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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719화 (719/1,064)

719화

“제게 장군의 앞잡이 노릇을 하라는 말씀이군요.”

“싫은가?”

“솔직히 말씀드리자면…그리 유쾌하지는 않습니다.”

비후스 자번은 절대 세상에 알려진 것 같은 겁쟁이가 아니었다. 겁쟁이였다면 감히 이런 말을 내뱉을 수 있었겠는가.

“어차피 지금도 상인회의 앞잡이 노릇을 하고 있지 않나.”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 것이 부끄럽군요.”

“조롱하려는 뜻은 아니었다. 단지, 달라질 것은 없다는 말을 하고 싶었을 뿐.”

“장군께서는 일을 마치면 떠날 분이라 하셨지요. 그 말씀을 믿어도 되겠습니까?”

“그래. 왜 아니겠나. 내 기반은 판니른에 있다.”

“키파는 누구나 탐을 내는 도시입니다.”

“난 아니다.”

군터는 강하게 윽박지른다면 비후스 자번을 굴복시킬 수 있음을 알았다. 하지만 그렇게 억지로 따르게 할 경우, 비후스 자번은 의욕적으로 일을 하지 않을 것이다. 즉, 최선을 다하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다.

군터에게 있어 키파의 문제를 다루는 것은 상당히 귀찮은 일이었다. 키파를 손 안에서 잘 굴린다면 막대한 이득을 얻을 수도 있겠지만, 별로 관심이 가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은 당면한 전투로 가득 차 있었다. 그에게는 이 귀찮은 일을 대신해 줄 조력자가 필요했다. 그리고 그의 생각에, 그 일에 가장 적합한 인사는 비후스 자번이었다.

‘네놈이라고 어찌 욕심이 없겠나.’

비후스 자번은 특출난 자가 아니다. 오히려 흔해 빠진 인사라 할 수 있다. 욕심을 가지고 있지만, 두려움도 동시에 가지고 있어 대담하게 치고 나가지 못한 채 현실에 순응하는 자다. 소심하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모험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마냥 겁쟁이라고 치부할 수는 없다.

적절한 기회가 주어진다면 이런 자들도 떨쳐 일어날 수 있다. 다만 비후스 자번은 아직까지 그런 기회를 만나지 못했을 뿐이다. 이제 그에게 기회가 주어졌음을 느끼게 한다면, 그는 오랫동안 묻어두었던 욕심이라는 놈을 꺼내어 볼 것이다.

“이런 날이 올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앞날을 내다보는 사람은 없지.”

“이것이 제게 주어진 기회라면, 잡아보겠습니다.”

비후스 자번의 얼굴에서 그늘이 걷혔다. 늘 조금씩 아래로 향해있던 눈도 똑바로 정면을 향했다.

* * *

“셀러셋 공이 칠드 공과 막역한 사이라는 것은 모르는 이가 없지요.”

“막역하다고? 우스운 말이군. 그저 거래가 잦았을 뿐이네.”

셀러셋이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저었으나 비후스 자번은 미소를 거두지 않았다.

“상인에게 속을 터놓을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할까요?”

“그럴 리가.”

“그렇기에 셀러셋 공은 이 도시에서 칠드 공과 가장 가까운 분인 겁니다. 서로 얽힌 게 많은 만큼, 서로에 대해서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가.”

“공과 제가 알고 지낸 시간이 얼마입니까. 서로 알 만큼 아는 사이에, 연기는 그쯤 하시지요.”

짜증으로 일관하던 셀러셋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나보고 칠드 공을 팔아넘기라는 말인가?”

“팔 수 있는 것은 다 판다. 그게 상인 아니겠습니까.”

“아하. 자네처럼 변한 상황에 적응하라는 말이로군. 맞나?”

“칠드 공에게 지켜야 할 의리라도 있습니까?”

“아니. 그럴 리가.”

“그런데 왜 그런 반응을 보이십니까? 솔직히 말씀드려서, 저는 공이 제 제안을 바로 받아들이실 줄 알았습니다.”

“날 너무 우습게 봤군.”

“제가 모르는 부분이 있다면 가르쳐주시지요.”

셀러셋이 피식 웃었다. 상황이 이런데도, 어쨌거나 자신에게 예의를 갖추는 비후스 자번이 우습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래. 이런 자였기에 시장으로 만든 것이었지.’

상인회의 뜻이었고, 칠드 공의 뜻이었으며, 셀러셀 그 자신의 뜻이었다. 그런데 그때의 그 결정이, 이렇게 비수가 되어 돌아올 줄이야.

‘아니. 아니지. 다른 자였다고 한들 달랐겠는가.’

비후스 자번이 주도적으로 일을 벌였다고 보기는 힘들다. 옆에 있는, 무관임이 틀림없는 자들을 보아하니 그 역시 휩쓸린 입장인 것 같았다. 단지 빠르게 순응하여 입장을 바꿨을 뿐.

‘군터. 군터 크렘보르.’

필시 이 일을 벌인 것은 그자다. 처음 군대를 이끌고 도시에 들어설 때부터 심상치 않은 작자임은 알아보았지만, 이렇게 막무가내로 나올 줄이야. 다른 것에 욕심을 내지 않는 전형적인 군인이라는 평이 잘못된 것이었을까? 아니면 군인으로서 충실하기 위해서 내부의 정리를 이렇게 파격적으로 진행한 것일까. 뭐가 됐든, 그가 일을 벌였다면 저항하기는 힘들다. 특히 이렇게 뒤통수를 맞고 시작하는 상황에서는.

“내가 시원하게 답해줄 수 없는 까닭은 그에게 지켜야 할 의리 같은 게 있어서가 아니야. 그대의 생각처럼 그자의, 밝혀져서는 안 되는 비밀을 여럿 쥐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 하지만 반대로 그 역시 내 비밀을 쥐고 있어. 그것도 내가 쥔 것보다 더 많이.”

돈을 버는 장사를 하다 보면 이런저런 구린 일에 발을 담그게 되기 마련이다. 특히 상인회라는 거대 조직을 이끌고, 남 눈치 볼 것 없이 행세하는 이들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이 도시에서는 그들의 뜻이 곧 법이나 마찬가지였으니, 대놓고 행하지 못했을 뿐이지 드러나지 않은 곳에서는 온갖 구린 일들을 자행했을 터. 비후스 자번 역시 익히 아는 사실이었다.

‘물론, 내가 아는 것보다 더 음습한 비밀들이 많겠지.’

비후스 자번은 상인회에서 내부인임과 동시에 외부인이었다. 그는 상인회가 내세운 그럴듯한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은 그에게 일부 비밀을 공유하여 그들의 일원인 것처럼 대우했으나, 그러면서도 정작 가장 중요한 비밀들은 절대 공유하지 않았다. 셀러셋 같은 자들이 보이는 태도는 둘째치고, 그 부분에서 비후스 자번은 진즉부터 자신이 진정한 모임의 일원이 될 수 없음을 알았었다.

“칠드 공은 그가 아는 비밀을 떠들어댈 수 없을 겁니다.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이 아닙니까?”

“그를 죽이겠다고?”

셀러셋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그에 비후스 자번은 미소를 더욱 진하게 머금었다.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지금은 전시입니다. 전시에는, 온갖 말도 안 되는 일들이 종종 일어나곤 하지요.”

“…….”

셀러셋이 입을 다물었다. 이제 그는 대놓고 얼굴에 감정을 드러냈다. 표정이 전체적으로 일그러진 채 미세하게 꿈틀거리는 것이,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비후스 자번은 고통스러워하는 그에게 약간의 도움을 주기로 했다.

“간단하게 생각하시지요. 후환은 후환일 뿐입니다. 나중에 일어날 일이라는 거지요. 하지만 지금 공이 현명한 결정을 내리지 못하시면, 공에게 나중은 없습니다.”

“하하. 그렇군. 만약 내가 여기서 고개를 저으면 저 검이 당장 내 목을 치겠지?”

“글쎄요. 공의 목뿐일까요.”

“협박을 잘하는군. 그대에게 이런 능력이 있을 줄은 몰랐어.”

“저도 몰랐습니다. 그래도 제 말이 공의 귀에 잘 들렸다면 다행이군요.”

“좋아. 내가 할 수 있는 답은 정해져 있군.”

“긍정적으로 생각하십시오. 공이 적극적으로 나서주실수록 일은 쉬워질 것이고, 공에게 닥쳐올 후환의 위험 역시 줄어들 겁니다.”

“일을 마친 다음에는 그대가 날 치지 않겠나?”

“제가요? 어째서 그리 생각하십니까?”

“내 입으로 이런 말을 하기는 뭐하지만, 우리 사이가 썩 좋지 않았지 않나.”

셀러셋이 눈을 가늘게 뜨고 이야기하자, 비후스 자번이 소리 내어 웃었다.

“하하. 그랬지요. 하지만 공. 제가 그렇게 어리석은 사람으로 보이십니까?”

“음?”

“어차피 공이나 저나 뒤가 없습니다. 칠드 공을 비롯한 모임의 힘은 대단하지요. 일을 최대한 깔끔하게 마무리 짓는다고 해도, 지울 수 있는 데는 한계가 있을 겁니다. 결국, 우리는 배신자로 불릴 겁니다. 손가락질을 당하겠지요.”

“그래서, 동지가 필요하다 이건가.”

“바로 그렇습니다.”

이 대목에서 셀러셋은 비후스 자번의 속셈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동시에 안도했다.

‘운이 따르는군.’

악운이라고 해도, 일단은 운이다. 비후스 자번의 첫 번째 방문(?)을 받은 덕에 이런 기회가 주어진 것이 아니겠나.

“이해되는군.”

“그렇다면…….”

“그대의 말처럼, 다른 선택지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일단 계획을 들어봐야 할 것 같은데.”

“물론이지요. 설명해드리겠습니다.”

* * *

단순했고, 과격했다.

셀러셋은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사실 비후스 자번이 그의 말을 끊으며 표정을 바꿨을 때부터 그랬지만, 그 후로도 계속 마찬가지였다.

“정말 이래도 되는 건가?”

“저도 모르겠습니다.”

얼떨떨한 것은 비후스 자번 역시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자신을 끌어들인 당사자가 그런 말을 하니 셀러셋은 어이가 없었지만, 그의 표정이 진지한 것을 보고는 말을 아꼈다.

“그대들이 할 일은 거의 다 끝났소. 남은 한 가지는, 우리가 마무리를 지은 후에 증인으로서 명분을 세워주는 것뿐이오.”

자신을 토어릭이라 소개한 무관은 그렇게 말하고 자리를 떠났다. 졸지에 덩그러니 남겨진 그들은 어색한 분위기를 해소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성공할 거라 보는가?”

“실패할 리가 없습니다. 여차하면 병사들을 대거 투입할 텐데요.”

“…그래. 그렇겠지.”

그들이 관청의 넓은 방에서 몸은 편하게, 마음은 불편하게 자리를 지키는 동안 바깥에서는 그들이 생각한 그대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 * *

“아악!”

막아서던 용병은 그대로 팔이 기이한 각도로 꺾여 땅을 뒹굴었다. 불청객을 향해 험상궂은 표정을 지으며 손을 뻗은 직후에 일어난 일이었다.

“말귀가 어두운 놈이군. 얌전히 누워있어라.”

손이 닿았던 어깨를 툭툭 털어낸 아드리안이 뒤에 대기하고 있는 병사들에게 턱짓으로 명령을 내렸다.

“들어가!”

“다른 놈은 필요 없다! 테네드를 잡아!”

족히 이백은 되는 병사들이 일제히 테네드, 일명 칠드 저택이라고 불리는 곳을 급습했다. 아직 새벽의 어둠이 걷히기도 전에 일어난 일이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급습에 테네드는 반응할 수 없었다. 그가 거느린 용병들은 비싼 돈을 주고 고용한, 나름대로 실력 있는 자들이었지만 할렌과 아드리안이 이끄는 병사들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할렌과 아드리안이 각자 한 방향씩을 맡아 밀고 들어오니 그들은 오래 버티지 못하고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이게 대체 무슨 짓인가!”

테네드는 침입자들의 정체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는 상인이었고, 눈썰미는 그가 자부심을 갖고 있는 재주 중 하나였다. 그는 군터 크렘보르가 키파에 당도했을 당시 보았던 할렌과 아드리안의 얼굴을 기억했다.

“크렘보르 장군은 전하의 명을 받아 이 도시를 수호하기 위해 오신 게 아니었소? 그런데 그 수하라는 작자들이 이런 짓을 벌여? 내가 이것을 어찌 받아들여야겠소?”

할렌은 이 상황에서도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는 테네드를 보며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상인회를 실질적으로 이끄는 자라더니, 과연 그만한 이유가 있어 보였다.

“전하와 이 도시를 통째로 팔아먹으려고 한 자가 그런 말을 하다니, 우습군.”

“뭐라?”

“상단원과 용병으로 위장해 적을 도시 안으로 끌어들였지. 본대가 저 평야에 들어설 즈음에 내응할 작정이었나?”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는군. 우리 가문이 이 도시에 뿌리를 내린 지 백 년이 넘었다. 이 도시는 우리의, 나의 자부심이야. 그런 곳을 팔아넘겨? 상단원과 용병으로 위장해 적을 끌어들였다고? 무슨 그런 헛소리를……!”

“당연히 그렇게 말하겠지. 허나 이미 증거가 명백하니, 그런 변명 따위는 소용없다.”

애써 냉정을 유지하던 테네드의 표정이 마침내 일그러졌다. 함정에 빠졌음을 직감한 듯했다.

“부질없는 저항은 관두는 편이 나을 거다.”

할렌이 피가 뚝뚝 떨어지는 칼을 늘어뜨린 채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갔다.

테네드는 이곳에서 죽는다. 본래 죄인을 벌할 때는 절차에 따라 행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이번은 예외였다. 그렇기에 할렌에게 내려진 명령도 테네드를 잡아 오라는 것이 아니라, 그의 목을 베라는 것이었다.

“누군가? 나를 팔아넘긴 자가.”

둘 사이의 거리가 몇 걸음 정도로 좁혀졌을 때, 테네드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인물이군.’

할렌은 내심 감탄했다. 이런 상황에 저렇게 침착한 것도 그렇고, 단숨에 사정을 파악하는 것도 놀라웠다. 도저히 일개 상인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기회가 주어졌다면, 어쩌면 더 큰 일을 했을지도 모르는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게 뭐가 중요하겠는가.

“알아서 뭐하겠소.”

“믿을지는 모르겠지만, 나와 상인회는 크렘보르 장군에게 협조하려고 했었네.”

“그대들의 존재 자체가 부담이었소.”

“어중간했던 건가. 고개 숙일 것이라면 차라리 납작 엎드려야 했었던 건가. 생각을 잘못했군. 하지만 그 대가가 너무 가혹해.”

테네드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할렌이 쥔, 아직도 피가 떨어지고 있는 칼을 흘깃 보고는 말을 이었다.

“죄목이 죄목인 만큼, 자비를 구하는 것은 힘들 것 같군. 맞나?”

“고통 없이 보내주겠소. 그대도, 그대의 식솔들도.”

“멀리 본다고 생각했지. 하지만 정작 발밑을 살피지 못했군.”

할렌이 칼을 들어올리자, 테네드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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