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1화
군터는 정찰병의 보고를 통해 잔카라스 대반의 움직임을 계속해서 보고받았다.
보고받은 바에 따르면, 바라눔 트라소프의 신임을 받는 젊은 무장은 이제껏 그가 상대해온 어떤 적과도 다른 것 같았다. 뭐랄까, 군을 이끄는 무장 특유의 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그가 상대해온 무장들은 모두 굳건한 느낌을 주었다. 그것은 외관이나, 한 사람이 가진 기질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지휘하는, 군의 운용을 말함이었다.
그러나 잔카라스 데반은 그런 단단하고 강한 느낌이 들지 않았다. 느릿하다고 해야 할까 여유롭다고 해야 할까. 뭐라 표현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풍기는 느낌은 상당히 이질적이었다.
“꼼꼼히 넓은 지역을 차례로 점령해가면서 민심까지 다독이고 있는 모양입니다. 아무래도…장기전을 준비하는 것 같습니다.”
“마흔도 되지 않았다는 자가 닳고 닳은 노장처럼 구는군요.”
전장에서 신중하게 움직여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그러나 머리로 아는 것을 행동으로 보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신중함이 소심함이 되는 경우도 심심찮게 생긴다.
그러나 잔카라스 데반의 움직임은 지극히 신중했다. 그는 조금씩, 철저하게 밀고 들어왔다. 벌써 군의 규모가 5만을 넘었다던가? 항장인 메일러 오챈을 후하게 대우하고, 항복한 병사들도 차별하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퍼지기 시작하니 소규모 성과 도시들이 앞다투어 백기를 걸어대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렇듯 바깥에서는 안 좋은 거의 소식만이 들려왔지만, 사실 상황이 안 좋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잔카라스 데반이 느릿하게 움직이는 동안, 키파도 그 시간 동안 나름대로 준비를 하고 있었으니.
“해자를 다 팠습니다.”
“성문 강화를 마쳤습니다. 철판을 이중으로 댔으니 어지간해서는 뚫리지 않을 겁니다.”
“시장이 열심히 일을 해주고 있습니다. 이제 전투가 반년 넘게 이어진다 해도 화살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투석용 돌을 둘 창고가 가득 찼습니다.”
“북부 6개 도시에서 보름 내로 병력을 보내기로 했습니다.”
준비는 부족함이 없었고, 점점 더 완벽해지고 있었다. 5만이 아니라 10만이 몰려온다고 해도 충분히 버틸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생길 정도였다.
“외성벽은 이제 더 보강할 수 없습니다.”
“빠져나갈 자들은 다 빠져나갔나.”
“예.”
키파의 시민들은 사정에 어둡지 않다. 게다가 군터도 전투가 코앞으로 다가왔음을 숨기지 않았기에, 그들은 도시를 빠져나갈 기회는 지금뿐이라는 것을 잘 알았다.
“떠날 자들은 모두 신속히 떠나라.”
군터는 그들을 억지로 도시에 묶어두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오히려 광장에 나가 떠날 자들은 떠나라며 공개적으로 이야기했다. 어찌 보면 떠나라고 등을 떠미는 모양새였다.
그에 대해 수하들은 우려했다. 유사시에 써먹을 수 있는 머릿수라도 있어야 하지 않겠냐는 것이 그들의 논조였다. 하지만 군터는 그들과 생각이 달랐다.
“우리가 공성의 입장이었다면 너희의 말이 옳다. 하지만 지금은 그 반대지. 우리에게는 성벽이 있다. 싸울 각오도 되지 않은 자들을 억지로 묶어놔 봐야 군의 사기만 떨어질 뿐.”
키파는 전투를 생각하고 설계된 도시는 아니지만, 그래도 제법 높고 튼튼한 성벽이 있었다. 성벽에 의지하여 문을 닫아걸고 버틴다면 적의 군세가 5만이 아니라 10만이라고 해도 별로 위협적이지 않았다.
버티는 싸움이라는 것이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훈련 상태며 소속도 제각각인 군대를 가지고 배 이상이나 되는 적과 야전으로 맞붙는 것은 현실적으로 위험부담이 너무 크다.
인근에서 끌어모은 병력이 대략 5천이 조금 넘는다. 이것밖에 안 되냐고 할 수도 있지만, 최소한의 수비 병력까지 전부 동원하면 자칫 적이 키파를 포위하고 군을 나눴을 때 대응하기가 어려워진다. 그래서 5천 정도가 한계다. 그럼 대략 3만. 3만을 가지고 5만…아니, 저 평야에 당도할 즈음이면 그보다 더 많아져 있을 적을 상대해야 한다. 후방에서의 원군도 기대할 수 없다.
“저쪽도 당장은 여유가 없습니다. 우리가 최대한 버텨주기를 원하는 모양입니다.”
아록도, 리바스트라도 힘이 부치기는 매한가지인 듯했다. 아록에서는 바라눔 트라소프가 불패의 군대를 이끌고 활약 중이고, 리바스트라에서는 쥬드 포트락이 이름값을 제대로 해내고 있다.
“이제 남은 일은 기다리는 것뿐인가.”
“예. 그런 것 같습니다.”
할 수 있는 준비는 끝났으니 이제부터는 수십 년 동안 해온, 익숙한 일을 되풀이할 때다.
* * *
우우우-!
외뿔소의 뿔로 만든 호각이 긴 울음을 토한다. 잔카라스 데반은 이 웅장한 소리를 좋아했다. 음악에는 취미가 없는 그였지만, 전장에서 듣는 이 짧고 단순한 음악만큼은 끊을 수 없는 마약처럼 그를 중독시켰다.
그는 힐끗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보는 순간 까마득하다는 생각이 드는, 크고 작은 점의 물결이 끝도 보이지 않을 만큼 길게 늘어져 있었다.
대략 6만 5천. 정확히는 그 이상일 대병력이 그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너무 효과가 좋았던 건가.’
보급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지만, 그래도 이건 조금 심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6만 5천이라는 머릿수가 모두 제대로 된 병사는 아니다. 저 중에 제대로 싸울 줄 아는 병사의 수가 과연 얼마나 될까. 반은 넘을 것 같지만,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뭐, 상관없지.’
싸울 수 있는 병사는 당연히 쓸 곳이 있지만, 싸우지 못하는 병사도 나름 쓸 곳이 있다.
“저것이 키파인가.”
탁 트인 지형이었기에 멀리서도 도시의 성곽을 볼 수 있었다. 성벽 위에 흔들리는 깃발의 문양은 확인할 수 없었지만, 어쨌든 적은 저 안에 웅크리고 있으리라.
“호전적인 자라고 들었는데, 따로 환영 인사는 하지 않는군.”
“고작해야 3만. 그것도 여기저기서 긁어모은 병력일 겁니다. 이 대군을 상대로 뭘 할 수 있겠습니까.”
“진심이오?”
메일러 오챈은 답하지 않았다. 상관의 물음에 입을 닫는 것은 죄를 물을 수도 있는 일이었으나 잔카라스 데반은 가벼운 웃음을 흘릴 뿐, 특별히 개의치 않았다.
“일단…인사 정도는 해둘까.”
도시를 포위하라고 명령을 내린 후. 잔카라스 데반은 기수 둘을 거느리고 앞으로 나섰다. 그는 성벽 위에 선 자들의 얼굴이 어렴풋이 보일 즈음 말을 멈춰 웠다. 그리고 쏟아지는 무수한 시선을 느끼며 목청을 높였다.
“바라눔 트라소프 전하를 섬기고 있는 잔카라스 데반이다! 너희 중에는 내 이름을 아는 자도 있을 것이고, 어디선가 한두 번쯤 들어본 자도 있을 것이며, 아예 모르는 자도 있을 것이다! 상관없다! 너희가 알아야 할 것은 내 이름이 아니라, 내가 이끌고 온 7만 대군이니까!”
6만 5천이 7만이 되었으나 이어지는 그의 목소리는 태연했다.
“너희 중에 투철한 사명감을 가지고 거기에 서 있는 이들은 몇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대의도 좋지만, 가망 없는 싸움에서 하나뿐인 목숨을 잃는 것이 얼마나 슬픈 일이더냐! 항복해라! 너희가 소문을 들었는지는 모르지만, 난 항복한 자들을 가혹하게 대하지 않는다! 너희에게 죽기로 싸울 것을 강요하는 자들은 절대 너희 대신 죽어주지 않을 것임을 알아라!”
말을 끝냄과 동시였다. 피잉! 하는 소리가 들렸을 때, 잔카라스 데반은 반사적으로 검을 뽑아들었다. 하지만 눈 깜짝할 사이에 날아든 무언가는 그를 향하지 않았다.
퍽!
둔탁한 소리. 비명도 없이, 그의 뒤편에 있던 기수 하나가 나가 떨어졌다. 그를 태우고 있던 말이 놀라 날뛰었지만, 잔카라스 데반의 시선은 성벽 위 한 지점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인사를 하러 왔다고 생각하지. 헛소리를 참고 들어주는 것은 한번 뿐이니, 목 위의 물건이 멀쩡하고 싶다면 이만 돌아가도록.”
희한한 일이었다. 크게 소리치는 것 같지도 않았는데, 그 목소리가 뚜렷하게 들렸다. 차분하면서도 힘이 있었는데, 목소리에도 형태가 있다면 마치 커다란 바위가 저렇지 않을까 싶었다.
‘만만치 않은 자로군.’
가볍게 흔들어볼까 했는데, 아무래도 호락호락하게 당해주지는 않을 모양이다.
“군터 크렘보르! 내가 한 말은 그대에게도 해당이다! 거친 답례는 유감이나, 그대도 잘 생각해보도록!”
피잉!
다시 한 번 날카로운 파공음이 들렸다. 이번에는 소리만이 아니라 등줄기를 서늘하게 하는 살기까지 함께였다.
채앵!
들고 있던 검을 냅다 휘둘렀다. 화살촉과 검날이 부딪치고, 충격이 팔 전체에 퍼졌다. 몸이 밀리지 않은 것은 미리부터 두 다리에 힘을 꽉 주고 있던 덕이었다.
“듣지 않겠다면 더 이상 말하지 않겠다! 허나 그대의 욕심 때문에 저 무수한 병사들을 죽음으로 내몰지 마라!”
더 자리를 지키다가는 화살이 한 발이 아니라 수십 발이 날아올 것 같아, 잔카라스 데반은 최대한 빨리, 그러나 다급해 보이지 않게 몸을 돌렸다. 다행스럽게도 뒤통수에 화살이 날아들거나 하지는 않았기에, 그는 남모르게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 *
“교활한 놈이군요.”
할렌이 혀를 찼다.
“그럴 거라고 짐작했다.”
“왜 놈의 머리를 날리지 않으셨습니까.”
“화살 따위로 머리를 날릴 수 있는 놈이 아니니까.”
두 번째 화살을 쳐낼 때의 반응은 제법 매서웠다. 입만 산 놈이 아니라는 뜻이다. 당해주지도 않을 놈을 상대로 애를 써봐야 꼴만 우스워질 뿐이다.
“어차피 전투가 시작되면 다른 생각을 할 겨를도 없어질 테지만, 그 전까지 병사들이 동요하지 않도록 잘 단속해라.”
“예.”
대놓고 머릿수를 자랑한 것은 이쪽에도 부담이지만, 저쪽에도 부담이다. 저만한 병력을 데리고 제대로 된 공격도 없이 포위만 굳히고 있으면 겁쟁이 소리를 듣기 딱 좋으니까. 즉, 저쪽도 일단 한 번 정도는 공격을 해올 거라는 뜻.
뿌우우우-!
군터는 성벽 위에 서서 징그러울 정도로 많은 인간들이 부지런히 움직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적장의 말에 따르면 7만, 아마 그것보다는 조금 적을 것으로 추정되는 대병력이 도시를 완전히 둘러쌌다.
살면서 단 한 번도 못 봤을 장관이다. 문제가 있다면, 그 장엄함을 자아내고 있는 거대한 군대가 이제 곧 상대해야 할 적이라는 것.
“병사들이 동요하고 있습니다.”
군터는 병사들이 동요, 더 나아가 두려워하는 것을 이해했다.
“몇놈 정도 목을 베시지요.”
아드리안이 그다운 제안을 했다. 두려움에는 더 큰 두려움으로. 실제로 군터도 즐겨 썼고, 그때마다 효과를 본 방법이었다. 하지만…….
“과하다.”
“그렇습니까?”
아드리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치 군터라면 바로 그러라고 할 줄 알았다는 듯이.
“아무리 말로 어르고 칼로 다그쳐봐야 무슨 소용이겠나. 직접 보여주는 것이 빠르다.”
확신을 주는 거다. 결코 무모한 싸움이 아니라고. 충분히 할 만한 싸움이라고.
뿌우우우-!
겁을 주려는 듯, 계속해서 울려대는 호각 소리.
이쪽의 군기가 계속해서 꺾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만약 전투의 규모가 작았다면, 그는 즉시 기병을 이끌고 뛰쳐나갔을 것이다. 그리고 도발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했겠지.
그러나 이 싸움은 그렇게 가벼이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작지 않다. 그도 이제껏 경험한 적 없는 대전투였다.
“곧이다.”
적이 도시 앞에 도착하고 얼마 되지 않았지만, 분위기는 벌써부터 무르익고 있다. 며칠 안에 이 고조된 분위기가 절정에 이를 터.
그때를 위해, 군터는 조용히 그의 창을 기름 묻힌 천으로 닦았다. 지금까지 수백, 아니 그 이상의 피를 묻혀온 창이 기이한 울음을 토했다. 그 소리는 오직 주인인 군터만이 들을 수 있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