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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720화 (720/1,064)

720화

테네드와 상인회의 주요 인사들, 그리고 그들이 거느린 자들에게는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친 것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군터 휘하의 무관들조차도 군터가 이렇게 무지막지하게 몰아붙일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었으니 그들이 느끼는 당혹감은 당연했다.

“뭘 이 정도를 가지고. 장군께서는 여차하면 이 도시를 불태울 생각까지 하고 계실걸.”

아드리안은 군터의 파격적인 행보에 당황하지 않은 몇 안 되는 이 중 하나였다. 그는 군터가 뭘 생각하고 있는지 어렵지 않게 짐작했다.

“관문 도시니 뭐니 하는 건 장군께 아무런 의미도 없다. 중요한 건 이 도시에서 적을 막아설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거지.”

목적은 분명하고 과정은 단순하다. 효율적이라고 생각되면 효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그 과정에서 피를 본다고 해도 말이다.

“하지만, 장군의 처사에 불만을 가지는 이들이 나올 걸세.”

아드리안이 뭐가 문제냐는 듯 어깨를 으쓱거리자 토어릭이 조용히 반박했다.

상인회의 수뇌부라고 할 수 있는 자들을 쓸어버렸지만, 그걸로 다 끝난 것은 아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던 힘의 상당수는 여전히 그늘 속에 숨어있다. 그 힘이 원치 않는 방향으로 튀는 순간, 이쪽은 골치 아프게 될 수밖에 없다.

“왜. 길 한복판에서 칼을 맞을까 두려운가?”

“물론 그것도 두렵긴 하지. 하지만 그보다 두려운 것은, 우리에게 불만을 품은 세력이 지금 열심히 이곳을 향해 달려오고 있을 적에게 더해지는 것이야.”

“그렇다며 오히려 더 잘된 일 아닌가. 쓸어버려야 할 놈들이 한데 뭉쳐주면 한 번에 정리하기가 쉬워지니까.”

“여전히 패기가 넘치는군. 가끔은 그런 자네가 부럽기도 해.”

아드리안도 토어릭이 최대한 좋게 돌려 말한 것임을 알았지만 씩 웃을 뿐, 더 말하지는 않았다.

“그나저나 장군께서 이런 수를 쓰실 줄이야. 그것도 직접 생각하셔서 말이지. 솔직히 좀 놀랐네.”

발상도 그렇고, 그것을 풀어가는 과정도 간단했으나 그것을 주도한 이가 다름 아닌 군터라는 점이 놀라웠다. 그들은 단 한 번도 군터가 이런 모략을 꾸밀 수 있으리라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모략을 꾸며낼 머리가 없어서가 아니라, 기질상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할렌이 입을 열었다.

“안 그래도 그 부분에 대해 여쭤봤지.”

“뭐라시던가?”

“그 시장. 비후스 자번이 얼간이 연기를 하는 것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드셨다는군. 이놈은 이용할 수 있겠다, 하고 말이야.”

“그 땀 많은 작자가 장군께 영감을 드린 건가?”

“그렇다고 봐도 되겠지.”

토어릭은 그동안 그가 그의 상관에 대해 다소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그분께서도 어느덧…….’

아무것도 모르는 채, 말 한 필을 타고 전장을 누비던 군인은 귀족이 되었으며, 성주가 되었고, 한 주의 방위군단장이 되었다. 소위 높으신 분이 됐다는 거다.

또한 그는 여러 귀족들, 특히 테리브란의 귀족들과도 연이 있다. 한때는 그 제레이스 가문의 식객으로서 제레이스의 직계와 어울리기도 했다.

그런 그가, 어찌 높으신 분들의 암수 같은 것에 무지할 수 있겠는가. 가까이 있으면 저절로 닮게 되는 부분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니 그간은 그저 필요성을 못 느꼈을 뿐, 그는 정치적인 암수에도 어느 정도 열려있을지 모른다.

‘게다가, 야스메티 공이 생전에 얼마나 많은 계책을 냈던가.’

야스메티가 제안했으나, 결국 그 모든 것들에 허락을 준 것은 군터였다. 왜 그것을 간과하고 있었을까.

“아무튼…혹여 동요하는 놈들이 있을지 모르니 다들 정신 똑바로 차리고 감시하게.”

할렌이 자리에 모인 이들에게 당부했다.

다가올 전투를 위해서라지만, 이유야 어쨌든 아무 죄 없는 상인회를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렸다. 테네드를 비롯한 몇몇 수뇌들은 일족이 멸해지기까지 했다. 물론 대외적으로는 배신자들을 벌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그래도 동요하는 자들이 생길지 모른다. 특히 키파의 군병들이 문제였다. 병사들이야 그렇다 쳐도, 장교들 같은 경우는 상인회의 상인들과 연결된 자들을 찾는 것보다 연결되지 않은 이를 찾기가 더 어려울 지경이었으니까.

“제 놈들이 불만이 있어 봐야 뭘 어쩌겠나. 여차하면 눌러버리면 그만이야.”

아드리안이 콧방귀를 뀌었다. 그러자 토어릭이 눈을 가늘게 좁혔다.

“그런 발상은 위험하네. 우리는 좋든 싫든 이 도시를 거점으로 삼아 적에 대응해야 해. 이곳의 시민들과 험악한 분위기를 조성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지.”

“시민?”

“군병들도 시민이네. 그들의 가족들도 당연히 시민이지. 우리에 대한 이야기는 그들의 입을 통해 도시로 번질 것이라는 말이야.”

“그 말이 옳다.”

할렌이 토어릭을 거들었다. 그에 아드리안은 한 발짝 물러났다. 애초에 그가 눌러버리면 된다는 둥 이야기했던 것은 별 생각 없이 마음 가는 대로 떠든 것에 불과했다. 고집을 부릴 것도 없고, 듣다 보니 토어릭의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했다.

“알았네. 알았어. 주의하지.”

“남은 시간이 얼마 없네. 상인회의 일도 끝이 났지. 물론 그 뒤처리가 남기는 했지만, 그보다는 불안해할 이들을 포용하는 것이 더 중요해.”

“장군께 드려야 할 말 아닌가?”

“물론 그럴 걸세. 하지만 자네들도 알아주었으면 해서 하는 말이야.”

토어릭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익숙한 얼굴, 아직은 조금 낯선 얼굴들이 모두 그를 보고 있었다.

“거칠게 일을 치렀지. 흥분해있는 친구들이 있다는 것을 아네. 이해해. 하지만 이 도시에 있는 이들 대부분은 아군일세. 길을 걷는 장정, 아낙, 아이들까지도. 모두 우리의 힘이 될 수 있는 자들이고, 동시에 우리가 지켜야 할 자들이야. 절대로 그들과 척을 져서는 안 되네. 그들을 적으로 돌리는 것은 바라눔 트라소프의 군대를 상대하는 것보다 더 위험한 일이야.”

“꼭 우리 아버지 같이 말하는군. 그 양반이 생전에 날 당신의 앞에 차렷 자세로 세워두고는 딱 이렇게 말씀하셨었지.”

딱딱해진 분위기가 누군가의 농으로 풀어졌다. 토어릭은 그에게 눈짓으로 고마움을 표현하고는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너무 설교하듯 떠들어대면 밉보이기 쉽다. 오랫동안 봐 온 동료들이야 그러려니 하겠지만, 아직 낯선 이들은 그렇지 않을 테니 이쯤에서 조용해지는 것이 좋다.

“장군. 시민들을 끌어안으셔야 합니다.”

아랫사람들끼리의 자그마한 회의가 끝난 후. 토어릭은 그가 이야기했던 것처럼 군터에게 찾아가 조언을 건넸다. 군터는 토어릭의 말이 끝날 때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고 경청했다가, 그의 말이 끝나자 천천히 입을 열었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다만, 구체적으로 뭘 어쩌라는 소리냐.”

“이번에 테네드를 비롯한 거상들을 쓸어버리면서 그들의 가산을 몰수하지 않았습니까. 그 재물을 일부 풀어 시민들에게 베푸시지요.”

가장 간단하면서도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돈을 쓰는 만큼 시민들은 환호한다. 그 환호가 그리 오래가지는 않겠지만, 단기적으로 봤을 때는 가장 효과가 뛰어난 방법임이 분명하다.

돈을 풀자는 토어릭의 말을 듣자마자, 군터는 실소를 흘렸다. 아주 잠깐이지만, 태연하게 돈을 뿌리자는 말을 입에 담는 토어릭에게서 야스메티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그리 해라.”

“예. 하옵고, 적장에 대한 정보가 들어왔습니다.”

군터의 입가에서 웃음기가 가셨다.

“누구냐.”

바라눔 트라소프나, 쥬드 포트락이 아닌 이상 이름을 들은들 알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물었다.

“잔카라스 데반이라는 자입니다.”

“처음 듣는 이름이군.”

“젊은 무장이라고 합니다. 서른 중반 정도 됐다고 하더군요. 다만 솜씨는 있는 모양입니다. 전공도 상당하고, 무엇보다 바라눔 트라소프의 총애가 두텁다고 합니다. 항간에는 쥬드 포트락의 뒤를 이을 만한 인재라고 하더군요.”

소문이라는 것이야 늘 과장되기 마련이지만, 일단 한 가지는 사실 같았다. 그가 바라눔 트라소프의 신임을 받고 있다는 것. 수만이나 되는 대군을 맡긴 것만 봐도 그 신임의 정도를 대강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적의 군세가 점점 불어나고 있습니다. 지나는 길목마다 적극적으로 설득을 하는 모양입니다.”

콴러드에서 그랬던 것처럼 투항을 권유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자의 말솜씨가 좋은 것인지, 아니면 거느린 군대의 위용 때문인지는 몰라도 적지 않은 이들이 그의 군대에 합류하고 있다고 합니다.”

“행군 속도는 느려질 테고, 군량도 축나고 있겠지. 어중이떠중이들로 머릿수를 늘려도 실속은 없다.”

“옳은 말씀입니다만, 그렇다 해도 가벼이 볼 수는 없습니다. 적의 수가 많으니 일단 양주(아록과 리바스트라)에 원군을 청하고, 병력을 결집해야 합니다.”

“적이 넓게 밀고 들어온다면?”

질문이 아니었다. 그에 대한 답은 두 사람 모두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그렇다면 결집한 군대로 적의 머리를 치면 되지 않겠습니까.”

“네 말대로 하지.”

키파가 방어선의 중심이기는 하지만, 키파 외에도 거점이라 할 만한 곳들이 여럿 있었다. 적의 대군이 키파로 향하고 있다는 것은 전부터 짐작하고 있었으나, 다른 거점을 지켜야 할 병력을 함부로 한 곳에 끌어모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적의 움직임이 명확하게 드러난 상황이니 이제는 더 미룰 이유가 없었다.

“군수품의 조달에 차질은 없겠지.”

“비후스 자번이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군터는 상인회를 쓸어버린 후에 비후스 자번에게 본래 그의 것이었어야 할 권리를 주었다. 그리고 군무에 관련된 것이 아닌 한, 그가 하는 일에 일체 관여하지 않을 것을 약속했다.

비로소 진정한 의미에서 시장이 된 비후스 자번은 대단히 적극적으로 일에 매진했다. 그동안 억눌렸던 것이 터져 나오는 것인지도 모르고, 자신의 능력을 보여야만 지금의 신임이 계속되리라는 것을 알아서인지도 모른다. 무엇이든 간에, 그는 군터가 요구한 것, 그 이상을 보여주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 * *

“아군이 이 땅에 깃발을 세우게 되더라도 약탈은 물론, 그대들에게 그 어떤 불이익이라도 주는 일은 없을 걸세. 내 이름을 걸고 약속하지.”

“장군의 말씀을 믿겠습니다.”

또 한 명, 허리가 굽은 노인을 웃으며 내보낸 잔카라스 데반은 노인이 완전히 막사를 나간 후에야 다시 의자에 앉았다.

“저런 촌부까지 직접 만나실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메일러 오챈의 말에 그는 피식 웃으며 답했다.

“촌부이기에 직접 만난 것이오. 고위 관리를 만나는 것은 화제가 되지 않지만, 저런 촌부를 만난 것은 화제가 되거든.”

“이 일대가 전운으로 가득 찼습니다. 어느 세월에 한가한 소문이 퍼지겠습니까?”

“당장 소문이 나기를 바라고 한 일이 아니오. 느리게라도 좋소. 중요한 건 어떻게든 백성들의 지지를 얻는 것이니까.”

“시일이 많이 지체됐습니다. 적이 방비를 마쳤을 겁니다.”

“괜찮소.”

“어째서…….”

“키파를 함락시킬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게 그리 녹록지 않으리라는 것은 장군도 알고 있을 거요.”

“…….”

잔카라스 데반이 피로가 덕지덕지 묻어있는 얼굴을 손으로 천천히 쓸었다.

“어렵다고 해서 무리를 할 생각은 없소. 여차하면 대치만 하고 시간을 보내게 되겠지.”

“그렇다면…….”

“보급선만 유지된다면 그냥 대치만 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오. 그것을 위해서라도, 후방의 안정을 도모할 필요가 있었지.”

메일러 오챈은 그제야 이 젊은 무장이 무엇을 계산하고 있는지 알아차렸다.

“물론 한 번 부딪쳐보기도 전에 미적지근한 마음을 먹지는 않을 거요. 하지만 왠지, 내가 지금 말한 대로 흘러갈 것 같은 기분이 드오. 들려오는 소문의 반만 사실이라도…만만치 않을 것 같아.”

잠시 눈이라도 붙일 셈인지, 잔카라스 데반이 눈을 감았다. 그런 그를 향해 조용히 군례를 올린 메일러 오챈이 걸음소리를 죽인 채 막사를 나섰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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