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4화
관문 도시라는 것은, 물론 도시마다 다르기는 하지만 일정 부분 교역 도시의 성격을 가지기 마련이다. 사람이 많이 오가는 곳에는 물자도 많이 오가기 마련이고, 돈이 흐르는 법이니까 말이다.
키파도 그런 도시였다. 아록과 리바스트라, 두 주를 잇는 요충지. 사람, 특히 상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도시로서 전쟁이 시작되기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는 부와 활기가 넘쳐 흘렀어다.
하지만 황제가 승천하고, 빈 황좌를 두고 황자들 간에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하면서부터 이곳도 전과는 달라졌다. 돈을 만지는 자들은 필연적으로 정계의 동향에 민감할 수밖에 없고, 그런 경향은 큰돈을 만지는 이들일수록 더 심했다. 키파에서 행세깨나 하는 자들은 만약 황자들 간에 본격적인 다툼이 시작될 시, 부유한 도시인 키파가 시끄러워지리라는 것을 짐작. 아니, 확신했다.
하지만 미래의 혼란을 지금 알았다고 해서 뭐가 달라질까. 그들의 기반은 이 관문 도시에 있었고, 그 기반을 버려둔 채 떠날 수는 없었다. 해서 그들은 나름대로 최소한의 준비는 하되, 급변하는 정세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런데 다행히, 유례없는 전란이 시작되고 꽤 시일이 지났음에도 도시는 평온했다. 시절에 등 떠밀린 어중이떠중이들이 성문을 드나드는 횟수가 상당히 늘기는 했으나, 그 정도는 도시의 자경단이 해결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무엇보다, 아록과 리바스트라를 다스리는 귀족들이 키파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만큼 쓸데없는 소란이 일지 않도록 힘을 써주었다.
하지만 그런 혼란 속의 호시절도 이제는 끝났다. 일곱 번째 황자와 스물일곱 번째 황자의 대립은 예정됐던 것이지만, 그 규모는 예상했던 것보다 더 거대했다. 예전 정복전쟁이 한창이던 시절이 이랬을까? 민심이 뒤숭숭한 것이 당장 내일 키파의 성벽에서 연기가 피어올라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될 정도였다.
그러나 우습게도, 이런 혼란의 틈바구니에서 나름대로 미소짓고 있는 이들이 있었으니 그들은 바로 상인들이었다. 정확히는 군에 관련한, 철이라든지 식량이라든지 하는 품목을 취급하는 상인들.
그들은 전란의 시기에 호황을 맞았다. 그래서 미소를 짓기는 하지만, 나름대로라는 단서가 붙는 까닭은 처음에는 미소지었던 그들조차 이제는 이 전쟁이 앞으로 어찌 흘러갈지 감을 잡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뭇가지 몇 개 정도만 태우는 자그마한 불은 아늑한 모닥불로 여길 수 있어도, 산을 태우는 거대한 산불은 혹 휩쓸리지는 않을까 두려워하게 되는 것처럼.
그런 와중에, 그들은 군터 크렘보르가 대군을 이끌고 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군터 크렘보르? 누구지?”
“들은 적이 있어. 분명 테리브란의 황자로부터 적포를 하사받았다는…….”
“판니른의 방위군단장이라더군.”
“판니른? 거기서까지 병력을 빼 와야 할 정도로 몰리고 있다는 말인가.”
“그 무슨 태평한 소리를. 이 전쟁은 전면전, 아니지. 총력전이 된 지 오래야.”
“하지만 판니른은 분명 얼마 전에 아바시스의 침공을 받았다고 하지 않았나? 그런 곳에서 병력을 빼 와도 괜찮은 건가?”
“…글쎄. 그건 모르겠지만, 당장 우리에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않나.”
“그래. 그렇지. 대군을 이끌고 이곳으로 올 정도면 하루 이틀 머물다 갈 리는 없어. 필시 이 도시를 기점으로 주둔하면서 향후의 전투를 대비하려는 것이겠지.”
이 말인즉, 키파의 상황이 이제까지와는 확연히 달라질 거라는 뜻이다. 전시라는 명분은 모든 것에 우선하니, 기존 키파의 관리들은 모두 그 군터 크렘보르라는 자의 말에 복종하게 될 터.
“최대한 수소문을 해봐야겠군.”
“그래. 시간이 얼마 없지만, 그동안에라도 그자가 대체 어떤 자인지 알아보세.”
그들은 즉각 행동에 나섰으나 시일이 너무 촉박했다. 평야를 까맣게 물들인 군대가 도시 앞에 당도할 때까지 그들이 알아낸 것이라고는 군터 크렘보르라는 자가 크렘보르라는 이름을 얻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신흥 귀족이라는 것과 꽤 고지식한 군인이라는 것 정도였다.
“일단은 몸을 낮추세. 외지에서 온 그자가 처음 이곳에 와서 무엇을 먼저 하겠나? 필시 체면을 세우려 할 테니, 얼마간은 눈치를 봐야 할 것이야.”
그리하여 그들은 관리들의 틈에 섞여서 성문을 나섰다. 당분간 이 도시를 지배하게 될 지배자에게 거스를 의사가 없음을 보이기 위해서 인원도 최대한 단출하게 꾸렸다.
“크렘보르 장군을 뵙습니다.”
시장이 대표로 나서서 인사를 나누는 동안, 그들은 커다란 말 위에 올라타 있는 거한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특별히 눈을 부라리거나, 언성을 높이지 않았음에도 묘한 압박감이 어깨를 짓누르는 듯했다. 상인으로서 이런저런 경험을 하며 단련되지 않았더라면 대번에 안색이 창백해졌으리라.
“이렇게 반겨주니 고맙군. 시장. 그대의 뒤에 선 이들은 모두 관리인가?”
“관리인 이들도 있고, 상인들도 있습니다.”
“상인?”
그의 시선이 뒤쪽으로 옮겨갔다. 그러자 그의 시선을 받은 이들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은 아찔한 기분을 느꼈다.
“예. 비록 이들이 관리는 아니나, 도시를 위해서 매달마다 상당한 기부금을 내곤 합니다. 지금 도시에 물자가 넉넉히 비축된 것도 일부는 그들의 공로라고 할 수 있지요.”
* * *
“호오.”
땀을 삐질삐질 흘리는 시장의 말을 들은 군터가 다시 한번 뒤편의, 상인으로 짐작되는 이들의 면면을 살폈다. 고개를 숙이고는 있지만, 저마다 열심히 눈알을 굴려대는 것이 뻔히 보였다.
‘기부금이라.’
상인들이 관부에 이런저런 명분으로 돈을 바치는 것이야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다. 아무래도 크게 장사를 하려면 관의 도움이 필요하기 마련이고, 그 도움을 구하기 위해서는 적당한 성의를 보여야 한다.
하지만 시장의 입에서, 그것도 군대를 이끌고 온 신임 사령관의 앞에서 기부금 운운하며 상인들을 띄워줄 정도면 키파의 상인들이 일반적인 상인들과는 뭐가 달라도 다르다는 뜻이다.
‘관문 도시라고 했지.’
일반적인 도시가 아니다. 무수한 물자와 사람이 오가는 만큼, 흐르는 재물의 양도 일반적인 도시와는 다를 터.
오는 길에 길잡이에게 대략적인 설명은 들었지만, 아무래도 이 도시에 대해 제대로 알려면 조금 더 내밀한 사정까지 알아봐야 할 듯했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귀찮은 일에 손을 뻗고 싶지는 않지만, 어쨌거나 한동안은 이 도시에 머물러야 하니 귀찮아도 어쩔 수 없었다.
“인상적이군.”
이 말 한마디만은 진심이었다. 인상적이었다. 시장이라는 작자가 장사치들의 대변인 노릇이나 하는 꼴이…상당히 인상적이었다.
“드시지요. 부족하게나마 장군을 맞이하기 위해 공들여 준비해놓았습니다.”
“병사들이 머물 곳은?”
“물론 준비해두었습니다. 에…그러니까.”
“2만 5천.”
“아, 예. 빠듯하기는 합니다만, 그 정도라면 어떻게든 수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시장이 볼을 타고 흐르는 땀을 닦을 생각도 못한 채 고개를 주억거렸다.
2만 5천. 아무리 키파가 제법 규모 있는 도시라고 해도 수용하기에 만만한 수는 아니다. 그나마 줄어들어서 망정이지, 본래대로 4만이었다면 시장의 얼굴에 흐르는 땀이 배로 늘어났을 것이다.
본래 4만이었던 병력 중 1만 5천은 로드니 캄브라이가 이끌고 갔다. 그는 군터와는 달리 아록의 주도 가까운 곳에서 머물게 될 예정이었다. 이는 하브람 카리아의 요청에 의한 것이었지만, 군터는 묘하게 후련해 보이던 로드니 캄브라이의 얼굴을 기억했다. 그간 여기까지 함께 오면서 좀처럼 기를 펴지 못했던 그였는데, 하브람 카리아의 요청은 어쩌면 그에게 있어 바라마지 않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또 모르지. 야심이 있는 녀석이니까.’
독자적으로 군을 이끌고 움직이게 되면 아무래도 이름을 알리기가 쉬워진다. 어쩌면 로드니 캄브라이는 그것까지 생각했을지도.
하지만 뭐,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다. 4만이 2만 5천이 된 건 조금 아쉽지만, 신경 써야 할 짐이 사라졌으니 썩 나쁘지는 않다.
“장군. 이제 이 도시의 안위는 오롯이 장군의 손에 달렸습니다. 부디 적의 창칼로부터 이 도시를 수호해주십시오.”
상인들의 대변인 같은 땀 많이 흘리는 시장은 다른 것은 몰라도 말주변 하나는 쓸만했다. 그리고 그럭저럭 대가 세기도 했다. 보기만 해도 덥게 느껴질 정도로 땀을 주룩주룩 흘리면서도 할 말은 꾸역꾸역 다 해댔으니 말이다.
“오면서 보니 무장한 이들이 제법 눈에 띄더군.”
성문을 지나 도시 한복판으로 들어오면서 무수한 인파를 보았다. 그중에는 편한 차림의 백성들도 있었지만, 제대로 무장한 이들도 적지 않았다.
“아아. 그들은 용병입니다. 오가는 이들이 많다 보니, 일거리를 찾아온 용병들도 적지 않지요.”
용병이라. 그럴 거라고 짐작했었다. 튼실하게 무장했지만, 통일성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었으니 말이다.
“그대의 말처럼 수가 상당하던데, 관리는 제대로 되고 있는가?”
듣는 이에 따라 의심하는 투로 들을 수도 있는 말이었다. 그러나 시장은 불쾌해하는 기색은 전혀 없이 손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찍어내며 공손히 답했다.
“외부인들은 성문 출입 시 의무적으로 신분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특히 규모가 있는 용병단의 경우 특별관리 대상인 데다, 그들이 도시 안으로 들어오기 위해서는 자격 있는 보증인이 필요하지요.”
“자격 있는 보증인이라.”
“보통은 일정 지위 이상의 관리, 혹은 명망 있는 상단장입니다.”
군터는 시장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잔에 가득 담긴 포도주를 단번에 비우고 화제를 돌렸다.
“도시 내에 비축된 물자를 확인하고 싶군.”
“지금 말입니까?”
시장은 연회가 이제 막 시작됐는데 꼭 그래야겠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으나, 군터의 무뚝뚝한 얼굴을 보고는 또 다시 땀을 흘리며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연회 자리에서 공무를 본다고 하니 분위기가 흐트러졌지만, 군터의 수하들은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그들을 위해 준비된 것들을 마음껏 즐겼다. 솔롬에서부터 따라온 이들은 말할 것도 없고, 판니른에서 새로이 합류하여 따르게 된 자들도 여기까지 오는 동안 군터 크렘보르라는 사람에 대해서 어느 정도 익숙해진 상태였다. 때문에 그들은 서류를 살피는 군터를 앞에 두고서도 잔을 들고 이야기를 나누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괜찮군.”
군터가 도시 내에 비축된 물자의 현황을 스윽 훑어보고는 그리 말했다. 초조해하던 시장의 얼굴에 안도감이 감돌았다.
“하루 이틀 만에 마련할 양은 아닌데, 우리가 올 것을 예상했었나?”
“전쟁이 계속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요. 언제고 전화에 휩쓸릴 때를 대비하여 꾸준히 준비해두었습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