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2화
잔카라스 데반은 길게 끌지 않았다. 아군의 사기는 높았고, 전의는 충분했다. 잘 익은 과일이 며칠을 더 두면 상하기 시작하듯, 이 이상 끌어봐야 상황이 더 좋아지지는 않는다. 즉, 싸운다면 지금이 적기였다.
“공격.”
그는 지체하지 않고 명령했고, 곧 그의 명령은 도시를 둘러싼 전군에 전달되었다.
“공격!”
나직한 한 마디는 곧 넓은 땅을 뒤덮는 외침이 되었다. 이미 한참 전부터 가슴을 들썩이던 수만 명이 미리 약속이라도 해뒀던 것처럼 일제히, 힘껏 함성을 지르며 앞으로 내달렸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함성. 지진이라도 난 것 같은 땅의 울림. 성벽 위에서, 새까만 물결이 출렁이며 다가오는 것을 지켜보고 있으니 절로 표정이 굳어졌다.
“동요하지 마라. 놈들은 절대 성벽을 넘지 못한다.”
경련하듯 몸을 떠는 병사들을 다독였지만, 막상 그리 말한 장교 본인조차도 ‘과연 그럴까’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성벽은 높고 튼튼하다. 그 앞에는 공을 들여 판 해자까지 있다. 적이 아무리 많다고 해도, 이 도시는 절대 무너지지 않으리라.
하지만 저 거대한 물결을 보고 있자니, 그런 굳은 마음에도 균열이 일기 시작했다.
“궁수!”
할 수 있는 것은 저 멀리 보이는 지휘기의 지시에 따라 목청을 높이는 것뿐.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두려움을 떨쳐내고자, 일부러 더 크게 소리쳤다.
* * *
“처음부터 상당히 본격적이구만.”
아드리안이 까맣게 밀려오는 적군 속, 우뚝 솟아 있는 공성추와 투석기들을 보고 툭 뱉은 말이었다.
대충 돌 몇 개 쌓아놓은 요새를 공략하는 게 아닌 이상, 공성전을 치르려면 공성 병기를 준비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니 적이 그런 것들을 준비했다고 해도 특별할 것은 없지만, 아드리안이 이런 말을 한 것은 그 수가 많았기 때문이다. 특별할 정도로.
“이 도시를 돌려 쳐서 통째로 부수려는 생각인가.”
당장 눈에 보이는 것만 해도 대충 수십 개 정도는 되어 보였다. 한 방면이 이 정도니, 다른 쪽도 비슷하다고 친다면…….
“적이 포진하고 있습니다!”
“일일이 알릴 것 없다! 나도 눈이 있으니!”
어차피 할 수 있는 일도 없다. 그저 성벽을 방패 삼아 버티는 것 외에는.
“온다!”
적의 포진이 끝나기가 무섭게 조금 커다란 점들이 움직였다.
“대부분은 엄한 곳을 두들기겠지만, 개중 몇 개 정도는 제대로 날아오는 것도 있을 것이다! 다들 재주껏 피해라! 살아서 다시 보자!”
농담처럼 들리지 않는 농담. 그러나 정작 그렇게 우스갯소리를 크게 외친 아드리안 본인의 표정은 지금 날아오는 돌덩이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콰앙!
굉음이 터짐과 동시에 땅이, 아니 성벽이 흔들렸다. 큰 흔들림은 아니었으나 몇몇 병사들이 두려움을 느끼기에는 충분했다.
“뭣들 하나! 방패 들어! 오늘 너희가 이곳에서 죽는다면, 그건 저 눈먼 돌덩이가 아니라 저 아래에 있는 놈들이 쏴대는 화살일 것이다! 죽기 싫으면 당장 방패 들어!”
안다. 머리로는 알지만, 몸이 자꾸만 움츠러든다는 것을. 지금은 기억도 가물가물해졌지만, 그 역시 신병이었던 때가 있었다. 그때는 그도 꽤 헤맸었다. 물론 그래도 저기 방패를 가슴께 정도까지 떨어뜨린 얼간이들보다는 훨씬 나았지만.
“어이!”
아드리안은 가장 얼빠진 얼굴을 한 병사에게 다가가 그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겁에 질린 얼굴이 그를 보고 더욱 창백해졌다.
“방패 들라는 말 못 들었나?! 죽고 싶어? 그렇다면 말만 해라. 당장 죽여줄 테니!”
그렇게 외친 아드리안은 병사의 멱살을 쥔 채 힘껏 밀었다. 조금만 더 밀면 병사가의 성벽 아래로 떨어질 정도까지 몰아붙인 그는 다시 한번 소리쳤다.
“상황이 급하다! 빨리 말해라! 죽고 싶나!”
“아, 아닙니다! 살려주십시오!”
“좋아!”
아드리안이 병사를 거칠게 끌어당겨 집어 던졌다.
“방패를 들어라! 그 무거운 녀석이 네놈들의 목숨이다!”
제대로 전투가 시작되기도 전에 힘을 뺐지만, 헛수고는 아니었다. 적어도 이곳에 있는 병사들에게 방패가 목숨과 같다는 사실 하나만은 똑똑히 알려주었으니까 말이다.
“방패 들어! 어차피 저 눈먼 돌덩이는 위협용에 불과하다! 맞추지도 못하는 돌팔매질로 우리의 기를 죽이려는 개수작이란 말이야! 저 헛짓거리가 끝나고 나면 놈들은 그제야 공격해올 거다! 그런데 시작도 하기 전에 기가 죽어서야 되겠나! 그거야말로 놈들이 원하는 바란 말이다!”
인간은 본래 누군가가 자신을 이끌어주기를 바란다. 그런 나약함은 인간의 본성이며, 그 본성이 가장 잘 드러나는 경우가 바로 지금 같은 상황이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그 공포에 직면했을 때, 인간은 자신들을 이끌고 보호해줄 존재를 갈망하게 된다.
그러므로 지휘관인 아드리안이 이렇듯 두려움 없이 거친 모습을 보이는 것은 병사들에게 큰 힘이 됐다. 그들은 몇몇 병사들을 주먹으로 후려치고, 발로 차며 윽박지르는 그를 보면서 두려움이 아닌 위안을 얻었다. 마치 타는 볕 아래 자그마한 그늘을 발견한 것처럼.
‘뭐, 놈들도 첫날 끝장을 볼 생각은 없을 테니까……. 적당히 하다 빠지겠지.’
그뿐만 아니라 다른 누구라도 같은 생각일 것이다. 기세 좋게 몰려오고는 있지만, 결국 적당히 싸우다가 물러날 거라고.
하지만.
“공성추다! 불화살을 쏴!”
아드리안이 눈을 부릅떴다.
‘공성추를 움직여? 벌써?’
빠르다.
공성 병기는 물론 튼튼하지만, 그래도 귀중한 것이기에 절대 함부로 다루지 않는다. 무슨 말이냐면, 먼저 병사들을 내보내 상대의 주의를 분산시킨 다음 운용하는 것이 보편적이라는 뜻이다. 지금처럼 아예 대놓고 먼저 쓰는 경우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군.’
아드리안은 조금 전 보았던, 뺀질거리던 적장을 떠올렸다. 머리를 굴릴 줄 아는 자 같았으니 분명 무슨 속셈이 있을 것인데, 그게 무엇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아무려면 어때. 싸움을 걸어오면 싸워주면 그만 아닌가! 아낌없이 쏟아부어라! 저 덩치를 태워버리고 나면 나머지는 손쉽다!”
붉은 선들이 허공을 무수히 수놓았다. 거대한 공성추가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을 때는 간이 투척기로 날린 기름 주머니도 적잖이 날아갔다. 일부는 빗나갔고, 일부는 제대로 날아가 바퀴를 굴리며 움직이는 목조 병기에 명중했다.
“쏴라! 계속 쏴!”
기름이 부어졌고, 그 위에 불화살이 날아들었다. 지켜보던 이들은 곧 불길이 거세게 번지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뭐지?”
그러나 그들이 예상했던, 그리고 기대했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수백, 수천 발의 불화살이 날아들었으나 공성추에서는 자그마한 연기 하나 피어오르지 않았다.
* * *
“너무 얕보는군.”
우직하게 앞으로 나아가는 공성추를 보며, 잔카라스 데반은 실소를 머금었다. 열심히 불화살을 쏴대는 성벽 위의 적을 보고 있자니 저들이 얼마나 당황하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설프게 준비한 전쟁이 아니란 말이지.’
그냥 공성추가 아니다. 골조부터 숙련된 장인들 여럿이 달라붙어 만들었고, 그렇게 만들어진 것에 술사들이 공들여 술식을 새겨넣었다. 즉, 저 공성추는 하나의 거대한 법구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진짜 법구들에 비하면 그 기능이 제한적이고, 어찌 보면 별 볼 일 없어 진짜 법구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제대로 쓰임새를 다할 수 있다면, 저 투박한 병기가 화려한 법구에 뒤질 이유가 무엇인가.’
기능은 간단하다. 조금 더 튼튼하고, 특히 불에 강할 뿐이다. 하지만 보라. 그렇게 간단한 기능이지만, 수만이 얽혀 싸우는 이 전장에서 그 어떤 법구보다 유용하게 쓰이고 있지 않은가.
“공성추가 화살 정도는 버틸 테지만, 돌이나 쇳덩이를 버틸 수는 없을 겁니다.”
“괜찮다. 적도 성문만 바라보고 있을 수는 없을 테니.”
“귀한 물건이지 않습니까. 혹시라도…….”
“목제 병기는 귀하고, 병사들의 목숨은 귀하지 않은가?”
“송구합니다. 절대 그런 뜻으로 말씀드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잔카라스 데반은 고개 숙인 부관을 더 나무라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어쨌거나 공을 들여 만든 병기니까, 함부로 다루다가 상하기라도 하면 큰 손해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는, 잔카라스 데반은 생각이 조금 달랐다.
‘쓰기 위해 만든 물건이다. 그런데 정작 써야 할 때 아까워서 쓰기를 망설인다면 그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전력으로 몰아친다. 한 번의 전투로 끝을 볼 생각은 없지만, 싸운다면 온 힘을 다한다. 그래야만 잔뜩 들어가 있는 힘이 어느 정도라도 빠질 테니까.
‘6만 5천. 분명 한 곳에 모이기 힘든 대병력이지.’
살면서 이런 대병력을 직접 눈으로 본 이가 몇이나 될까. 어디로 고개를 돌려도 같은 깃발을 든 아군 병사들뿐이니, 어깨가 으쓱하고 발걸음에 힘이 실리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 자신감이 자만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그리고 그가 보기에, 지금 그가 거느린 군대는 그 자만이라는 것에 반쯤 발을 딛고 있었다.
‘일부러 질 생각은 없지만, 쓸데없는 것은 좀 덜어내야 하지 않겠는가.’
어차피 적의 전력도 가늠해봐야 한다. 한 번은 제대로 부딪쳐봐야 했고, 그는 단지 그 시기를 앞당겼을 뿐이다.
‘이 한 번으로 끝났으면 좋겠지만…그럴 리는 없겠지?’
잠깐 말을 섞었을 뿐이지만, 그 잠깐의 시간만으로도 만만치 않은 상대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매서웠던 화살 때문이 아니라, 상대가 풍기던 분위기 때문이었다.
잔카라스 데반은 몸보다는 머리를 쓰는 편이었다. 그편이 더 자신 있기도 하고, 그게 군사를 이끎에 있어 더 올바른 방식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항상 열심히 머리를 쓰는 그는, 우습게도 감이라는 것을 중시했다. 머리를 쥐어 짜내어 생각해낸 추론과 비슷하거나, 어쩌면 그 이상으로.
그리고 그런 판단은 그냥 기분에 따른 것이 아니라, 그의 경험에 근거한 것이었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감이 그에게 무언가를 이야기했을 때. 그 조용한 속삭임은 틀린 경우가 거의 없었다.
* * *
“전열이 생각보다 단단하다. 멀리 쏴라. 후열을 노린다.”
“옛!”
군터는 명령을 내리면서도 손을 쉬지 않았다. 병사들에게는 뒤쪽을 노릴 것을 지시했지만, 정작 그는 커다란 방패를 들고 접근해오는 전열의 적을 노렸다.
아무리 단단한 벽이라도 틈은 있기 마련. 군터의 화살은 그 자그마한 틈을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피잉!
또 하나. 적이 쓰러지고 방패 벽에 구멍이 생겼으나 그 구멍은 언제 그랬냐는 듯 금세 사라졌다. 군터는 슬쩍 눈살을 찌푸리며 화살통에 손을 뻗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잡히는 것이 없었다. 어느새 통 안의 화살이 바닥난 것이다.
“화살을 가져와라!”
기다리는 시간도 아까워 주변에 있던 궁병의 화살을 한 움큼 가져왔다. 그리고 다시 시위를 당기려는데, 토어릭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장군! 북쪽의 적이 성벽에 접근했습니다! 사다리를 쓰려는 것 같습니다만…….”
“뭘 대수라고. 막으면 될 일 아니냐!”
“그것이, 놈들이 이상한 짓을 하고 있습니다!”
“이상한 짓?”
군터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그가 북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이 보였다. 보고 있는데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드는, 회색에 가까운 연기였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