서 해주는 충고외다."
"…충고 고맙소. 새겨듣도록 하지."
***
"적진에 작은 불화가 있는 모양입니다."
"무슨 뜻이지?"
조금 전, 첩자가 날린 전서구가 토어릭의 팔뚝에 내려앉았다. 토어릭은 전서를 확인하자마자 군터를 찾았고, 전서와 함께 그 내용을 그대로 전해주었다.
"아시다시피, 잔카라스 데반은 이곳에 오기 전 상당한 시간을 소비하여 그의 군대를 불렸습니다. 그게 목적은 아니었겠지만, 어쨌거나 그렇게 됐지요. 그러니 지금 그의 군대를 이루고 있는 2할, 아니 3할 정도는 본래 그가 이끌던 병사들이 아닙니다."
"약탈이 문제였나?"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겁니다. 7만이나 되는 대군을 이끌고 와서 이 도시 하나 어쩌지 못하고 시간만 죽이고 있지 않습니까. 비록 인근 지역을 차례로 점령하면서 놀고 있지는 않다는 것을 보여주었지만, 병사들의 눈에는 크게 차지 않았을 겁니다. 어쨌거나 키파의 성벽은 여전히 굳건하고, 우리의 깃발 역시 꺾이지 않은 채 멀쩡하게 휘날리고 있으니 말입니다."
"메일러 오챈?"
메일러 오챈이라는 이름은 군터의 기억에도 선명히 남아있었다. 별로 좋은 기억은 아니었다. 성과 병사를 통째로 잔카라스 데반에게 가져다 바친, 이쪽 입장에서는 비열한 배신자였으니까 말이다.
"예. 그가 잔뜩 화가 나서 지휘부 막사를 뛰쳐나오는 광경을 여러 병사가 목격했다는군요. 그 후로도 이런저런 소란이 있었던 모양이고요."
"뜻밖이군."
"그 자신도 못마땅했겠지만, 그보다는 그의 수하들이나… 같은 처지인 자들의 불만을 조금이라도 풀어주고자 대표로 움직였다고 봐야 할 겁니다."
"같은 처지라."
"잔카라스 데반은 투항한 자들에게 관대하게 대했습니다. 효과는 나쁘지 않았지요. 그러나 여기까지 오면 더 이상 그의 의사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적이 분열하고 있다는 건가. 우리에게는 좋은 소식이군."
"예, 저쪽도 우리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그 이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