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3화
북쪽 성벽을 지키고 있던 할렌은 적이 공성추를 앞세워 공격해올 때도 그리 놀라지 않았다. 좀처럼 보기 힘든 일이기는 하지만, 병사를 앞세우든 공성 병기를 앞세우든 그건 지휘관의 재량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조금 의외였기는 해도, 놀랄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화살 비를 뚫고 성벽 가까이 접근한 적이 이상 행동을 보이기 시작했을 때는, 담담하던 할렌도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성벽에 가까이 붙었으면 할 일은 하나다. 사다리를 성벽에 걸고, 열심히 기어오르는 것이다. 그렇게 성벽 위 병사들의 주의를 분산시키면서, 동시에 공성 병기로 성문을 직접 공략하는 것. 그것이 공성의 정석이다. 공성 측도, 수성 측도 다 아는 뻔한 방법이지만 이것이 정석인 이유는 뻔해도 가장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할렌은 고생하면서 성벽 앞까지 다가온 적이 당연히 사다리를 걸고 본격적으로 ‘공성’을 시작할 줄 알았다.
그런데 그의 예상과는 달리, 성벽 앞까지 당도한 적은 이상한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무리를 나눠 뭉치기 시작하더니, 곧 커다란 방패로 정면과 위를 가리는 듯한 모습을 보인 것이다. 화살을 피하겠다는 의도가 노골적으로 드러났지만, 문제는 화살을 피하면서 뭘 하려는 것인가였다.
할렌은 즉시 돌과 화살을 퍼부을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방패로 쌓은 벽과 지붕은 제법 견고하여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하지만 큼직한 돌덩이가 하나씩 제대로 떨어질 때마다 진형이 출렁이는 것이, 오래 버티지는 못할 듯싶었다.
‘무슨 속셈이지?’
할렌이 찝찝한 기분을 지우지 못하고 더 강하게 공격할 것을 명령하려던 순간. 회색 연기가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화공?”
가장 먼저 든 생각이었으나 곧 그 생각은 머릿속에서 지웠다.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는 곳이 적들이 쌓은 방패벽 안쪽인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저렇게 뭉쳐서 불을 피운다고? 공격이 쏟아지는 것을 버티고 버텨서?
‘뭐지?’
경각심이 들었다. 뒷목이 뻣뻣하게 굳는 듯했다. 이제껏 전장에서 몇 번 이런 경험을 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정말로 안 좋은 일들이 벌어지곤 했고.
“허억…허억!”
바로 그때. 옆에 있던 병사의 거친 숨소리가 그의 신경을 자극했다. 열심히 방패를 들고 있거나, 활시위를 당기고 있으니 숨이 거칠어지는 것이야 당연한 일이었지만 그 병사는 정도가 심했다. 한참 동안을 전력으로 달리기라도 한 것처럼 숨을 헐떡이는데, 그 모습이 아무래도 정상으로 보이지 않았다.
‘설마…….’
어떤 한 가지를 의심한 순간. 할렌은 갑작스레 답답하게 느껴지는 가슴에 손을 가져갔다.
* * *
가장 간단하게 사람을 해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그런 것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가장 강력한 무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까지 설명했을 때, 눈치가 빠른 이들이라면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짐작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가장 강력한 무기가 존재했다면 인간의 역사와 함께 흘러온 전쟁의 역사에서 그것이 등장하지 않았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시대에 이르러 쓰이지 않고 있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럴듯한 추측이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가장 강력한 병기는 존재하며, 실제로 몇 번 정도 쓰이기도 했었다.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것까지 합치면 그 사례는 더욱 늘어날 것이다.
가장 강력한 무기. 그것은 바로 독이다. 칼처럼 무겁지도 않고, 다루기 어렵지도 않으며, 살상력은 칼과 비할 바가 아니니 어찌 이것을 가장 강력한 무기라고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처럼 강력하지만 쉽게 쓸 수가 없는 이유는, 이 무기의 살상력이 적과 아군을 가리지 않기 때문이다. 칼이야 날이 향하는 방향만 조절하면 되지만, 독은 그럴 수가 없는 것이다.
‘오랫동안 연구를 거듭해왔지만, 이렇다 할 진척이 없었지.’
독이 위력적이라는 것은 모두가 안다. 그래서 적의 식수원에 독을 풀거나 하는 식으로, 제한적으로나마 사용하곤 했다.
하지만 전쟁을 일으키는 자들은 그것에 만족할 수 없었다. 그들은 부족함을 느꼈다. 그들은 독이라는 위력적인 무기를 보다 효율적으로, 더 많이 사용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들은 독의 연구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의 지원은 오랜 세월이 흐른 후, 마침내 자그마한 과실을 맺었다.
‘군터 크렘보르. 그대는 아는가? 시대가 변하고 있다.’
전형적인 용장이라고 들었다. 사령술을 쓴다느니 어쩌니 하는 소문도 들었기에 속단할 수는 없지만, 처음 대면했을 때 느낀 인상은 전형적인 군인과 무인의 그것이었다.
그렇기에 궁금했다.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분노할까? 당황할까? 그도 아니면, 전혀 예상치 못했던 반응을 보일지도 모른다.
‘부끄럽지 않다.’
독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이들이, 심지어 아군 측에서도 적지 않았다. 위험성 때문이 아니라, 독이라는 것 자체에 부정적인 인식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잔카라스 데반은 그런 이들과 생각이 달랐다.
전쟁을 벌이는 이유는 승리하기 위해서가 아닌가. 승리는 승리일 뿐, 더러운 승리도 깨끗한 승리도 없다. 피해를 줄이고, 목표를 달성할 수만 있다면 독이 대수인가. 그는 승리를 위해서라면 독이 아니라 그보다 더한 것이라도 얼마든지 사용해도 괜찮다는 주의였다.
‘슬슬 반응을 보이는군.’
성벽 위에서 쏟아지던 공세가 주춤하고 있다. 효과가 오래가지는 않을 테지만, 그래도 괜찮다. 적의 저항이 가장 거칠어질 순간에 그들의 기세를 꺾었으니까.
“장군! 적이 술독(術毒)에 당황하고 있습니다. 지금이 호기입니다! 명령을!”
휘하 무장들이 너도나도 목소리를 높였다. 이제 그들의 눈에도 보인 것이다. 성벽 위의 적이 흔들리고 있는 것이.
“총공세다.”
잔카라스 데반은 수하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내심 적이 당장 당황했다고 한들, 이대로 호락호락 당해줄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럴 리가 없지.’
다만, 적이 과연 어떻게 대처할지 궁금하기는 했다.
* * *
“독인 것 같습니다.”
토어릭이 그답지 않게 이를 갈았다. 군터는 그의 분노에 동조하지도, 대꾸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할렌 쪽은 밀리고 있나?”
“이곳을 제외한 모든 곳의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연기에 노출된 병사들을 뒤로 물리고 있지만, 전열을 다시 가다듬으려면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적은 그 시간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거세게 밀어붙일 테고, 그러면 자칫 적이 성벽까지 올라올 수도 있다.
‘독이라.’
회색 연기는 북쪽에서만 피어오른 것이 아니었다. 동서남북, 모든 전선에서 피어올랐다. 당연히 군터가 있는 서쪽 성벽에서도 그 연기를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군터는 회색 연기를 고스란히 흡입했음에도 전혀 몸의 이상을 느끼지 못했다. 때문에 옆에 있던 토어릭이나 다른 병사들의 안색이 창백해지거나, 숨이 가빠진 것을 보고 나서야 이 연기에 독성이 있음을 알아차렸을 정도였다.
‘저놈들은 멀쩡하군.’
성벽 아래. 연기가 풀풀 피어나는 한가운데를 용감하게 달려 지나가는 적들이 보였다. 그들은 연기 속에서도 멀쩡한 듯했다.
“하는 수 없지.”
“예?”
“지금 즉시 탑의 술사들에게 전해라. 시작하라고.”
“…알겠습니다.”
두서없는 말이었지만, 따로 설명은 필요 없었다. 토어릭을 비롯한 몇몇은 군터가 비밀스럽게 준비한 한 수에 대해서 알고 있었으니.
토어릭이 달려가고 잠시 후. 키파의 광장 부근에 세워진 높은 첨탑에서 강력한 기운이 퍼져 나왔다. 술사이거나, 기감이 발달한 자들은 즉시 그것을 감지할 수 있었으나 그 힘이 무슨 작용을 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오직 군터만이 그 힘을 뚜렷하게 느끼고, 받아들일 수 있었다. 탑 꼭대기에서 퍼져 나오고 있는 힘은 본래 그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좋군.’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막대한 힘. 군터는 급하게 돌아가는 상황도 잠시 잊고 그 힘에 취해 한껏 고양됐다. 온몸, 아니 그보다 더 깊은 곳에서부터 힘이 가득 차올랐다. 저 아래 까마득하게 널려 있는 적들을 단숨에 쓸어버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착각이지.’
그래. 착각이다. 술에 취한 자가 세상을 바로 보지 못하듯, 힘에 취하여 이성이 살짝 마비된 것이리라. 군터는 그런 자신의 상태를 인지했다. 그리고 냉정을 되찾았다.
‘일어나라.’
그의 의식이 도시 한가운데에 자리 잡은 탑의 꼭대기에 닿았다. 정확히는, 그곳에서 술사들의 술력을 한껏 들이마시고 있는 영혼들에게.
‘움직여라.’
감옥에 갇힌 영혼들이 감옥의 주인에게 이를 드러냈다. 그들 역시 힘에 취해 있던 것이다. 주인을 알아보지 못하고 불쾌하다는 듯 저항하려는 기색을 보였다.
‘내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면 너희 모두 흔적도 없이 없애버리겠다.’
그러나 그들은 곧 몽롱함에서 깨어나야 했다. 그들의 주인이 사납게 이를 드러내자 그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두려움에 떨며 주인의 지시를 이행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였다.
그들은 사방으로 퍼졌다. 그들이 향한 곳은 성벽 앞, 깊게 판 해자 속이었다. 그곳에는 그들이 깃들 수 있는, 깃들어야 하는 육신들이 가라앉아 있었다.
* * *
“어?”
기세 좋게 달려가던 병사는 균형을 잃고 넘어졌다. 앞서가던 그가 넘어지자 뒤따라 달리던 다른 병사들도 휘청거리거나 넘어져 버렸는데, 병사는 뒤따라오던 동료들의 욕지거리에 반응할 겨를도 없이 입을 쩍 벌렸다.
“어…어억…!”
비명도 나오지 않았다. 자신의 가슴을 뚫고 나온, 녹슨 검을 본 순간. 병사의 이성은 마비되었다.
“이…….”
그가 간신히 고개를 돌렸을 때 본 것은 두 눈이 있어야 할 자리가 텅 비어 있는, 살이 반쯤 썩어 있는 괴물이었다.
“괴, 괴물이다!”
본래 그가 외쳤어야 할, 외치고 싶었던 말이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왔다.
병사가 떨리는 입을 한 번 달싹였을 때, 가슴을 뚫고 나왔던 검이 쑥 빠져나갔다. 그와 동시에, 그는 힘없이 주저앉았다. 서 있을 수가 없었다.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몸이 점점 굳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내가…죽는 건가?’
괴물이 걸음을 옮겼다. 병사는 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가 없었다.
‘물?’
그의 머리맡, 그리고 괴물이 걸어간 자리에 물이 흥건했다. 피와 섞인 물이 입술에 닿아 입안으로 조금씩 들어왔다. 뱉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으…으…….”
조금 전까지만 해도 덥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은 정반대로 너무 추웠다.
“괴……!”
들리는 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눈이 감겼다.
* * *
동서남북의 해자에 가라앉아 있는 시체는 모두 합쳐도 400구가 되지 않았다. 시체야 구하려면 얼마든지 구할 수 있었지만, 그 정도가 군터가 부릴 수 있는 영혼의 한계였다. 많지는 않으나, 그마저도 군터가 꾸준히 노력을 기울인 결과였다.
‘결정적인 피해를 주지는 못할 테지만, 한 번 정도는 적을 당황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군터가 바란 것은 그 정도였다.
이미 세간에 그가 사령술을 쓸 줄 안다는 소문이 어느 정도 퍼져 있었으니, 적장도 분명 그 이야기를 접했을 터. 그러니 전장에 시체들이 나타난다고 해도 놀라지는 않을 것이다. 나름의 대처법도 준비했겠고.
하지만 아무리 사령술에 대해 대비를 했더라도, 설마하니 해자 속에서 시체들이 튀어나올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을 터.
그러니 한 번이다. 전장의 흐름을 흔들 수 있는 한 번.
‘이렇게 일찍 쓰게 될 줄은 몰랐지만.’
적이 한 수를 보인 이상, 이쪽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않겠나.
군터는 해자 속에서 튀어나온 시체들이 적의 한복판에 뛰어드는 것을 지켜보았다.
강맹하고 견고하게만 보이던 적의 진형이 크게 흔들리는 것이 한눈에 들어왔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