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6화
"제가 아직 살아있는지 확인하려고 오신 겁니까?"
"그것도 있고, 지금 막 소식이 도착해서 말이네."
"소식?"
"자네 부친에 관한 소식이 도착해서 말이네."
"대군?"
보리스의 표정이 굳었다. 부친에 대한 믿음은 확고하지만, 이미 도시가 포위를 당했다고 하면 믿음 과는 별개로 걱정이 될 수밖에 없다.
"적의 군세는 대략 7만. 그에 맞서 키파에 주둔중인 병력은 3만정도."
"작정했군요. 7만이라니....."
상상하기 힘든 숫자다. 그만한 대병력을 한 곳에 집어넣다니, 적이 키파를 반드시 손에 넣어야 할 요충지로 보고 있다는 방증이었다.
"키파는 아록과 리바스트라를 잇는 길목이야. 그곳을 잃는다면 두 주가 적에 맞서는 것이 더욱 괴로워지겠지."
"호락호락한 분이 아닙니다. 적이 7만 이건 10만이건, 버티고자 마음먹었다면 어떻게든 버티실 분이지요."
"부친에 대한 믿음이 굳건하군. 물론 나 또한 자네의 말이 맞기를 바라네."
그렇게 말하면서도, 프란시스 티브리악의 마음은 반반이었다. 그는 솔직히, 군터 크렘보르가 7만 대군을 상대로 버틸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는 7만이라는 적의 수가 사실 여기저기서 뒤늦게 합류한, 혹은 긁어 모은 잡병들까지 합친 수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키파의 병력 역시 마찬가지 아니겠나.
'하지만.....'
그는 군터 크렘보르를 바크렌에서 직접 본 적이 있었다.
부친과 함께인 자리였기에 따로 이야기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그때의 그 강렬한 인상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났다.
'그 위명은 귀가 따갑도록 들었지.'
인상도 인상이지만, 들려오는 이야기들도 하나같이 대단했다. 그의 부친도 대단한 자라며 칭찬과 경계의 말을 아끼지 않았었고.
그리고 이곳에 와 보리스 크렙보르를 만난 후, 프란시스 티브리악은 군터 크렘보르에 대한 평가를 상향 조정했다.
자식을 보면 부모를 알 수 있다는 말이 있듯, 이런 아들을 둔 자라면 안 봐도 뻔하지 않겠나.
"보고드립니다! 쥬드 포트락이 하타넬로 진군했습니다!"
막사 밖에서 들려온 다급한 목소리에 안 그래도 무거워져 있던 분위기가 더 가라앉았다.
"...빠르군."
잠깐 입을 다물었던 프란시스 티브리악이 쓴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너무 빨라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을 정도야."
"그것이 적이 노리는 바겠지요."
정신없을 만큼 빠르지만, 그러면서 조금의 실수도 없다. 직접 상대하는 것도 아니고, 멀리서 간접적으로 느끼고 있을 뿐이지만 그럼에도 숨이 턱턱 막혔다.
그렇다면 저 북쪽에서 그를 직접 상대하고 있을 아군은 얼마나 힘겨워하고 있을까.
"나는 본래 세간에 도는 이야기들... 그러니까 소문 같은 것을 믿지 않았네. 아무리 이름 높은 인물이라고 할지라도 어느 정도는 과장되었으리라 생각했지.
하지만 이곳에 와 쥬드 포트락을 보면서 그런 내 생각이 잘못됐음을 알았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분명 같은 땅에서 같은 전쟁을 치르고 있건만, 어찌 이리도 멀어 보이는 것일까. 직접 대면한 적도 없이, 멀리서 들려오기만 하는 이름이 어찌이리도 가슴을 무겁게 짓누를 수 있는 것일까.
쥬드 포트락의 군대와 그에 맞서는 아군. 그들이 벌이고 있는 싸움에 비하면, 이곳에서의 싸움은 작다 못해 하찮게까지 느껴졌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쥬드포트락이 날뛰고 있는 북쪽으로 향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티브리악의 후계자라는 그의 신분 때문이었다.
비록 본가에 그의 자리를 대신할 수 있는 형제들이 있다고는 하지만, 그렇다 해도 그는 엄염한 가문의 후계자였다.
그런 그가 전장에 온 것만으로도 티브리악은 큰 대가를 치른 것이었다.
테리브란의 조정과 황자도 이 이상은 티브리악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내가 간다고 자청해도... 허락하지 않겠지.'
공명심이야 충만하지만, 그 공명심 때문에 되지도 않는 억지를 부리곡 싶은 마음은 없었다.
더군다나 그 억지가 가문에 조금이라도 부담을 안기는 것이라면 더더욱.
'자네도 나와 같은 마음이겠지.'
그는 힐끗 보리스를 보았다. 크렘보르의 독자이자 후계자인 그 역시 여러모로 생각이 많아 보였다.
속내를 들여다볼 수는 없지만, 아마 지금 당장이라도 어려움을 겪고있을 부친을 도우러 가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을 터였다. 혹 그게 아니라면... 부친이 비극을 맞이할 결우를 떠올리고 있을지도 모르지.
'그런 자로는 보이지 않지만.'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이런저런 일들을 함께 겪었다. 그렇기에 보리스 크렘보르라는 사내에대해서 어느정도 파악했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혹시 또 모르는 일이다.
인간의 마음이라는 것은 형태가 정해져 있지 않아, 상황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기 마련이다.
후계자인 데다가 독자가 아닌가. 자신의 시대가 오기를 바라는 야심이 부친에 대한 마음보다 더 클 수도 있는 것이다.
"장군."
"음?"
"제가 키파로 갈 방도가 있겠습니까?"
프란시스 티브리악은 그런말을하는 보리스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혹시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는가 싶어 그 눈을 주의 깊게 살폈으나 단호한 눈빛에 흔들림은 보이지 않았다.
'내눈도 믿을것이 못 되는군. 아니, 눈보다는 마음이 문제인가.'
웃음이 나오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귀족으로서 나고 자란 이상, 의심이 일상이 되는 것은 지극히도 당연한 일이다.
특히 가문의, 그것도 티브리악이라는 대 가문의 후계자인 그는 눈에 보이는 모든것을 의심하도록 배웠으며,
배운 그대로 살았다.
'그러고 보니, 크렘보르 가문은 신생 가문이었지.'
현 가중인 군턴 크렘보르가 황자에게 공을 인정받아 귀족의 이름을 하사받았다고 들었다.
그게 정확히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그렇다면 아마도 보리스 크렘보르는 귀족으로서 나고 자라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가능할까요?"
보리스가 재차 물었다. 그러자 상념에 잠겨있던 프란시스 티브리악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려운 걸세. 자네는 크렘보르 가문의 후계자야. 게다가 독자이기도 하지.
이런 말 하기는 뭐하지만, 자네에게 무슨일이라도 생긴다면 크렘보르 가문의 대가 끊긴단 말이네."
"어차피 총력전이 아닙니까. 이 전쟁에서 패한다면 크렘보르 가문이 이름을 이어갈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하지만 자네와 생각이 다른 자들도 많아."
"안일한 작자들이군요."
"글쎄. 꼭 그렇게만 볼 수고 없네. 역사적으로 봐도 전쟁의 결과가 어찌 나든, 귀족의 명맥이 끊긴 경우는 드물어.
나라 간의 전면전일 경우에도 주축이라 할 수 있는 몇몇 대귀족들만이 피를 보았을 뿐, 고만고만한 귀족들은 대부분 이름을 이어갈 수 있었지."
"장군꼐서도 그들과 같은 생각입니까?"
약간은 불퉁한 보리스의 물음에 프란시스 티브리악이 피식 웃었다.
"내 입으로 이런 말을 하기 조금 부끄럽네만, 티브리악의 이름은 작지 않네. 세간에서는 대귀족이라 불리고 있기도해.
이 전쟁에서 우리가 진다면, 바라눔 트라소프는 티브리악이라는 이름을 지워버리겠지."
"으음. 제가 괜한 것을 여쭈었군요."
"아니 괜찮네. 아무튼, 나와 내 가문이 어중간한 각오로 이 전쟁에 임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줬으면 좋겠군."
"예. 잘 알겠습니다."
보리스의 목소리가 조금 가벼워졌다.
하지만 얼굴은 여전히 굳은 채였다.
"부친을 염려하는 마은은 이해하지만, 조금은 냉정해질 필요가 있네."
"냉정이요?"
"그래. 지금 자네 휘하 병력이 얼마나 되나?"
"...천 오백입니다. 아니, 이제 조금 더 줄어들었으니 천 삼백쯤 되겠군요."
"그 정도 병력을 가지고 키파로 간다 한들, 머가 달라지겠나?"
"없는 것 보다는 낫겠지요."
"지금 자네가 억지를 부리고 있다는 것. 자네도 알고 있을 테지?"
"....."
보리스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잠시 후,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 모르겠습니까. 걱정되고 답답한 마음이 지나쳐, 그만 못난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해하네. 허나 자네가 어떻게든 부친을 돕고자 싶다면, 방도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야."
"무슨 말씀이신지."
"간단하게 생각해보게. 지금 우리가 이곳에 발이 묶여 있는 이유가 뭔가."
"그야... 적을 상대하기 위함이지요."
"정확히는, 노튼 기슬라이와 그의 군대 때문이지."
노튼 기슬라이. 그들이 이곳에서 상대하고 있는, 1만 3천여 군대를 거느린 적장의 이름이다. 보리스는 프란시스 티브리악이 새삼스레 그의 이름을 꺼낸 것이 의아했으나, 곧 그가 말하려는 게 무엇인지 짐작하고는 쓰게 웃었다.
"설마, 노톤 기슬라이를 물리치고 나면 키파로 지원을 갈 수 있을 거라는 겁니까."
"안되나?"
보리스는 상대가 자신을 놀리고 있는 것인가 싶어 불퀘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프란시스 티브리악이 어느 보다 진지한 얼굴로, 자신을 응시하고 있음을 알아차리고는 태토를 바꿨다.
"뭔가 묘책이라도 있습니까?"
"묘책은 아닐세. 하지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있지."
"그게 뭡니까?"
"말해주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이 계획에는 문제가 잇네."
"문제라면?"
"
위험부담이 커."
"전장에서 안전을 찾는 것은 우스운 일입니다."
"알고 있네. 알면서도 이리 말하는 것이야. 의미를 알겠나?"
심각하게 말하는 프란시스 티브리악.
그제야 보리스는 그가 말하기를 주저한 이유를 깨달았다.
그러나 이유를 알아차렸음에도, 그는 입가의 웃음기를 지우지 않았다.
"목을 걸어야겠군요. 아마도, 그건 제 목이겠지요?"
"자네는 거부할 수 있네. 아무리 내가 자네의 상관이라도, 자네에게 위험을 강요할 수는 없어.
자네는 크렘보르의 후계자로서 내 부탁을 거절할 수 있고, 어쩌면 거절하는 게 당연하네."
다연하다 뿐일까. 프란시스 티브리악은 보리스가 이야기를 들은 후 자신에게 욕지거리를 뱉는다고 해도 이해할 수 있었다.
"일단 이야기부터 해주시지요. 그래야 제가 승낙을 하든 거부를 하든 하지 않겠습니까."
프란시스 티브리악은 조금 망설이다가 곧 마음을 다잡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는 한번 이야기를 시작하자 언제 망설였냐는 듯 특유의 유려한 말솜씨로 그의 머릿속에 들어있는 계획을 모두 꺼내놓았다.
그의 이야기가 끝났을 때. 보리스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군요. 하겠습니다."
"내 이야기를 제대로 듣긴 한 건가?"
"제 귀는 멀쩡합니다."
"그런데도....."
"장군. 우리 모두,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음?"
"저는 장군처럼 머리를 쓸 줄 모릅니다. 하지만 반대로, 장군도 저처럼 싸우거나, 일선에서 병사들을 이끌지는 못하시지요. 각자의 재주가 다른 것입니다."
"...그렇지."
"그러니 너무 부담 갖지 마십시오. 이건 제가 할 수 있는 일이고, 해야만 하는 일입니다."
"자네 그런 의무감을 가질 필요는 없네."
"뭐라고 말씀하셔도 좋습니다. 어쨌든, 저는 이 일을 해치우고 키파로 달려 가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그러니 이 일을 맡는 것도 의무감 때문이 아니라 사사로운 마음 문인 게지요."
프란시스 티브리악은 옅게 웃는 보리스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곧 조용리 고개를 끄덕였다.
"쿨럭!"
노톤 기슬라이는 억지로 기침하며 꽉 막힌 속을 풀어내려 애썼다.
그러나 그런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돌덩이라도 들어 찬 것 같은 속은 조금도 편해지지 않았다. 힘겹게 고개를 숙인 그는 그제야 그의 가슴 한복판이 움푹 들어갔다는 것, 그리고 조금 전 억지로 토한 기침에 붉은 피가 섞여 있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이이!"
잔뜩 얼굴이 붉어진 그가 고개를 들었다. 저 앞에, 비틀거리면서 다가오는 형체가 보엿다.
그형체가 무엇인지, 아니 누구인지는 알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신나게 뒤쫓았던 대상이니까 모르는 게 이상했다.
"함정이었느냐."
"그랬지."
"날 길동무로 삼을 생각이었나?"
"아니."
형체가 가까워졌다. 그에 따라 그는 상대의 얼굴을 좀 더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얼굴에 피로가 잔뜩 끼어 있는 젊은 사내였다. 코와 한복판을 가로 짓는 혈선이 눈에 들어왔다.
피가 떨어지는 것으로 보아 상처를 입은지 얼마 되지 않는 것 같았다.
"어처구니없구. 내가... 이런 말도 안되는 수작에....."
"패장의 변명치고는 너무 초라하군."
"뭐라고 말해도 좋다."
노톤 기슬라이는 숨을 헐떡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애송이. 이름은?"
"보리스. 보리스 크렘보르."
"흐. 그럴 거라 생각했다. 모르는 이름은 아니라 다행이군."
대답 없이, 커다란 검이 움직였다. 희끄무레한 선. 그것이 노톤 기슬라이가 본 마지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