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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717화 (717/1,064)

717화

“장군. 어찌 생각하시오?”

“어찌 생각하냐니…무엇을 말입니까?”

한 명은 태연했고, 한 명은 애써 아닌 척하지만 그럼에도 위축되었다는 것을 빤히 알 수 있었다.

“키파에 군터 크렘보르라는 자가 왔다고 하오. 무려 2만이 훌쩍 넘는 대군을 거느리고 말이지.”

“모르는 자입니다.”

“음. 장군이 모르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오. 듣자 하니 그자는 저 동쪽의 판니른에서 왔다더군. 그 먼 곳에서 여기까지 뭘 하겠다고 기어왔는지…….”

“…….”

“아쉽지는 않소?”

“무엇이 말입니까?”

“그 크렘보르라는 작자가 조금만 더 빨리 군대를 이끌고 왔더라면 장군이 그리 쉽게 항복하지 않아도 됐을지 모르는 일 아니겠소.”

“어차피 콴러드는 버리는 패였습니다. 키파를 중심으로 방어선을 새로 구축하는 동안 이 사람과 병사들이 죽어가면서 시간이나 벌기를 바랐겠지요.”

“과연 냉정하고, 현명하시군. 그 현명함이 장군 본인과 장군 휘하 병사들의 목숨을 구했소.”

“불명예와 오명을 피할 수 없음을 압니다. 하지만, 그래도 선택에 후회는 없습니다.”

“괘념치 마시오. 머리가 텅텅 빈 작자들이나 장군을 비난하겠지. 그자들은 가장 중요한 것을 가장 하찮게 여기는 얼간이들이니, 장군은 그들을 신경 쓸 필요가 없소.”

“감사한 말씀입니다.”

계속 웃음기를 머금고 있던 사내가 표정을 바꿨다. 그는 진지한 얼굴로 다시 입을 열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야. 이건 내 진심이오. 난 목숨을 쉽게 여기는 자들을 경멸하지. 그런 자들은 전장에 나와 병사들을 이끌 자격이 없소. 목숨으로 노름이나 벌이는 작자들이지. 그런 자들은 전장이 아니라 투기장에나 가라고 하시오.”

위축된 기색이던 사내가 표정이 조금이나마 풀어졌다. 어설프게 달래려고 하는 말이 아님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 크렘보르라는 자도 장군처럼 현명한 자였으면 좋겠는데…그건 너무 무리한 바람이겠지.”

“저들은 키파에서 작정하고 버틸 것입니다. 믿을만한 자를 보냈겠지요.”

“그래. 그럴 것이오. 아무래도 쉽게 갈 수는 없을 것 같아.”

그가 안타깝다는 듯 혀를 찼다.

* * *

“그냥 함락당한 것이 아니라, 아예 그냥 깔끔하게 항복해버린 것이었군요.”

기가 찬다는 듯, 할렌이 혀를 찼다.

달갑지 않은 소식이 날아든 것은 바로 조금 전이었다. 콴러드를 지키던 장수, 메일러 오챈이 적군에 합류했다는.

“휘하 병사들까지 죄다 설득해서 넘어가다니. 처음부터 항복할 생각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비극적인 것은 그 하나만이 아니었다. 불행하게도, 그 변절자는 꽤 인망이 있는 자였던 모양이다. 그가 휘하 병사들과 함께 항복했다는 소식이 전해지기 무섭게 키파의 관리들이 크게 낙담하는 모습이 여기저기서 보였다. 아직은 틀어막고 있지만, 소식이 퍼지기 시작하면 병사들이나 시민들까지 동요할 것이 분명해 보였다. 문제는, 그렇게 될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막을 방도가 없다는 것이다.

“그나마 다행이지 않습니까. 우리 병사들은 상관없을 테니까요.”

아드리안이 말했다.

“모를 일입니다. 우리 병사라고는 해도, 모두가 정신무장이 잘 되어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분위기라는 것이 본래 그렇지 않습니까. 한번 휩쓸리면 밑도 끝도 없습니다.”

아드리안의 말도 일리가 있었고, 곧바로 이어진 토어릭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적의 군세는 4만. 확실히 대군입니다만, 적극적으로 맞서지 않고 단지 성벽에 의존해 막고자 한다면 그리 어려울 것은 없어 보입니다.”

“두고 보지.”

4만. 정확히는 4만 이상이지만, 오차가 있다고 해도 그 언저리일 것이다. 수적으로는 그리 부담스럽지 않았다. 솔직히, 지금 거느린 병사들만 데리고 야전으로 맞붙는다 해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있다고 해서 굳이 유리한 위치를 버리고 나설 필요는 없으니, 일단은 기다려볼 생각이었다.

대략적인 수 외에 적에 대해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반면에 저쪽은 변절자가 더해졌으니 그가 열심히 입을 나불대고 있을 터. 물론 그가 아는 것은 2만 5천의 군대가 당도하기 전의 키파겠지만…….

“도시의 구조파악은 다 됐나?”

“아직인 것 같습니다.”

“같습니다?”

군터의 시선이 향하자, 할렌은 변명하듯 빠르게 말을 이었다.

“역사가 깊은 도시인 데다, 오래전에 뿌리를 내린 귀족과 상인들이 많습니다. 그들의 저택에 비밀 통로 하나가 없으리라 보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까지 손을 쓰는 것은 아무래도 어려운 일이기에…….”

그들이 지닌 힘을 안다. 그래서 그들을 존중해야, 아니 존중하는 척이라도 해야 함도 알지만 이제 슬슬 인내심에 한계가 찾아오고 있었다.

아무리 철저하게 준비하려고 해도, 결국 지금처럼 어떤 식으로든 그들과 엮여서 난처한 상황이 벌어진다.

“배신자가 또 있을 가능성도 있는 것 아닌가?”

순간 침묵이 흘렀다. 참관하는 내내 말이 없던 시장, 비후스 자번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목이 타는 듯, 탁자 위에 놓인 잔을 찾는 그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이 도시의 귀족이나, 상인 중에서 말입니까?”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시장님의 생각은 어떠신지?”

할렌의 눈초리가 날카로워졌다. 토어릭은 얼마 안 되는 물을 몇 모금에 걸쳐 마시고 있던 비후스 자번에게 시선을 던졌다.

“으음. 가능성이 없다…라고는 말씀드리지 못할 것 같습니다. 실제로, 메일러 오챈의 배신 역시 전혀 상상치 못한 일이었으니까요. 허나.”

비후스 자번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군터와 시선을 마주친 그가 한층 더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이 도시에 영향력이 큰 상인들은 다들 잃을 게 많은 자들입니다. 그런 만큼 그들은 매사에 신중하지요. 그들은 모험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모험의 끝에 얻을 수 있는 것이 크다고 해도 말인가?”

“아무리 대가가 크다 한들, 끝까지 가야 얻을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끝까지 갈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이상, 그들은 위험을 감수하지 않을 겁니다.”

“그들을 대변하는 건가?”

“아닙니다. 그저…제가 본 그대로를 말씀드린 것입니다.”

비후스 자번은 보기 안쓰러울 정도로 위축되어 있었다. 군터의 시선이 그에게 더 오래 머물수록, 그의 어깨에 올라간 보이지 않는 돌덩이도 더욱 무거워졌다.

한동안 가만히 비후스 자번을 바라보던 군터가 조용히 시선을 거뒀다.

“믿어보도록 하지. 하지만 용병들에 대해서는 양보할 수 없다.”

사실 과하게 힘을 가진 상인들보다도 더 거슬리는 것은 이 도시에 넘쳐나는 용병들이었다. 이제 곧 대전투가 벌어질지도 모르는데 아군인지 적군이지도 알 수 없는 무장 세력이, 비록 단일 세력은 아니라고 하지만 도시를 아무렇지 않게 활보하고 다닌다는 것은 군을 이끄는 입장에서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찌 처리하실 생각이십니까?”

“그들은 모두 떠나야 한다. 아니면 전투가 다 끝날 때까지 연금되어 있던가.”

“…받아들일 리 만무합니다. 차라리 그들을 고용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상상을 초월한 말에 입을 떡 벌리고 있던 비후스 자번은 바로 이어진 토어릭의 말을 듣고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바로 알 수 있다. 저게 가장 합리적인 안이라는 것을.

“믿을 수 없는 전력을 전투에 투입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막무가내 장군은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을 듯했다. 그에 참다 못한 비후스 자번이 입을 열었다.

“혹, 장군께서는 귀족과 상인들이 거느린 사병들까지…….”

“예외는 없다.”

할 수만 있다면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었다. 아니면 고함이라도. 물론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 상황은 그만큼 끔찍하기 그지없었다.

‘이 일을 어찌한단 말인가.’

비후스 자번은 이 무지막지한 장군과 상인회 사이에 끼어서 옴짝달싹 못 하는 자신의 처지가 답답하게 느껴졌다.

‘그들은…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돈과 사병. 그들이 가진 힘의 근원이었다. 그중 하나를 내놓으라 한다면, 아무리 상대가 수만 병력을 거느린 장군이라도…….

“반발하겠지.”

“예?”

“반발하지 않겠나? 그들이 거느린 사병을, 잠시라고는 해도 내려놓으라고 한다면 말이야.”

“…필시 그럴 것입니다.”

뭔가에 홀리기라도 한 것 같았다. 비후스 자번은 이번엔 그에게 향한 시선에 주눅 들지 않았다. 그저 호기심을 안은 채, 이어질 말을 가만히 기다렸다.

“솔직히 말하지. 나는 그 상인회니 뭐니 하는 것들이 거슬린다. 마음 같아서는 전투가 일어나기 전에 깔끔하게 치워버리고 싶어.”

“그런 말씀을…왜 제게?”

“그대가 나를 도와주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예?”

“허수아비라고들 하더군. 그대 스스로도 알고 있겠지. 하지만 만족스럽지는 않아. 지금의 비루한 처지에서 벗어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저는 장군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도통…….”

“나는 지금 당장이라도 그 상인회라는 것들을 모조리 쓸어버릴 수 있다. 실패할 리 없는 모험 아닌가. 더 이상 모험이 모험이 아닌 게지. 아무리 신중한 장사꾼이라도 손을 뻗기만 하면 얻을 수 있는 과실을 마다하지는 않을 것 아닌가.”

* * *

알고 있었다. 처음부터 알았던 것은 아니지만, 군터는 이 비후스 자번이라는 자를 볼 때마다 묘한 위화감을 느꼈었다. 처음에는 그게 무엇인지 몰랐지만, 그와 대면하며 말을 섞을수록 그 느낌을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이 녀석, 가면을 쓰고 있다.’

그 가면이 아주 정교해서 알아보는 데 시간이 걸렸다.

이 사내는 분명 상인회의 허수아비다. 하지만 겁쟁이는 아니었다. 소심하지도 않았다. 단지 그렇게 보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을 뿐.

‘저 연기가 먹혔기 때문에 시장이라는 자리를 거머쥘 수 있었겠지.’

허수아비라고는 하지만 어쨌든 공식적으로는 한 도시의 최고 지위다. 그런 자리에 아무나 올라갈 수는 없었을 터.

“확실히 하지. 나는 떠날 사람이다. 전쟁이 끝나면, 아니 그전에라도 언제든 떠날 수 있지. 그러면 그 뒤는 남은 자들의 몫이야.”

“…….”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고는 않겠지?”

비후스 자번은 말이 없었다. 푹 숙인 고개를 통해 그가 열심히 고민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언뜻 보이는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다. 무슨 말만 하면 땀을 줄줄 흘려대던 모습은 이제 찾아볼 수 없었다.

그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그는 쓴웃음을 짓고 있었다.

“저를 곤란하게 만드시는군요.”

“마음을 정했나?”

“저는 본래 욕심이 없었습니다. 영락한 가문에서 태어나, 할 수 있는 것만 하면서 살아왔지요.”

“크기의 차이일 뿐, 욕심은 누구나 가지고 있다.”

“옳은 말씀입니다.”

“눈앞에 주인 없는 금덩이가 떨어져 있다면, 누구라도 손을 뻗지 않겠나.”

“지금 제 앞에 있는 것이 금덩이입니까?”

“아닌 것 같은가?”

“모르겠습니다. 금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군요.”

“금이다.”

군터의 단호한 목소리가 명쾌하게 단정 짓자, 비후스 자번의 입가에 걸린 쓴웃음이 진해졌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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