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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718화 (718/1,064)

718화

칠드라는 이름은 공식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세상 어딘가에는 칠드라는 이름을 쓰고 있는 자, 혹은 자들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어쨌거나 키파에서 ‘칠드 공’이라 불리는 그는, 공식적으로는 ‘칠드’ 공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 이름이 존재했던 것은 지금으로부터 150년도 더 된 옛날이었다. 이제는 기억하는 이조차 거의 없는, 옛 왕국이 이 땅을 다스리던 시절. 칠드는 그 왕국을 지탱하던 대귀족 가문 중 하나였다. 그들은 위대했고, 강력했으며, 온 나라 백성의 존경을 받았다. 고귀한 핏줄이라는 말이 전혀 어색하지 않았던 명문 귀족가였다.

하지만 제국과의 전쟁이, 정확히는 제국과 벌인 전쟁에서의 패배가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제국은 정복자로서 그들의 권리를 충실하게 행사했다. 그들에게 저항했던 자들의 씨를 말렸고, 칠드 가문 역시 그 대상 중 하나였다.

직계는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했다. 피가 옅은 방계 중 일부만이 운 좋게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으나, 그들은 제국의 삼엄한 감시가 걷힌 뒤에도 칠드의 피가 흐른다는 사실을 필사적으로 부인해야 했다.

조부 시절, 그리고 부친의 어린 시절까지는 그렇게 숨을 죽이고 살았다고 들었다. 솔직히 그로서는 별로 와닿지 않는 이야기였다. 그가 머리가 굵어졌을 무렵부터는 그에게 잘 보이고 싶어 안달이 난 자들이 주변에 셀 수 없을 만큼 많았고, 그중에는 제국 관리들도 적지 않았으니까.

그들은 이제 다 잊힌 이름을 잘도 들먹였다. 귀족 대우를 해주면서 잘 좀 봐달라고 시위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불과 백 년 전만 하더라도 감히 입에 담을 수조차 없었던 이름을, 그들은 고작 아부 한 마디를 위해 떠들어댔다.

듣기에 나쁘지는 않았다. 태어나기도 전의 과거에 대한 향수 때문은 당연히 아니고, 그저 귀족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다시 귀족이 될 수도 있겠지.’

그때 얻게 될 또 다른 이름이 칠드가 될지, 아니면 다른 것이 될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런 날이 온다면, 분명 기쁠 것이다.

‘황좌의 주인을 가르는 전쟁이 아닌가. 이런 시기에 운이 조금만 따라준다면…….’

마음이 살짝 들뜨려고 할 때마다 그는 신중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

같은 생각을 하는 자들이 한둘이 아닐 터. 여기서 마음만 앞세워 주제넘게 설치다가는 들어올 운도 빠져나가기 마련이다. 마음이 급할수록 행동은 느려야 한다.

“비후스는?”

“조용합니다. 폭풍이 지나갈 때까지 있는 듯 없는 듯 숨죽일 모양입니다.”

옅은 조롱기가 섞인 목소리에 그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내가 물은 것은 그자의 동태이니, 있는 그대로만 보고하고 사견은 섞지 마라.”

“죄송합니다. 용서를.”

오랜 세월 그와 그의 아버지를 섬겼던 집사가 세상을 떠났다. 하여 그 아들을, 역시 대를 이어 집사에 임명했건만 일 처리는 물론이고 여러 면에서 아비만 못하다. 아직 경험이 부족해서 그럴 것이라 생각하지만, 하여간 여러모로 아쉬웠다.

“송구하지만, 한가지 여쭈어도 될지요.”

“무엇이 궁금하던가.”

“무엇을 우려하십니까?”

“…….”

“저는 가주께서 그 변변찮은 자를 계속 신경 쓰시는 까닭을 모르겠습니다.”

아무것도 궁금해하지 않고 그저 시키는 대로만 하는 자도 괜찮기는 하지만, 이런 것도 나쁘지는 않다. 모르는 것을 그냥 모르는 채로 두다가 주인의 뜻을 잘못, 혹은 제멋대로 헤아려서 일을 그르치는 얼간이들보다는 말이다.

“너는 그자를 안다고 확신하느냐?”

“예?”

“나는 확신하지 못한다. 그것이 이유다.”

“…….”

“비후스 자번은 이 도시의 시장이다. 그가 얼간이건 아니건 간에 말이다. 그는 시장으로서 많은 일을 할 수 있지. 나는 그를 알지 못하고, 믿을 수 없다. 그것이 내가 그를 항시 주시하는 이유다.”

생각이 얼굴에 드러나는 것은 장점임과 동시에 단점이다. 납득 못하겠다는 표정이지만, 그는 굳이 설명을 덧붙여서 이해시켜줄 생각은 없었다. 알려고 하면 알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모르는 채로 넘어가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고개를 돌렸는데, 밖에서 하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주님. 시장이 셀러셋 공의 저택으로 향했습니다.”

“…그래?”

“예. 하옵고, 그를 안내하던 하인은 셀러셋 공의 하인이었습니다.”

거기까지만 들어도 어찌 된 영문인지 짐작하고도 남았다. 셀러셋은 이번에 군상 관련 건으로 크게 체면을 구겼다. 그런데 문제는, 단순히 체면만 구겨진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욕심대로 받아먹었겠지.’

셀러셋은 키파에서 손꼽히는 거상이지만, 그렇다고 해도 모든 일을 제 맘대로 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특히, 그는 그를 따르는 이들에게 받는 만큼 베풀어야 하는 책무가 있다. 필시 군상 건으로도 과할 정도의 성의를 받았을 테니, 마땅히 그에 걸맞은 선물로 돌려줘야 했을 터. 그런데 그 일이 이유야 어쨌건 꼬여버렸으니,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물론 어쩔 수 없었다고 둘러대려면 그럴 수는 있겠지만, 그러면 그의 체면이 크게 손상되는 것을 피할 수 없을 테니…….

‘보여주겠다는 거겠지.’

시장을 불러다 질책이라도 할 생각일 것이다. 어쩌면 그 자리에는 당사자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들이 보는 앞에서 시장을 질책함으로써 자신의 체면을 지키려는 얄팍한 속셈일지도.

시장인 비후스 자번에게는 그리 기쁘지 않은 일일 테지만, 이런 일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애초에 이런저런 일들을 위해서 그를 시장으로 삼은 것이기도 하고.

“언제쯤 나오는지 확인하도록.”

“예.”

* * *

셀러셋은 방에 들어서는 비후스 자번을 못마땅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여느 때였다면 마중을 나갔을 것이다.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아니, 사실은 우습게 보는 자이기는 했지만 어쨌거나 이 도시의 시장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지금, 그는 화가 난 상태였다. 정확히는 화가 난 상태여야 했다. 이 자리에 동석한 이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말이다.

“이 사람이 왜 시장을 찾았는지는 알고 계시겠지?”

“…예. 알고 있습니다.”

비후스 자번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거짓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이곳에 불려온 이유를 알고 있었다. 셀러셋이 미리 사람까지 보내서 말을 전했으니 모를 리가 없었다.

이것은, 말하자면 짜고 치는 판이었다. 일전의 회합에서 이미 유감을 표명했고,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음도 확인했으니 그걸 가지고 비후스 자번에게 화풀이를 하는 것도 우스운 일. 하지만 그건 그것이고, 풀어야 할 다른 문제가 남아있었으니 이런 우스운 연극을 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내가 분명 시장에게 언질을 주지 않았었던가?”

“그러셨지요. 허나…….”

“어쩔 수 없었다는 둥, 최선을 다했다는 둥, 구차한 변명을 꺼내놓을 생각이거든 집어치우시오. 이 사람은 그런 말이나 듣자고 이렇게 시간을 낸 것이 아니니.”

체면.

체면이라는 게 무엇일까?

비후스 자번은 문득 궁금해졌다.

양쪽 자리에 앉아있는, 탐욕스러워 보이는 배불뚝이들은 알고 있을까?

이미 다 끝난 일을 가지고 이렇게 밤중에 불려와서 지저분한 꼴을 보고 있는 이유는, 오직 저 셀러셋의 체면을 살리기 위함이었다.

이런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셀러셋은 받아먹은 것이 있으니 어차피 저들이 손해 본 것에 대해서는 다른 방식으로 보상했거나, 할 계획일 것이다. 그런데도 이렇게 바쁜 사람을 불러서 되지도 않는 모욕을 주는 까닭은 뭘까.

‘뭘. 사실은 알고 있지 않은가.’

이해하려고 하면 안 된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셀러셋이라는 인간은 본래 저런 인간이다.

“입이 있으면 말을 해보시오. 내 말을 귓등으로 듣지 않았다면 대체…….”

어디 이 자뿐일까. 귀족이라는 신분 때문에, 다루기 쉬울 것 같다는 것 때문에 시장 자리에 앉혀놓은 자들이다. 물건을 쓰임새에 맞게 쓰듯, 저들도 자신이라는 사람을 쓰임새에 맞게 쓸 뿐이다.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이제껏 저들이 휘두르는 대로, 취급하는 대로 순응하며 살아왔던 것이고.

하지만.

“…지긋지긋하군요.”

“그러니… 뭐라?”

셀러셋의 표정이 급변했다. 꾸며낸 화가 아니라, 진짜 화가 그의 얼굴에 번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잘못 들은 것인가 의심하며 귀에 손을 가져가던 그였지만, 동석한 두 배불뚝이의 표정이 변한 것을 보고는 잘못들은 게 아님을 알아차렸는지 순식간에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해졌다.

“솔직히 별 욕심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운명이려니 하고 최대한 융통성 있게, 흐르는 대로 밀려가면서 살아왔지요.”

“시장. 정신이 나간 게요?”

얼굴은 화가 났는데, 목소리에는 당황이 묻어난다. 아마 지금 이게 꿈인가 싶을 것이다.

이해한다. 이런 순간이 오리라고는, 비후스 자번 그 자신도 예상치 못했으니까.

하지만 예상은 못했어도, 가끔 꿈은 꿨었다.

“당신들이 나를 이용했듯, 나 역시 당신들을 이용했던 거지요. 그러니 유감은 없습니다. 물론, 당신을 비롯한 몇몇 수준 이하의 인간들이 얼토당토않은 이유로 모욕을 줄 때는 조금 화가 나기도 했지만……. 그건 다 지난 일이니 굳이 언급하지 않기로 하지요.”

“시장!”

셀러셋이 더는 참지 못하고 언성을 높였다. 성미가 급한 그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지 않은 것만 해도 인내심을 발휘했다고 볼 수 있으리라.

“다시 말하지만, 유감은 없습니다. 그저 상황이 바뀌었을 뿐이지요.”

“상황이…바뀌었다고?”

“예. 상황이 바뀌었으니, 저 같은 사람은 그에 맞춰 움직이는 수밖에요.”

이제는 셀러셋도 노기에 휘말리는 대신 이 상황을 이해해보려고 열심히 노력하는 듯했다. 보는 재미가 있을 정도로 계속해서 변하는 표정이 그 증거였다.

그러나 그가 상황을 다 파악하기도 전에, 바깥에서 소란이 일었다.

“으악!”

쇠가 부딪치는 소리. 그리고 비명. 그 소리를 들은 셀러셋은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났다.

“무슨 일이냐!”

그가 크게 외쳤으나,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문밖을 지키고 있어야 할 하인들이 곧바로 답하지 않았다는 것은, 바깥에서 그가 짐작하고 있는 것보다 더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음을 의미했다.

셀러셋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의 시선이 비후스 자번의 태연한 얼굴에 닿은 순간, 닫혀있던 문이 벌컥 열렸다. 그리고 몸에 피를 묻힌 사내 세 명이 들어섰다.

“비싼 돈을 주고 고용한 놈들이라기에 기대했건만, 별거 없군.”

“용병이라는 자들이 그렇습니다. 대개 양아치 짓을 하던 놈들이거나, 조금 더 나아가면 도적질을 하다가 굴러들어온 놈들이 대부분이지요.”

가장 먼저 들어온 자가 비후스 자번과 이야기를 나눴다.

그것으로 확실해졌다. 이 사단은 모두 비후스 자번과 관련이 있었다.

“이게 어찌 된 일인지…설명이 필요할 것 같은데.”

최대한 목소리의 떨림을 숨기는 것만이 셀러셋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상황이 바뀌었다고.”

싱긋 웃는 비후스 자번의 얼굴이, 처음으로 두렵게 느껴졌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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