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6화
“콴러드의 소식이 끊겼습니다.”
“함락됐다고 봐야겠군.”
“그…아마도 그렇겠지요.”
시장의 안색이 썩 좋지 않았다. 살짝 창백하게 질린 것 같기도 했다. 점점 다가오는 전장의 공기를 느낀 것일까. 그럴 리는 없겠지만, 보름 전에 처음 봤을 때보다 살이 조금 빠진 것 같기도 했다.
“적침을 보고할 새도 없이 무너졌다고 봐도 되겠나?”
“콴러드에는 이천의 상주 병력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전령을 보낼 새도 없이 무너졌다는 것은…….”
“새삼스럽군. 적의 대군이 치고 들어올 것이라는 건 이미 예상한 바가 아닌가. 그 때문에 내가 여기에 온 것이고.”
“예. 그렇지요. 장군의 말씀이 옳습니다.”
보면 볼수록, 이 시장이라는 자는 한 도시를 다스리는 시장이라고 하기에는 과할 정도로 심약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인회라는 것들이 세운 대표라더니, 정말 자신들 뜻대로 움직일 수 있는 꼭두각시를 앉혀 놓은 것일까? 무언가를 지시할 때 귀찮게 토를 달지 않는 점은 마음에 들지만, 이렇게 얼간이 같은 모습을 보일 때면 괜시리 짜증이 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마음을 드러냈다가는 안 그래도 창백한 얼굴에 완전히 핏기가 가셔버릴까 싶어 군터는 짜증을 가라앉히며 그를 내보냈다.
“저런 놈이 이 커다란 도시를 다스려왔다니, 우습군.”
“저자가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음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토어릭이 웃는 투로 말했다.
“하지만 심약한 자일지는 몰라도, 나름대로 처신을 할 줄 아는 자입니다. 자신의 가치를 정확히 파악하고, 힘 있는 자들 사이에서 몸값을 올려 결국 허수아비일지라도 시장 자리를 차지하지 않았습니까? 저자를 조금 더 눈여겨보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그렇다 한들, 저런 놈이 무슨 쓸모가 있겠느냐.”
“용맹한 자는 용맹한 자대로, 겁쟁이는 겁쟁이대로 쓸 구석이 있지 않겠습니까?”
“야스메티 같은 말을 하는구나.”
“야스메티 공에게 많이 배웠습니다.”
“그래. 그 녀석이 살아있을 때 너와 꽤 많이 어울렸었지.”
문득 야스메티가 떠올랐다. 만약 그가 살아있고, 이 자리에 있었다면 토어릭과 비슷한 말을 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허락을 했으니, 그래. 좋을 대로 해라.”
“예.”
토어릭이 군터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군터와의 접견을 끝내고 관청을 나선 시장은 모종의 장소로 향했다.
키파에서 손꼽히는 규모의 대저택. 시장은 하인들의 안내를 받으며 화려한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의 표정은 썩 밝지 않았으나 발걸음은 자연스러웠다. 이곳에 들어서는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과장 좀 보태서 눈을 가리더라도 찾아갈 수 있는 수준이었다.
“오셨소.”
지금은 아니지만, 불과 보름 전까지만 해도 이 도시에서 가장 높은 지위였던 그다. 그런 그를 이렇게 편히 부르는 이가 있을 수 있을까 싶지만, 반 존대를 듣는 그의 안색은 평온했다. 이곳을 찾는 것이 익숙하듯, 이런 투의 말을 듣는 것도 역시 익숙했다.
“크렘보르 장군과 접견을 마치고 왔습니다.”
“들어 알고 있소이다. 그래. 무슨 이야기를 나누셨소? 아, 일단 앉으시고.”
커다란 방 안에는 역시 커다란 원탁이 하나 놓여 있었다. 그 원탁에 빙 둘러앉은 이들이 열 명이 조금 넘었는데, 빈자리가 서너 개 정도 있었다. 시장은 그중 하나에 가서 앉았다.
“콴러드의 소식이 끊겼습니다. 크렘보르 장군은 콴러드가 소식을 전할 틈도 없이 무너졌을 거라 보더군요.”
“타당한 추측이지.”
“콴러드에는 꽤 많은 병력이 상주하고 있지 않았던가? 소식을 전할 틈도 없이 순식간에 무너졌다면…….”
“대병력이 움직인 건가?”
“설마 쥬드 포트락이 직접 움직인 것인가?”
“바라눔 트라소프 황자일 수도 있소. 듣자 하니 그는 중요한 전장이란 전장은 직접 찾아다닌다더군.”
소란이 일었다.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는 자, 불안감을 드러내는 자, 이런저런 추측을 중얼거리는 자. 면면이 다양한 만큼 그들이 내는 목소리도 다양했다.
그 소란 속에서, 시장은 입을 다문 채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마치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는 듯.
그런데 그런 그를 눈여겨보던 자가 있었다. 처음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던 중년인이었다. 무던한 인상이나 깊은 눈빛이 인상적인 그는 시장과 마찬가지로 소란 속에서 침묵을 지키고 있었는데, 하인이 내준 차를 막 받아 들던 차에 시장과 그의 시선이 마주쳤다.
“자번 공. 너무 조용하시군.”
시장, 비후스 자번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할 말이 없습니다. 제가 아는 것은 여러분께서도 다 알고 계실 터인데, 부족한 식견을 드러내어 창피를 살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겸손하시군. 시장의 자리에 있으면서 보고 듣는 것이 어찌 우리가 보고 듣는 것만 못하겠소.”
“겸손이 아니라 사실을 말씀드렸을 뿐입니다. 제 눈이 곧 여러분의 눈이고, 제 귀가 곧 여러분의 귀인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
비후스 자번이 연신 고개를 젓자 옆자리에서 듣고만 있던 이가 웃으며 끼어들었다.
“맞는 말이지 않소. 칠드 공께서는 어찌 자번 공을 곤란하게 만드십니까?”
“하하. 곤란하게 만들려는 것이 아니라, 시장의 의견을 한번 듣고 싶었을 뿐이오. 같은 것을 보고 듣더라도 생각하는 바는 다를 수 있으니까 말이지.”
칠드 공이라 불린 자가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우고 다시 입을 열었다.
“뭐…그건 그렇고, 어떻더이까? 크렘보르 장군을 가까이서 보지 않았소.”
“소문 그대로입니다.”
“소문대로라 함은?”
“정치 감각이라고는 전혀 없는 전형적인 군인이라는 말이지요. 그나마 그 수하 중에 융통성이 있는 자가 있어서 답답한 상황은 일어나지 않고 있습니다만…앞으로도 그럴지는 모르겠습니다.”
“음. 그건 확실히 걱정스러운 부분이군. 전투가 다가올수록 분명 더 신경이 날카로워질 테니.”
“그건 곤란하지 않습니까? 지금도 통행금지령 때문에 민원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맞습니다. 검문도 까다로워져서 다들 불만이 많습니다.”
“그러고 보니 자번 공. 먼젓번에 말씀드린 것은 어떻게 됐습니까?”
칠드 공이라 불린 이가 시위를 당기기라도 한 것처럼, 여기저기서 비후스 자번에게 질문이 날아들었다. 개중에는 질문이 아니라 따지는 것 같이 공격적인 말들도 섞여 있었다. 비후스 자번은 땀을 흘리면서도 나긋나긋한 말투로 그들의 말에 하나하나 답했다.
하지만 마지막에 누군가 빈정거리듯 던진 말에는 그도 순간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자번 공. 이번에 있었던 군납 건 말입니다. 이 사람이 그렇게 부탁을 드렸건만…어찌 된 일입니까?”
비후스 자번이 혀로 입술을 핥았다. 나긋나긋하던 그의 목소리가 줄어들었다.
“그것이…크렘보르 장군 휘하에 토어릭이라는 장교가 있는데, 그자가 그 일을 전담했었지요. 그런데, 그자가 조금 까다롭게 나왔던 것 같습니다.”
사실 비후스 자번도 할 말이 많았다. 지금 그에게 따지듯 말을 건 자가 추천했던 인사들은 욕심을 과하게 부렸다. 그자들 입장에서야 이제껏 해온 대로 했던 것일지 몰라도, 이번에는 상대가 달랐다. 그들은 그것을 고려해야 했다. 그들이 이번에 맞닥뜨린 상대는 외지에서 오지 않았나. 그들이 키파의 관례를 이해해주리라는 안일한 생각은 버렸어야 했다.
“거래를 하다 보면 의견 차이가 나는 것은 흔한 일이오. 내가 자번 공께 부탁드린 것은 바로 그 점 때문이었소. 문제가 생기더라도 그대가 나서서 잘 어루만져주기를 바랐던 것이지. 그런데 이번 일은…솔직히 실망스럽소이다.”
“…….”
어느새 실내가 조용해졌다. 원탁에 둘러앉은 이들의 시선은 자번과, 그를 타박하는 사내를 조용히 오갔다. 그들 모두 입을 다문 채 이 상황을 흥미진진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제가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송구스러울 뿐입니다.”
비후스 자번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그런 그의 반응이 만족스러웠는지, 타박하던 사내가 굳은 표정을 슬쩍 풀었다.
“뭐, 이미 지난 일을 어떻게 하겠소. 여기서 내가 자번 공에게 더 뭐라 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지. 그런데, 이번 거래를 타간 녀석들은…….”
“욕심을 좀 냈던 모양입니다. 물론 그들도 명분은 있었습니다. 그들이 군납 건을 신청한 것이 아니라, 아까 말씀드린 그 토어릭이라는 자가 그들을 직접 불렀다더군요. 그가 군납 건을 이야기하면서 가격 경쟁을 붙였던 모양입니다. 그들은 이번 건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알았다면 처음부터 발을 뺐을 거라고 하더군요.”
“흥! 당연히 말은 그렇게 하겠지.”
코웃음을 치기는 했지만, 사내 역시 그들의 말이 사실일 거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이번 군납 건에 대한 정보를 철저히 비밀로 했던 것이 바로 그였기 때문이다. 일감을 몰아주기 위해서 취한 조치였는데, 그게 이렇게 돌아올 줄은 미처 예상치 못했었다.
“아무튼 곤란하게 됐군. 이 일로 내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됐소.”
“그 점에 대해서는 다시 한번…….”
“아아. 됐소. 됐어. 예상치 못했던 일이고, 내 부주의도 한몫했으니 더 이상 자번 공의 탓은 하지 않으리다.”
사내가 선심 쓴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그것으로 어색해졌던 분위기가 다시 풀렸다. 그러자 사내와 비후스 자번에게 번갈아 눈길을 주던, 칠드 공이라 불린 중년 사내가 입을 열었다.
“다들 들어서 아시겠지만, 크렘보르 장군은 지금 다가올 전투 때문에 잔뜩 예민해져 있는 상태인 것 같소. 그가 지금 가장 신경 쓰는 것은 군에서 쓰일 물자들이겠지.”
그의 시선을 받은 비후스 자번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보탰다.
“맞습니다. 병장기부터 시작해서 군량까지, 그는 아직도 한참 부족하다고 여기는 것 같았습니다.”
“들은 대로요. 그는 외지인이라 이곳의 관례를 알지 못하오. 추측이지만, 이해하려는 노력도 하지 않을 것 같소. 그에게 우리의 방식을 강요하려고 했다가는 어떤 반응이 돌아올지 모르니, 조심스럽게 다가가는 것이 옳을 듯싶소.”
“조금 더 자세하게 말씀해주시지요.”
“군납에 관해서는 양보를 해주자는 뜻이오. 대신 우리는 다른 곳에서 이득을 취하면 되겠지.”
“예를 들자면?”
“지금 시행되고 있는 삼엄한 검문이라든지 이른 오후부터의 통행금지령 같은 것들. 그리고 조용히 진행되는 거래 같은 것들에 대한 이해를 얻으면 되지 않겠소?”
“그걸 이득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들이야 본래부터…….”
“세상이 바뀌었지 않소?”
퉁명스럽게 대꾸하던 자가 입을 다물었다. 칠드 공이라 불린 사내가 그를 지그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당연한 것은 아무것도 없소. 이제껏 그래왔다고 앞으로도 그러리라 생각한다면, 그건 낙관적인 것을 넘어 어리석은 것이오. 세상은 시시각각 변하니, 우리가 계속해서 번영하고자 한다면 바뀌는 세상에 끊임없이 적응해야 하오.”
그의 시선이 원탁을 천천히 한 바퀴 돌았다.
“이 사람이 여러분들에게 건방진 한소리를 했으나, 부디 너그러운 마음으로 귀 기울여주시기 바랍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