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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715화 (715/1,064)

715화

“이제부터 이 도시는 적포장군이신 군터 크렘보르 공의 통치하에 놓인다.”

“이전과 달라질 것은 없다. 키파의 시민들은 이제껏 그래왔듯 모두 충실히 생업에 종사하도록.”

소란은 없었다. 관문 도시인 키파는 행상인들이 많이 오가는 만큼 거주하는 시민들도 외지의 사정에 대해 밝은 편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외지의 군대가 들어서기 전부터 그들이 올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 시기가 조금 빠른 것에 놀랐을 뿐, 당황하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당황하지는 않았다고 한들, 심정적으로 흔들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2만이 훌쩍 넘는 병사들이 대낮에 성문으로 들어섰으니 시민들도 그것을 똑똑히 보았다.

물론 그들도 전쟁이 한창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들어서 알고 있는 것과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었다.

자연스레 흉흉한 소문이 퍼졌다. 당장 며칠 안에 바라눔 트라소프가, 혹은 쥬드 포트락이 이끄는 군대가 서쪽 성벽 밖에 모습을 드러낼 것이라는 이야기가 저자에 떠돌았다. 관리들이 바쁘게 뛰어다니며 헛소문이라고 외쳐대도 시민들이 느끼는 불안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내버려 둬라.”

관리들이 군터에게 저자의 민심에 대해 알리고 어찌 대처해야 할지를 물었을 때, 군터는 대수롭지 않게 그리 답했다. 잔뜩 심각한 얼굴을 하고서 물었던 관리들이 순간 멍하게 변할 정도로, 그 대꾸는 정말 대수롭지 않게, 물음과 동시에 툭 하고 튀어나왔다.

“자, 장군. 그것이 어인 말씀이신지…….”

“당장 며칠 안에 적이 나타날지 어떨지는 몰라도, 전쟁이 코앞까지 다가온 것은 사실이지 않은가. 굳이 거짓말을 해가면서 억지로 민심을 달랠 필요는 없다는 말이다. 쉽게 믿지도 않을 것이고, 또 그렇게 해 봐야 얼마나 가겠나.”

“으음.”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관리들이 쉬이 납득하지 못한 것은, 당장 도는 그 흉흉한 소문 때문에 시민들이 동요하면서 덩달아 상권까지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었다. 독자적인 정보원을 갖지 못한 고만고만한 상인들은 저마다 자신들이 연을 튼 관리들에게 전쟁에 대한 소문이 사실이냐고 입 아프게 물어댔다.

즉, 관리들이 신경 쓰는 것은 시민이 아니라 그 상인들이었다. 정확히는 그들이 부리는 돈.

“이곳은 머지않아 전장이 될 확률이 높다. 떠나고자 하는 이들이 있다면 떠나게 하도록.”

“예에?”

점점 더 충격이었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관리들은 어찌 답해야 할지 몰라 눈만 데굴데굴 굴려댔다. 그러나 그들이 그러든 말든, 군터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솔직한 심정으로, 그는 도시에 있는 시민들이 모두 떠난다 해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그들이 있어 봐야 입만 느는 꼴이다. 물론 급할 때는 징집을 해서 어떻게든 써먹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 봐야 훈련 한번 받은 적 없는 잡병이 아닌가. 기껏해야 화살 받이다. 성벽이 있으니 화살받이는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상관없고, 그보다는 입이나 줄이는 편이 낫다.

군터의 무뚝뚝한, 혹은 심드렁한 대꾸를 들은 관리들은 시간이 어떻게 지나는지도 모른 채로 자리만 지키다가 관청을 나섰다.

“정말이지…정치라고는 하나도 모르는 자로군.”

“소문이 맞았소. 저자는 싸우러 온 거요. 이 도시가 어찌 되든, 저자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을 거외다.”

관리들의 표정이 어두웠다. 이전에도 그랬지만, 이제 그들은 보다 심각하게 미래를 걱정하기 시작했다.

* * *

“나서는 자들의 표정이 좋지 않더군요.”

“뭐, 걱정스러울 테지.”

토어릭의 말에 군터는 역시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조금은 보듬으심이 어떨지요. 이 도시를 완전히 장악하려면 저들의 협조가 필요할 겁니다.”

“어째서?”

“그야…저들은 오랫동안 이곳에 자리를 잡고 있던 이들이 아닙니까. 저들의 인맥이라든지, 지식은 분명 여러모로 유용할 겁니다.”

“우리가 이곳에 눌러앉을 것이었다면, 그래. 네 말이 맞겠지. 하지만 그게 아니지 않나. 우리는 싸우러 온 것이다. 이 도시에 대해 필요 이상으로 알아야 할 이유는 없지.”

틀린 말은 아니지만, 토어릭은 껄끄러운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이곳에 온 후로 줄곧 경계, 혹은 두려워하는 시선을 받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언제까지 이곳에 머물지는 모르지만, 머무는 동안에는 마음 편히 있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의 상관이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이상,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으리라는 것을 안다. 그의 머릿속에는 이미 적과 어찌 싸울지, 어떻게 승리해야 할지만 가득할 테니.

“군량은?”

“조금 적기는 했지만, 큰 차이는 없더군요. 적이 당도하기 전까지 꾸준히 긁어모은다면 싸우는 동안 굶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다행이군.”

“다만 화살은 충분한데, 창과 검이 조금 부족합니다.”

“그래서는 곤란하지. 마련할 수 있겠나?”

“상인들을 통해 철을 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만 시기가 시기인지라, 가격이 조금…….”

토어릭이 난처하다는 듯 말끝을 흐리자 군터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징발한다면?”

“반발이 거셀 겁니다. 장군께서도 시장을 보셔서 아시겠지만, 이 도시는 상인들의 손에서 굴러가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개중에는 용병을 수백 명 이상씩 상시 고용하고 있는 이들도 있다는군요.”

“그래서?”

“물론 강압적으로 나간다면 어렵지 않게 누를 수 있을 겁니다. 다만 그렇게 할 경우, 앞으로가…….”

상인들의 힘은 그들이 거느린 사병, 아니 용병이 아니다. 그들의 진정한 힘은 그들이 도시에서, 혹은 도시 밖에서 장사하면서 쌓은 인맥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인맥이라는 것은 보이지 않는 거미줄과 같아서, 하나를 잘못 건드리면 언제 어디서 반발이 일어날지 알 수 없다. 토어릭은 그것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군터는 토어릭의 말을 전부는 아니더라도 대충은 이해했다. 다른 방도가 없을 때면 모를까, 아직 적이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은 상태에서 당장 강압적으로 나간다면 얻는 것보다는 잃는 게 많을 것이라는 것을.

“어쩔 수 없지. 재물은 아끼지 마라.”

“예.”

명을 받은 토어릭은 아낌없이 재물을 사용하여 부족한 물자들을 사들였다. 그 과정에서 몇몇 상인들과 교분을 쌓을 수 있었던 것이 성과라면 성과였다. 너무 가격을 후려치려 드는 상인들을 제치고, 그나마 양심적으로 가격을 부르는 이들과 거래를 트니 토어릭은 그들을 통해 키파의 실정에 대해서 약간의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좋은 거래를 한 것에 기분이 좋아진 것인지, 아니면 이참에 키파의 새로운 통치자와 연을 맺으려는 것인지는 몰라도 그들은 토어릭이 묻는 것들에 숨김없이 술술 이야기해주었다. 물론 토어릭이 묻는 내용이라는 것에 크게 민감한 내용이 없는 것도 한몫했으리라.

“예. 맞습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시장은 허수아비입니다. 음…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우리의 대표이지요. 알고 계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현 시장은 선출된 자입니다. 공식적으로는 아록과 리바스트라의 주 정부가 합의하여 임명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상인회의 추천을 그들이 승인한 것에 불과하지요.”

“상인회?”

“키파의 상인들이 대거 가입해 있는 모임입니다. 대거라고 말씀을 드렸지만, 홀로 다니는 보부상을 제외한 모든 상인이 가입해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렇다면 그대 역시……?”

“물론이지요. 저 또한 가입되어 있습니다. 상인회에 가입이 되지 않으면 키파에서 장사를 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 정도요? 그렇다면 그 상인회의 주인은 누구요?”

모임이라는 것은 어디에나 있다. 특히 사람이 좀 있다 싶은 곳에는 어김없이 무리를 짓는 이들이 있기 마련인 만큼, 상인들이 많은 도시에 상인회라는 것이 있다고 해서 놀랄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들을수록 이 상인회라는 것은 평범한 모임이 아닌 것 같았다.

“주인은 없습니다. 회원 모두가 주인입니다.”

“명목상은 그렇겠지. 명목상은.”

토어릭이 다 알면서 그런 말을 하냐는 듯 은근하게 목소리를 내리깔자 상인은 조금 머뭇거리는 듯했지만, 곧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그…대의원이라는 자들이 있습니다.”

“대의원? 뭔가 귀에 익군. 의원이라는 거, 아바시스 놈들이 쓰는 명칭 아니오?”

“맞습니다. 거기서 따온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상인회의 대소사를 논하는 것은 바로 그들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회원이 주인이라는 건 개소리로군.”

“그렇지도 않은 것이, 대의원은 회원들이 직접 선출한 지위입니다. 또한 임기가 정해져 있어, 임기가 끝나면 다시 대의원을 선출하지요.”

“그대도 그 대의원이라는 것을 뽑은 적이 있소?”

“아직입니다. 대의원의 임기가 5년인데, 반년 뒤에야 한 자리가 비게 됩니다. 뭐, 그래 봐야 연임할 것 같기는 합니다만…….”

여기까지 들었을 때, 토어릭은 대의원이라는 자들이 상인회의 주인이라 확신했다. 이야기를 듣자 하니 그 대의원이라는 자들은 하나 같이 규모 있는 상단을 이끄는 주인들이었다. 이 도시에서 그들이 지닌 영향력은 실로 막대해서, 상인회의 상인들은 그들과 어떤 식으로든 연결되어 있었다. 즉, 그 대의원이라는 자들은 상인회의 상인들을 수하로 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대의원이니, 선출이니 하는 것은 모두 듣기 좋은 허울일 뿐이지.’

웃음이 절로 나왔다. 장사치들이라 그런지 말장난도 참으로 교묘하게 치고 있지 않나. 거기에 더 재미있는 것은, 상인회에 속한 상인들도 그런 말장난의 실체를 알고 있다는 점이었다.

‘어쩔 수 없는 것이겠지.’

깊은 이야기까지 들은 것은 아니지만, 대강 듣기에도 상인회의 힘은 키파를 휘어잡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상인회에 속하지 않고서는 키파에서 장사를 할 수 없을 정도였으니, 좋으나 싫으나 장사를 하려면 상인회가 만든 질서에 순응해야만 한다. 대의원이니 뭐니 하는 장난질을 뻔히 알면서도 어울려줄 수밖에 없는 것이다.

‘흐음. 잘만 하면 재미를 볼 수 있을 것 같기는 한데.’

이번에 거래를 튼 상인들 가운데 은근히 상인회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는 자들이 있었다. 그런 이들을 적당히 충동질한다면 재미있는 그림을 만들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뭐, 놈들이 당장 대들 기미를 보이는 것은 아니니까.’

함부로 건드리기 껄끄럽다뿐이지, 아직 상인들이 뭘 한 것은 없었다. 위험요소를 덜고 싶기는 하지만, 적으로 판명 난 것도 아닌 이들을 먼저 건드릴 필요는 없다. 나중에라면 모를까.

‘그래도…일단은 최대한 알아놓는 것이 좋겠지?’

그의 상관은 쓸데없는 일이라고 치부할지도 모른다. 아니, 필시 그럴 것이다.

하지만 토어릭은 그들이 당분간 머물게 될 도시에 신경 쓸 거리를 남겨두고 싶지 않았다. 외부의 적만 해도 거슬려 죽겠는데, 내부에까지 불안요소를 둘 수는 없다.

‘상인회. 상인회라…….’

탁자를 톡톡 두들기는 손가락에 조금씩 힘이 들어갔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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