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터-725화 (725/1,064)

725화 문스

뚫으려는 쪽과 막으려는 쪽. 성벽을 사이에 두고, 그들은 치열하게 맞붙었다.

회색연기가 사라지고, 해자에서 기어 올라온 시체들도 다쓰러졌다. 그러나 수만 명이

토하는 열기는, 함성은 조금도 사그라지지 않았다. 그들은 언제까지고

싸울 수 있을 것처럼 끝도 없이 맞붙었다.

그러나 시작이있으면 끝이 있는 법이고, 인간의 몸과 마음이라는 것이 계속 강건할 수는 없었다.

해가 하늘 높이 떠 있을 때 시작됐던 전투는 그 해가 뉘였뉘엿 저물어 갈 때 까지 이어졌다. 그동안 수만의 대군이

성문과 성벽을 계속해서 두들겼으나 큰 성과는 얻지 못했다.

계속해서 사다리를 걸친 끝에 결국 성벽에 오르는 데 성공하고, 그 위에서

얼마간 전투도 벌였으나 그게 전부였다.

잔카라스 데반은 선선히 오늘의, 첫 전투의 실패를 인정하고 받아들였다.

그는 아직 더 싸울 수 있다고 열변을 토하는 수하 무관들을 무시한 채 군사들을 불러들일 것을 명했다.

잠시 후. 퇴각을 명하는 전고 소리가 전장에 울려 퍼졌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키파의 병사들은 승리의 환호를, 물러나는 잔카라스 데반의 병사들은 어두운 안색으로 부리나케 도망쳤다.

"장군! 저 싸울 수 있었습니다!"

잔카라스 데반은 병사들과는 달리 평온한 안색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의 수하들이 막사에 돌아온 뒤에도 여전히 헛소리를 늘어놓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랬겠지. 명령을 내리면 병사들이야 따랐을 테니까. 하지만 그게 무슨 의미가 있지?"

"예?"

더 싸울 수 있었다느니 어쩌느니 떠들어 대던 자는 말의 내용보다도, 전에 없이 싸늘한 잔카라스 데반의 목소리에 당화하여 순간 말을 더듬었다.

"그대로 좁은 통로에 계속 병사들을 밀어 넣어봐야 시체만 더 쌓였겠지. 설마 자네가 바란 게 그건가? 5천 명쯤.

아니, 1만 명쯤 더 죽어 나가기를 바랐나?"

"어, 어찌 소관이 그런....."

"꽉 막힌 전투였네. 머릿수로 밀어붙여서 이겨내야 하는 전투도 있지만, 조금 전은 그런 경우가 아니었어. 설령 끝끝내 도시를 함락시켰더라고,

6만 5천 대군은 거의 궤멸한 뒤였겠지."

"....."

흥분이 감돌았던 막사 안이 한순간에 조용해졌다.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하지 않겠나. 적은 강하다. 적어도 우리가 예상했던 것보다는 강해.

키파는 처음 생각했던 것처럼 손쉽게 떨어뜨릴 수 있는 도시가 아니다.

그러니 우리도 생각을 다르게 해야겠지."

"그렇다면 장군의 생각은....."

메일러 오챈이었다. 적절한 때에 입을 열어준 그를 보며 잔카라스 데반은 '역시'라고 생각했다.

항장 출신이라서 그런가 눈치도 눈치지만 행동이 재빠르다.

"포위를 굳힌다. 당분간 직접 공격은 삼가고, 키파 주변의 성과 마을들을 복속시킬 것이다."

"고립시키겠다는 말씀이군요."

"바로 그렇소. 뾰족한 수가 나오기 전 까지는 교전을 삼가고 상황을 지켜보려는 것도 있지만... 정 마땅한 수가 없을 때는 장기전을 염두해 둬야겠지."

정석이다. 그러나 잔카라스 데반의 결정은 다소 이른 감이 있었다.

적어도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이르다. 누군가는 섣부르다고 여겼고, 누군가는 결단력이 있다고 여겼다.

후자는 메일러 오챈이었고, 전자는 메일러 오챈을 제외한 전부였다.

불만이 생길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어쩔 것인가. 지휘권은 잔카라스 데반에게 있었고, 그들은 그의 명령을 받들어야 하는 입장인 것을.

"장군의 명을 따르겠습니다."

다소 가라앉은 목소리로 불만을 드러내는 것 외에,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쓴맛을 단단히 보았으니, 이제 놀들도 얼마간 잠잠해지겠군요."

"모르는 일이지. 저 대군을 가지고도 성벽 하나를 넘지 못했으니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을 수도 있어.

그럴 경우, 오늘 보다 더 거칠게 나올 수도 있네."

"그렇다면 놈들만 피를 보게 되겠지. 그렇지 않나?"

전체적으로는 분위기는 밝았다. 이쪽도 피해가 적은 것은 아니었지만, 어?거나 승리는 승리였으니.

술은 없었으나, 다들 술이 들어간 것 처럼 풀어져 있었다. 그것이 그들 나름대로 긴장과 피로를 푸는 방식이었다.

"장군. 그나저나 소문은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만... 그래도 놀랐습니다."

누군가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 혼자 그런 생각을 했다기보다는, 대표격으로 나선 것이라고 봐야 했다.

그가 입을 열자마자 일제히 입을 다물고, 양쪽의 눈치를 보기 시작한 이들이 다수인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소문. 내가 사령술을 쓴다는 소문 말인가?"

"...예."

"떳떳한 일은 아니지 않나. 금기니 뭐니 하면서 터부시되는 재주니까."

"그,그렇기는 하지만요. 하하하."

웃음으로 얼버무리기는 했지만, 분위기가 가라앉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군터는 그런 것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 태연히 말을 이었다.

"내가 꺼림칙한가?"

"그,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이해한다. 하지만 우습군. 자네들 중 아는 이들도 있고 모르는 이들도 있겠지만,

드러내지만 않을 뿐이지 여느 귀족 가문이라면 사령술사 한두 명쯤은 거느리고 있지 않나? 정적의 암습을 방비하기

위해서하고 말들은 하지만...뭐, 나는 잘 모르겠군. 내가 한 일은 드러내지 않고 하던 일을 겉으로 드러낸 것뿐이야."

"....."

"변명 따위는 하지 않는다. 내생각을 들려줬을뿐이니, 내가 못마땅 하거나 불만이 있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기탄 없이 이야기하도록."

탄없이 말하라고 하지만 누가 감히 그럴수 있겠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이들도 입을 꾹 다물고 눈만 뒤룩뒤룩 굴릴 뿐이었다.

할렌과 아드리안을 포함한, 솔롬에서 온 무관들이 눈에 불을 켜고 있으니 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사령술에 대한 거부감이이야 어쨌든 그 문에 오늘 전투에서 득을 본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직접 성벽 위에서 병사들을 지휘했었기에 다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저희야 장군의 말씀을 이해했습니다만, 병사들이 동요하고 있습니다.

지금 당장은 승리의 여운에 취해서, 혹은 긴장이 풀려서 그저 적당히 동요하는 수준에서 멎었지만... 시간이 지나면 어떻게 반응할지 모릅니다."

"이곳의 병력 중 상당수는 나와 함께 온 이들이지. 그들은 이미 나에 대해 알고 있다.

나를 알지 못하는 이들은 동요하겠으나, 그것도 그리 오래가지는 않을 것이야."

군터는 이 먼 서쪽 땅까지 오면서 어중이떠중이들을 데리고 오지 않았다.

로드니 캄브라이가 모은 병력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가 솔롬에서 데려온 병사들은 모두 정예였다.

또한 그에 대해서도 잘 아는 이들이었다. 군터는 그들이라면 주변의 서넛이 흔들린다고 해도 굳게 다잡을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그의 그런 확신이 틀리지 않았음은 며칠 만에 증명됐다

실전과 혹독한 훈련을 여러번 거친 솔롬의 병사들은 주변의 심약한, 혹은 의심 많은 동료들이 흔들리게 놔두지 않았다. 그들이 군터 크렘보르에 대해 갖는 복종심은 굳건 했고 절대적이었다.

"헛소리 마. 그 시체들 덕분에 지금 네놈 목이 멀쩡하게 붙어있는 거라는걸 모르나?"

"전투가 격화될 때도 저놈들이 해자 근처를 피해서 움직이는 거 못 봤어? 왜 그랬을 것 같나?"

"장군께서 사령술을 다룰 줄 아신다는 건 저 동쪽에서는 이미 유명한 이야기야. 심지어 테리브란의 전하꼐서도 알고 계시지. 그런데도 그분은 그렘보르 장군을 위장으로 삼으시고, 수만의 대군을 맡기셨다.

왜그랬을 것 같아? 응?"

일부는 자발적으로 나서서 군터를 변호했고, 일부는 도어릭을 비롯한 몇몇 이들의 언질을 받고서 적극적으로 혼란을 가라않히기 위해 노력했다.

무엇이 됐든, 병사들의 동요는 빠르게 가라앉았다.

물론 전투 도중에 나타났던, 아직 더 해자 속에 있을지도 모르는 시체들에 대해서는 여전히 두려움과 혐오를 느끼고 있었지만, 이들에게는 그것들이 일단은 '우리 편' 이라는것이 중요했다.

당장 그들의 목숨을 위협하는 것은 무서운 장군이 부리는 시체들이 아니라 저 멀리 진을 치고 있는 적들이었으니까.

잠잠하리라는 예상도, 더 적극적인 공세를 가해오리라는 예상도 모두 빗나갔다.적은 추가 공세 없이 포위를 굳혔다/

그러나 가만히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병력을 일부 뒤로 惠?인근 지역들을 점령하고 있습니다."

어렵게 소식을 전한 전령 덕분에 늦게나마 적의 동향을 파악할 수 있었다. 성벽 위에서 지켜보았으니 일부 병력이 빠져나갔다는 것은 알았어도,

그들이 무엇을 하는지는 몰랐었는데 이제야 그들이 어디로 움직였는지 알게 된 것이다.

"고사시키겠다는 생각인 것 같습니다."

"적장은 아무래도 이 싸움을 길게 보는 것 같군요. 우리 입장에서는 좋지 않게 됐습니다."

"글쎄. 내 생각은 다르네. 나쁠 것 없지 않은가? 어차피 도시 내의 물자는 충분해. 조정에서 우리에게 바란 것도 시간을 끌어주는 것이었으니, 적이 길게 본다면....."

"나쁘지는 않지. 하지만 생각해보게. 키파만 덩그러니 외딴 섬처럼 남고, 인근 지역이 모두 적의 손에 넘어간다면 우리가 버티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나."

"음?"

"방어선의 역활을 하지 못하게 되지 않냐, 이 말일세."

토어릭의 말에 할렌도 동의했다.

"일리 있는 말 같군. 그렇지 않습니까 장군?"

군터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적의 속내를 알았다고 해도 당장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지 않은가."

첫 교전에서 어느 정도 이득을 보았다고는 해도, 적의 병력은 여전히 이쪽의 2배이상이다. 게다가 포위도 굳건하니, 이쪽에서 먼저 치고 나가는 것은 손해를 자처하는 것일 뿐.

"적의 의도를 알았으나, 급하게 움직일 수는 없다. 그럴 필요도 없고. 적은 병력으로 더 많은 병력을 묶어두는 것만해도 충분하지 않은가."

군터는 그리 말했지만, 그를 잘 아는 심복들은 그 말이 진심이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군터 크렘보르는 욕심이 많지 않은 사내였지만 전장에서만은 예외였다.

그는 항상 승리를 갈망한다. 승리가 가까웠다고 생각되면 더 큰 승리를 갈망한다.

그는 전장에서만은 만족을 모르는 사내였다. 그런 사내인 줄을 뻔히 아는데, 저런 말을 어찌 믿으란 말인가.

그의 속내가 따로 있을 것을 짐작하는 이들은 따로 그의 진의를 물어보리라 생각하며 침묵을 지켰다.

"몸은 좀 어떤가?"

"거뜬합니다."

보리스는 붕대로 감싼 어깨를 움직여 보였다. 그의 태연한 얼굴에 프란시스 티브리악이 헛웃음을 지으며 자리에 앉았다.

"정말 튼튼한 몸이야. 배 이상의 적에게 포위당한 상태에서 스무 명을 베었다지?"

"정확히는 스물넷이었습니다. 그리고 배 이상이라고 해 봐야, 고작 이백 언저리였고요."

"그대가 이끈 병사는 백도 되지 않았지 않나."

"그건 그랬지요. 그보다...정보가 샌것 같습니다."

계속 이어지는 칭찬에 낯이 간지러웠던 보리스가 화제를 돌렸다.

그런 그의 시도는 꽤 성공적이었다. 웃음기가 감돌던 프란시스 티브리악의 얼굴이 단숨에 굳어졌다.

"그래. 그런 것 같아. 사실 조금 늦은 감이 있다고 생각하네."

"예상하셨습니까?"

"매일 밤 무수한 이들의 생사가 갈리는 곳 아닌가. 불안한 자들이 더 다급해지기 마련이지. 그러나 적이 자네를 노린것은 조금 뜻밖이었어. 자네의 활약이 그만큼 널리 알려졌다고 봐야 할까."

"좋은 일이로군요."

"긍정적이군."

"울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리고, 무인으로서 무명을 날렸다면 응당 기뻐해야 할 일이지요."

"하하. 자네의 그 호기에는 매번 감탄 할 수밖에 없구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