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3화
“이게 무슨 짓이냐!”
보리스는 자신도 모르게 버럭 외치며 고개를 돌렸다. 누가 감히 이런 짓을 저지른 것인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범인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활을 들고 이쪽을 바라보는 자는 단 한 명뿐이었으니까.
“저를 찾고 계십니까?”
“니클라스 공…….”
범인을 찾기만 하면 바로 손을 써버릴 듯한 기세였던 보리스가 표정을 조금 누그러뜨렸다. 화를 내고는 싶은데, 상대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사람이라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혼란스러워진 것이었다.
“이게 대체 무슨 짓이오?”
“그건 제가 여쭙고 싶은 말입니다. 대체 뭘 하고 계신 겁니까?”
“뭐라?”
“공자께서는 일군을 이끄는 대장이십니다. 그런 분이 이런 한가롭고 위험한 짓을 저지르고 계십니까? 본인의 위치에 대한 자각이 있으신 겁니까?”
“…말이 지나치군.”
“힘들게 전투에서 승리한들 공자의 신변에 문제가 생긴다면 이게 다 무슨 소용입니까. 공자께서는 본인의 사사로운 호승심 때문에 수천 명이 목숨 걸고 싸우는 전투를 우습게 만드신 겁니다.”
니클라스의 말이 이어질수록 보리스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졌다. 그가 지금 이런 말을 들으면서까지 참고 있는 것은 니클라스의 말에 설득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니클라스가 엄밀히 말해 그의 수하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니클라스는 그의 수하가 아니라 부친은 군터의 수하로, 그를 여기까지 데려온 것은 어디까지나 보리스 자신이 니클라스에게 부탁을 했기 때문이었다. 함께 해달라 부탁해서 데려온 부친의 수하를, 아무리 열이 받는다고 해도 함부로 대할 수는 없는 것이다.
‘사사로운 호승심이라고.’
보리스는 억지로 열을 식히면서 니클라스의 말을 곱씹었다.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군을 이끄는 대장으로서 할 만한 일도 아니었고. 하지만 여기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저 꾸중 받는 모양새로 물러난다면 꼴이 우습게 되지 않는가.
‘아니. 아니지. 이 지경이 되어서도 체면을 생각하다니. 내가 언제부터 그렇게 못난 놈이 되었는가.’
성질대로 했다면 니클라스를 단번에 벌했을 것이나, 그럴 수는 없었다. 한 번 욱하는 마음이 지나가고 나니 이성이 조금씩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더 부끄러워질 뻔했는지를 깨달았다.
‘머리가 어떻게 되었던 것이 아닌가. 이 무슨 추태를…….’
보리스는 입을 꾹 다물고 검을 뽑았다. 잠시 니클라스와 언쟁 아닌 언쟁을 벌이는 사이 거한은 이미 숨이 끊겨 있었다. 그토록 치열하게 맞붙었던 상대가 이리 허무하게 죽어버린 것이 아쉬웠지만, 이것이 전장에 선 자의 숙명이려니 하고 애써 이해했다.
“여기까지 직접 달려온 것을 보니, 그쪽의 일은 다 끝난 모양이오.”
“다 끝나지는 않았습니다만, 제가 없어도 될 정도는 되었습니다.”
“다행이군.”
“그러게나 말이오. 참으로 다행이지.”
두 사람의 대화에 제삼자가 끼어들었다. 니클라스는 놀라는 기색이 없었고, 보리스는 뜻밖이었는지 눈을 크게 떴다.
“장군. 어찌 이곳에…….”
“이곳에 만만치 않은 자가 있다는 소리를 들어서 말이오. 걱정이 돼서 달려왔소만…걱정할 필요는 없었던 모양이군. 참으로 대단하시오.”
프란시스 티브리악의 시선이 낙마하여 쓰러진 거한의 시신으로 향했다.
“유명한 자였습니까.”
“제법 유명했지. 하지만 이제 그게 무슨 소용이겠소.”
보리스는 자신이 상대했던 자가 이름이 꽤 알려진 자였다는 것보다, 프란시스 티브리악이 여기까지 왔다는 사실에 집중했다.
걱정이 돼서 왔느니 어쨌느니 하는 것은 무시해도 좋다. 중요한 건 지휘관인 그가 여기까지 나서도 괜찮을 정도로 전장의 상황이 좋다는 점. 즉, 저쪽에서도 승기를 굳혔다는 점이다.
“그렇게 힘들었었는데, 그대가 오고 단 하루도 되지 않아 모든 근심 걱정이 해결되는구려.”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렇지. 하지만 머지않았소.”
프란시스 티브리악이 싱긋 웃었다. 사내가 보기에도 참 근사하다는 생각이 절로 드는 멋진 웃음이었다.
그를 마주한 보리스 역시 절로 웃음을 지었는데, 애써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품고 있었던 불안감이 사라지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야심차게 계책을 내기는 했지만, 혹시 잘못되지는 않을까 하는 불안함은 어쩔 수 없었다. 일이 잘못된다면 그것은 잘못된 계책을 내놓은 자신의 탓이 될 테니까.
하지만 이렇게 잘 풀렸으니, 불안감은 사라지고 대신 큼직한 성취감이 가슴을 덥혔다. 하나의 전투에서 승리했을 뿐이지만, 제대로 이뤄냈다는 생각이 들어 절로 웃음이 흘러나왔다.
* * *
“송구스럽습니다. 장군. 마땅히 부친께서 장군을 맞이하셔야 할 테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괜찮소.”
노만 카리아는 부친인 하브람 카리아가 직접 군터를 맞이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사과했지만, 군터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는 노만 카리아가 사과하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의 말처럼 상황이 상황인데, 이런 시기까지 체면이니 격식이니 하는 것을 따져야 한단 말인가.
“적은 전방위적으로 아군을 압박해오고 있습니다. 서쪽에서부터 쉼 없이 병력이 건너오고 있고, 적의 군세는 나날이 커지고 있습니다.”
애초에 처음 침공을 개시했을 때의 병력은 전력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물론 그건 이쪽도 마찬가지기는 하지만, 어쨌거나 적이 본격적으로 힘을 쓰기 시작했다는 점은 분명했다.
“벌써 아록의 삼분지 일은 적의 수중에 넘어갔습니다. 삼분지 일은 황폐화가 되었으며, 나머지 삼분지 일만이 온전하게 남아 있지요.”
아록에 도착하기 전에 들었던 것보다 더 최악이었다. 그 말을 하는 노만 카리아의 얼굴은 살짝 일그러져 있었다. 아록의 주인을 자처하는 카리아의 일원으로서, 아록이 이렇게 망가진 것에 어지간히 상심하고 있는 듯했다.
“적의 공격이 전방위에서 쏟아지고 있는 터라, 이전에 온 원군도 각지에 흩어져 저마다 전선을 맡아 싸우고 있습니다. 적의 공세가 아록에만 집중된 것도 아니라, 리바스트라까지 퍼져 있지요. 내부적으로 나눈 회의 결과로, 장군께서는 일단 키파에 가주셔야겠습니다.”
“키파?”
“아록과 리바스트라의 접경 지역입니다. 공식적으로는 아록에 속해 있지만, 실상 리바스트라와 공동으로 관리하는 도시지요. 일종의 관문 도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북쪽으로는 리바스트와 통하고, 남쪽으로는 아록과 통하는 교통의 요충지입니다. 그곳을 통하는 물류가 상당하여, 평화롭던 시절에는 그곳의 세를 두고 아록과 리바스트라의 관리들이 매달 신경전을 벌였을ㅈ 정도지요. 하지만…그것도 다 옛일이 되었습니다.”
“현재 상황은 어떻소?”
“제 말만 듣고도 짐작하셨겠지만, 썩 좋지 않습니다. 키파가 요충지라는 것은 적도 알고 있지요. 두 주를 향한 공세를 시작할 때부터 적은 호시탐탐 키파를 노려왔습니다. 다행히 지금까지는 어떻게든 버티고 있습니다만…전선이 조금씩 밀리기 시작하면서 키파의 안위도 더는 장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만약 키파를 빼앗기게 된다면 두 주를 공략하고 있는 적의 군대가 서로 쉬이 통할 수 있게 되니, 아군으로서는 어떻게든 그곳을 사수해야만 합니다.”
그 도시를 사수한다는 것이 말만 들어도 만만치 않은 일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말을 잇는 노만 카리아의 기색이 조심스러웠다. 자칫 먼 길을 달려온 원군을 험지로 몰아넣는다며 반발하지는 않을지 우려하는 듯했다.
하지만 군터는 그의 눈치를 보는 카리아의 직계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그의 말이 이어지기만을 기다릴 뿐.
“장군께서 군대를 이끌고 키파에 주둔해주십시오. 그곳을 지키면서, 상황에 맞추어 남쪽과 북쪽의 아군과 호응해주신다면 전선을 유지하는 것이 한결 쉬워질 것입니다.”
“만만치 않은 일 같군.”
“…그럴 것입니다. 분명 그럴 테지요. 아군을 위해 먼 길을 달려오신 장군께 이런 어려운 일을 부탁드리게 되니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이것은 저뿐만 아니라 제 아버님과 가문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글쎄. 과연 어떨까.
그 말의 진정성을 의심하기 전에, 말의 내용부터가 썩 달갑지는 않은 것이라 근처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할렌을 비롯한 수하들의 표정이 그리 좋지 않았다.
호의적이지 않은 분위기를 느꼈는지, 노만 카리아는 더 입을 열지 않고 조용히 군터의 답을 기다렸다.
“마음에 안 든다고 거부할 수도 없는 일이지. 솜씨 좋은 길잡이나 붙여주시오.”
“당연히 그리하겠습니다. 아록과 저희 가문은 장군의 노고를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이어지는 감사의 인사는 듣는 둥 마는 둥 하고, 군터는 따로 그의 수하들을 불러모았다.
“먼 길을 달려왔는데 다시 먼 길을 가야 하는군. 달갑지 않겠지만, 이곳의 지휘권은 하브람 카리아에게 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굳이 소관들에게 그리 말씀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장군. 불만이 없지는 않지만, 어쩔 수 없는 일임을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키파라고 했던가. 그 정도의 요충지라면 지금 당장은 문제가 없을지라도, 서서히 전선이 밀리고 있는 현 상황을 고려해보면 얼마 지나지 않아 최전선이 될 확률이 높다. 그 점만은 마음에 들었다.
“길잡이를 붙여주겠지만, 미리 알아둘 수 있는 것은 알아두고 싶군.”
“최대한 알아보겠습니다.”
“내일 당장 출발하게 될 테니, 병사들을 미리 달래두어라. 짧은 길도 아닌데, 시작부터 안 좋은 분위기가 돌아서는 안 되겠지.”
“예.”
지체할 시간은 없었다. 지금도 꾸준히 전선이 밀리고 있는 판에, 조금이라도 먼저 그 관문 도시라는 곳에 도착해야 했다. 그래야 미리 준비를 해놓을 수 있을 게 아닌가.
키파까지 가는 길은 꽤나 멀었다. 그래도 다행이라면 길이 잘 닦여 있고, 길을 안내하는 길잡이의 솜씨가 썩 나쁘지 않아 이동하는 동안 지형 때문에 짜증이 나는 일은 없었다는 점이다. 부지런한 행군과 평탄한 길이 어우러지니 키파까지 가는 길은 처음 예상한 것보다 더 순조로웠다.
“저기 성벽이 보이십니까? 저곳이 바로 키파입니다.”
길잡이의 말이 있기 훨씬 전부터 알고 있었다. 사방이 탁 트인 평야인 데다, 도시 자체는 언덕 위에 자리해 있으니 멀리서도 도시의 성벽의 알아볼 수 있었다.
“방어하기에 썩 좋은 형태는 아니로군요.”
할렌의 생각이 곧 군터의 생각이었다. 사람들이 오가기에는 편할지 몰라도, 군사적으로는 그리 좋지 못한 입지 조건이었다. 그나마 유리한 점이라면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다는 점과 바로 옆에 자그마한 강이 흐르고 있다는 점일까?
“저기 보십시오. 장군을 마중 나온 이들인 것 같습니다.”
오백 정도 되어 보이는 병사들이 도시 밖에 나와 있었다.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길잡이의 말처럼 마중을 나온 이들인 듯했다.
(다음 화에서 계속)